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샤(Iruya)에서 산에 취해 길을 잃다

by 설인

아르헨티나 북서부의 작은 도시, 틸카라(Tilcara) 버스터미널에서 하루에 한 번, 아침 8시에 출발하는 이루샤(Iruya)행 버스를 탔다.


당장 폐차장으로 직행해야 할 것 같은 낡고 남루한 버스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굽이굽이 산을 넘고 시냇물까지 건넌다.


해발고도 4,000미터 산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버스는 차량 한 대 겨우 지나갈만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공간이 있는 커브길까지 후진해서 피해 주는데, 그 뒤가 천길 낭떠러지다.


간신히 엔진만 가동되는 듯한 이 너덜너덜한 버스의 브레이크가 파열되거나, 운전기사가 페달을 잘못 밟기라도 한다면?


급커브길을 돌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들어 손잡이를 움켜쥐고 비명을 참는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기사에게 목숨을 위탁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어쩌자고 이런 데를 가고 있는가?


어느 블로거가 ‘때 묻지 않은 예쁜 마을’이라고 올린 여행기 하나 달랑 읽고서 한 이틀 쉬다 오자고 출발한 길이었다...


마침내, 버스는 3시간 30분 만에 이루샤 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했다. 승객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운전기사에게 온 마음을 다해 감사 인사를 하고 내렸다.




아르헨티나 북서부 살타주에 위치한 이루샤는, 협곡사이에 깊이 꽁꽁 숨어 있다가 세상에 알려진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인구 1500여 명의 이 고산 마을(해발 2,780m)에 전기가 공급된 것이 불과 10년 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 곳곳에서 원주민 복장과 고유의 헤어스타일을 한 주민들을 만날 수 있다.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간 듯한, 아직 덜 문명화된 동화 같은 마을이다.


특히,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이제껏 본 적 없는 파스텔 톤의 다채로운 색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답고 매혹적인 산들이 찬탄을 자아낸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 목숨을 걸긴 했지만, 오길 잘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마을의 뷰 포인트인 콘도르 전망대(Mirador del Condor)로 향했다.


마른 흙과 모래, 자갈로 이루어진 등산로는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데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조심스럽게 발을 딛느라 진땀이 났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급경사 오르막 길이 고도를 쑥쑥 올리니 숨이 턱턱 막힌다.


열댓 번도 넘게 멈춰 쉬며 숨을 고르는 사이, 전문 트레커 포스를 풍기는 젊은 프랑스 커플이 인사를 건네며 성큼성큼 가뿐하게 잘도 올라간다.


1시간 40분 만에 콘도르 전망대에 도착했다.


올라온 수고를 말끔히 잊게 해주는 멋진 뷰다! 신비로운 색깔을 뿜어내는 코끼리 발 같은 산들과 그 품에 안겨있는 작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72색 크레파스에는 저 산 색들이 모두 있으려나? 가장 매료된 색은 회색과 녹색을 버무려놓은 듯한 색이다.



콘도르 전망대인데 콘도르가 보이지 않지만, 산에 취해 아쉽지 않았다.


올라올 때 대화를 나눴던 프랑스 커플이 전망대 바위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더니 곧바로 일어섰다. 올라왔던 길로 하산하겠거니 했는데, 반대쪽으로 난 산 허리 길로 향한다. 마을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지도에 콘도르 전망대 등산로는 하나만 표시되어 있는데?


실처럼 가늘게 이어진 길로 그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간다. 어디서 등장했는지 원주민 아주머니도 머리에 짐을 이고 개 두 마리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아는 사람만 아는 트레킹 코스와 하산길이 또 있을지 모른다!


궁금하다. 산허리를 휘감고 있는 저 작고 예쁜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는 저 산 능선을 따라 걸으며 이 아름다운 산을 좀 더 누리고 싶어진다.


저 길을 가보자고, 우리는 홀린 듯이 매우 신속하게 결정했다.





멀리서 마냥 평화롭게만 보이던 산길이 실제는 매우 좁고 위험했다.


길옆이 낭떠러지라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초긴장하며 바닥을 잘 보고 걸어야 했다. 그 와중에 문득 고개를 들면 사방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 같은 산들! 탄성이 터져 나온다.


계곡물에 세수도 하며 산 모퉁이를 돌고 돈다.


프랑스 커플이 되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마을로 내려가는 다른 길이 있는 것 같다. 우리도 그 길을 찾아 내려가기로 한다. 이곳 지리도 모르고 인터넷도 안 터지는데, 낙관적인 마음만 장착하고 계속 걷는다.


외딴집 한 채가 있길래 길을 물어보러 들어가니 안에 사람이 없다! 그리고 여기부터는 길이 여러 갈래 나 있다. 머리를 굴려 소똥인지 야마똥인지 가축의 배설물이 있는 쪽으로 가니 초원을 지나 절벽 끝 가장자리에서 길이 끝나버렸다.


이 길 저 길 따라 산모퉁이를 세 번쯤 더 돌고 나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걷고 있는 길이 길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간다. 길을 잃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3시다! 산은 빨리 어두워질 텐데 늦어도 6시 전에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다른 하산길을 포기하고 아는 길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는데, 너무 많이 와버렸다! 시간이 빠듯하다. 위기 상황을 인식한 몸과 마음이 팽팽하게 긴장한다.


왔던 길로 되돌아 출발한 지 몇 분 만에, 둘 다 선인장 가시에 찔렸다. 주저앉아 운동화를 뚫고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면서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무섭다.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낭떠러지로 추락하지 않도록 조심하되 빨리 걸어야 한다. 그 어려운 걷기를 해내야 한다.


그 와중에, 갈 때 흘렸던 남편의 스포츠 타월을 발견했다. 누군가가 주워서 길 한가운데다 활짝 펼쳐 놓았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네 귀퉁이를 돌멩이로 눌러놓았다. 우리의 사소한 물건을 찾아주려고 애쓴 이렇듯 착하고 친절한 사람은 누굴까? 경황 중에 받은 감동에 눈물이 핑 돌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옮기던 중, 반대편에서 원주민 청년이 긴 통나무 두 개를 어깨에 둘러매고 온다. 내 한 몸 균형 잡고 가기도 힘든 고산 좁은 길에서 무겁고 긴 통나무를 양 어깨에 걸치고 가다니!


드디어 콘도르 전망대가 나타났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도 못 하고 불과 몇 시간 전에 평화롭게 앉아 경치를 감상하던 곳!


때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콘도르 서너 마리가 날아올라 주위를 빙빙 돈다. 안도감에 비로소 숨이 편안해졌다.


어둠이 밀려오기 전에 무사히 마을로 내려왔다. 콘도르 전망대 3시간 다녀오기 일정이 7시간 넘는 모험적인 트레킹으로 바뀐 날이다.




이루샤는 인근 San Isidro까지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바쁜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일반적인 여행지가 아니다.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여행정보도 거의 없어 기대 없이 갔는데, 아름다운 마을과 환상적인 산, 예기치 못한 모험이 더해져 이루샤는 이후 우리가 꼽는 남미 최고의 여행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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