여행도 타이밍

by 설인

“난 2월에 남미 갑니다~. 몇 달 있다 올 계획인데, 갈 생각 있으면 같이 가고? 아님, 나 혼자라도 갈 것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옆에서 치앙마이 골프여행을 검색하고 있는 남편에게 결연한 목소리로 땅! 땅! 선언했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가면서, 은퇴 후 첫 번째 여행지로 찜해 놓은 남미앓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한 살이라도 더 젊고 건강할 때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여행 난이도가 높다는 남미 대륙에 다녀오고 싶은데, 또 한 해가 가고 있으니 조바심이 났다.


어쩐지 남미는 선뜻 혼자 갈 용기가 나지 않아 봄부터 몇 차례 남편에게 의향을 물어봤었다.


“지구상에 좋은 여행지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치안 안 좋고 위험한 곳을 가려고 해? 장거리 이동하다 허리 다 나간다잖아. 낼모레면 환갑에 뇌경색 환자가 그런 열악한 나라들 여행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게? 난 안가. 당신도 정 가고 싶으면 여행사 패키지로 짧게 다녀오는 게 좋겠어.”


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이젠 정말 혼자라도 떠나야겠다 결심하고 최후통첩을 날린, 출발 2개월 전의 그날!


“그래? 그럼 당연히 같이 가야지~.”

“??? 정말 같이 간다고?"

어떻게 된 일일까?




역시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제주살이가 6개월째로 접어들며 남편의 혈당이 내려가고 체력이 좋아졌다. 식단을 조절하며 날마다 고근산을 오르고, 여기저기 숲길, 한라산 둘레길을 걸은 덕이다. 또, 제주에서 합리적으로 지출하며 건강하게 먹고 걷는 생활여행 패턴을 익힌 터였다. 겨울로 접어들며 거센 바람 때문에 산책도 트레킹도 못하는 날이 잦아지니 제주살이를 그만 마무리 짓고 싶던 차였다.


타이밍이 No를 Yes로 바꾸는 마법을 부린 것이다.


든든한 보디가드 겸 동행자를 얻으니 마음속에 묵직하게 깔려있던 남미여행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여행 기간은?

3개월? 6개월? 돌발변수가 많은 곳이라는데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영 안 맞으면 한 달 있다 돌아올 수도 있는거지. 일단, 계획은 예산 다 소진될 때까지 다니는 걸로!


여행 루트는?

시계 반대방향 국민루트로 가려니 페루 리마가 현재 시위 중이라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들어가기로 한다. LA, 리마를 경유해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가는 편도 항공권만 끊고, 현지 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다니기!


이 때는 몰랐다. 우리 여행이 9달이나 계속될 줄을, 콜롬비아, 멕시코를 거쳐 미국 메인 주와 캐나다 동부의 머나먼 PEI까지 가게 될 줄을...


여행자보험을 가입하려니 남편은 뇌경색 입원 치료 이력이 있어 보험가입이 불가하단다. 이제 여행의 무탈함은 운에 맡기고, 80만 원 넘는 보험료가 굳었음을 기념하며 치맥 한잔!


겨우 황열병 예방접종은 했지만, 볼리비아 비자는 현지에 가서 받기로 하고 얼렁뚱땅 짐을 꾸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2박 할 숙소만 예약한 채 출발한다.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이 매일 기다리고 있는 여행, 아침마다 배낭을 메고 그 길로 나설 생각을 하니 궁금함과 설렘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늘 같은자리에서 반복되는 보람도 해답도 없는 책임과 의무, 관계의 피로감에서 허우적대는 나에게 청량한 휴식을 주고 싶은 여행!


멀리 떨어져 있다 보면 지혜의 밀알 몇 개 주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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