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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인 Jan 22. 2024

5. 체력과 타협하며 파타고니아를 만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아르헨티나 항공 오피스를 방문하여 파타고니아 여행을 위한 항공권을 구매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파타고니아를 다녀와야 한다.     


3월이 중순으로 넘어가는 즈음 번째로 도착한 도시, 우수아이아에서는 갑작스레 맞닥뜨린 세찬 바람과 쌀쌀한 기온, 숙소 소동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몇 마리 없다는 펭귄 구경보다 건강이 우선이므로 6시간짜리 펭귄투어 대신 3시간여 소요되는 비글해협 투어와 시티투어 기차를 타고 소문난 킹크랩 맛집을 방문했다. 비글해협 투어 중에 수면 위로 솟구치는 고래를 보는 행운을 얻은 것 말고는 특별한 인상이 남지 않는 도시다.

    

우수아이아에서 3일 머문 후 엘칼라파테로 올라오니 역시나 제일 먼저 맞이해 주는 건 바람! 파타고니아는 어디 가나 바람, 바람, 바람의 영토다. 모레노 빙하와 엘찰튼을 다녀오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데, 심한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낡은 자동차들, 비포장도로에 날리는 흙먼지와 황량하고 메마른 풍경에 마음이 가지 않아 당황스럽다.      

     

모레노 빙하를 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중에는 한 회사가 독점 운영하는 빅 아이스 투어와 미니 트레킹이 있다. 빅 아이스 1인 투어 비용은 50만 원이 훨씬 넘고 미니 트레킹은 그의 절반 정도되는 금액이다. 투어 프로그램을 살펴보며 이게 이렇게 까지 비쌀 일인가, 합당한 가격인가에 대한 의문과 반감이 일면서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그렇듯 지금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나 싶어 미니 트레킹을 예약했다. 빅 아이스 투어는 나이 제한이 있어 신청할 수 없다.


그러나 투어를 앞두고 남편이 주저한다. 오른쪽 다리 감각이 완전치 않아 발에 무거운 아이젠을 차고 빙하 위를 잘 걸을 자신이 없다고 한다. 위험할 것 같다... 이미 몸에 파스를 붙이고 다니는 처지에 빙하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긴장하며 걷다 무릎에도 무리가 갈 것 같다. 바로 투어 예약을 취소했다. 대신, 자동차로 방문하여 빙하 전망대를 돌아보기로 다.   

    

모레노 빙하와 엘찰튼 다녀오는 1박 2일 여정을 위해 센트로 Hertz에서 렌터카를 약했다. 빙하 미니 트레킹 1인 가격도 안 되는 비용으로 2일간 렌터카를 이용하게 되었다.  

     

출발하는 날, 렌터카를 받기 위해 사무실 오픈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속 터지게 느린 일 처리로 건물 구석에서 비를 피하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남편들은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짐을 지키고 있는 같은 처지의 네덜란드에서 왔다는 동년배 여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부부는 SUV를 렌트해 칠레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서 토레스 델 파이네를 둘러볼 예정이란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W 트레킹 할 사람만 가는 곳인 줄 알고 등산 난이도에 엄두가 안나 깔끔하게 포기했는데 말이다. 자동차로 뷰 포인트를 둘러볼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트레킹은 못하더라도 그 유명한 삼봉이 있는 토델파를 렌터카로 둘러봐도 참 좋았겠구나.


어설픈 정보 수집과 미흡한 준비, 얼렁뚱땅 출발로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이 엉성한 여행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것은 바뀌는 상황에 대한 빠른 순응과 긍정이다!

 

1시간 넘게 기다려 자동차를 받고 모레노 빙하를 향해 출발한다. 남편이 수동기어에 바로 적응하고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앞 유리에 난 작은 크렉이 눈에 들어온다. 업체에서 확인하고 내 준거겠지? 반납할 때 우리 과실이라고 뒤집어씌우면 어쩌나? 잔걱정으로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진다. 지금 되돌아가서 확실히 해두고 오자 하면 쓸데없는 걱정 한다고 남편이 버럭 할 것 같아 말을 참고 일단 사진만 찍어놓기로 한다.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별 일 없이 잘 반납했다.


엘칼라파테 시내를 벗어나니 이제껏 보지 못했던 독특한 풍경이 펼쳐진다. 사진에 제대로 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부지런히 휴대폰 카메라를 누르고 연신 감탄사를 쏟아낸다. 이제야 광활한 파타고니아의 대자연 속에 들어와 있다는 실감이 난다.

모레노 빙하 전망대 코스는 유명 관광지답게 색깔 별로 잘 조성되어 있다. 빨강 코스부터 노랑 코스까지 2시간 정도 천천히 걸으며 빙하를 만끽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빙하를 실컷 눈에 담는다. 이곳 빙하는 일부 오염이 된 것인지 거뭇거뭇한 부분들이 있지만 각도에 따라 서늘하고 오묘한 푸른빛을 띠는 모습이 신기하다.


전망대 휴게소 식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이제 엘찰튼을 향해 출발한다.      


엘칼라파테에서 엘찰튼으로 가는,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가 젊은 시절 오토바이 여행을 하며 달렸다는 멋진 루타(LUTA) 40을 달린다. 체 게바라의 후예들처럼 바이크 족들이 쌩쌩 지나쳐 간다. 운전자들이 왜 루타 40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겠다. 인간의 문명이 닿지 않은  날 것의 원시적인 광활한 풍경 한가운데를 달리는 기분이란! 무채색의 장엄한 자연에 압도되어 말을 잊는다.


3시간 넘게 달려 ‘개와 늑대의 시간’ 쯤 아름다운 산악마을 엘찰튼(El Chalten)에 도착했다. 엘찰튼은 트레킹을 마쳤거나 트레킹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작은 마을에 생기가 넘쳐난다. 제법 쌀쌀한데도 야외 테이블에서 차가운 생맥주를 마시고 있는 젊음들이 싱그럽고 활기차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불타는 고구마’로 불리는 피츠로이(Fitz Roy)의 일출을 보기 위해 엘찰튼에 온다지만 새벽 2~3시부터 산을 올라야 하는 일정이 우리에겐 다른 세상 이야기다. 추위와 어둠, 가파른 오르막이 있는 새벽 산행을 감당할 체력도 열망도 없으므로 왕복 3시간 걸리는 카프리 호수까지만 다녀오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다음 날 9시에 숙소를 나와 피츠로이를 오른다. 얼마만의 산인가? 조금 올라가니 엘찰튼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비교적 평탄하게 이어지는 예쁜 숲길을 걸으며 오랜만의 산행에 기분이 좋아진다. 카프리 호수에 도착해 구름에 감춰진 피츠로이 얼굴을 만난다. 여기 와서 저걸 보는구나. 마음이 뭉클해진다. 부드러운 바람과 춥지 않은 청명한 날씨, 피츠로이를 만나기에 완벽한 날이다.


무리하지 말자고, 건강 상태를 예민하게 살피고 체력과 타협하며 우리 레벨대로 파타고니아를 즐기자고 선택한 렌터카 여행,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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