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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인 Jul 18. 2024

8. 이루샤(Iruya)에서 산에 취해 길을 잃다.

아르헨티나 북서부의 작은 도시, 틸카라(Tilcara) 버스터미널에서 하루에 한 번, 아침 8시에 출발하는 이루샤(Iruya)행 버스를 탔다. 당장 폐차장으로 직행해야 할 것 같은 낡고 남루한 버스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굽이굽이 산을 넘고 시냇물도 건넌다.   

  

해발고도 4,000미터 산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버스는 이제 차량 한 대 겨우 지나갈만한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공간이 있는 커브길까지 후진해서 피해 주는데 그 뒤가 천길 낭떠러지다. 여기서, 간신히 엔진만 가동되는 듯한 이 너덜너덜한 버스의 브레이크라도 파열된다면, 운전기사가 페달을 잘못 밟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생을 마감하겠구나. 급커브길을 돌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들어 손잡이를 움켜쥐고 비명을 참는다. 어쩌자고 이런 곳을 가고 있는 것일까?


숙소 호스트의 추천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온 블로거가 ‘때 묻지 않은 예쁜 마을’이라고 올린 여행기 하나만 달랑 읽고서 한 이틀 쉬다 오자고 출발한 길이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기사에게 목숨을 위탁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마침내 버스는 3시간 30분 만에 이루샤 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했다. 승객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친다.  


아르헨티나 북서부 살타주에 위치한 이루샤는 협곡사이에 깊이 꽁꽁 숨어 있다가 세상에 알려진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인구 1500여 명의 이 고산 마을(해발 2,780m)에 전기가 공급된 것이 불과 10년 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 곳곳에서 원주민 복장과 고유의 헤어스타일을 한 주민들을 만날 수 있다. 시간을 거슬러 간 듯한 아직 덜 문명화된 동화 같은 마을이다. 특히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이제껏 본 적 없는 파스텔 톤의 다채로운 색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들은 경탄을 자아낸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 오길 잘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콘도르 전망대(Mirador del Condor)를 오른다. 마른 흙과 모래, 자갈로 이루어진 등산로는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데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조심스럽게 발을 딛느라 진땀이 난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급경사 길이 고도를 쑥쑥 올리니 숨이 턱턱 막힌다. 열댓 번도 넘게 멈춰 쉬며 숨을 고르는 사이, 전문 트레커 포스를 풍기는 젊은 프랑스 커플이 인사를 건네며 성큼성큼 가뿐하게 잘도 올라간다.


1시간 40분 만에 콘도르 전망대에 도착했다. 올라온 수고를 말끔히 잊게 해주는 멋진 다! 신비로운 색깔을 뿜어내고 있는 코끼리 발 같은 산들과 그 품에 안겨있는 작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72색 크레파스에는 산 빛깔과 비슷한 색들이 있으려나? 가장 매료된 색은 회색과 녹색을 버무려놓은 듯한 색이다.


콘도르 전망대인데 콘도르가 보이지 않지만 산에 취해 아쉽지 않다.


올라오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프랑스 커플이 전망대 바위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더니 곧바로 일어선다. 올라왔던 길로 하산하겠거니 하는데, 반대 방향으로 난 산 허리 길로 향한다. 마을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지도에도 콘도르 전망대 등산로는 하나만 표시되어 있는데? 실처럼 가늘게 이어진 길로 그들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간다. 또 어디서 나타났는지 머리에 짐을 인 원주민 아주머니가 개 두 마리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산속 어딘가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아는 사람만 아는 트레킹 코스가 또 있을지 모른다!

     

궁금하다. 산허리를 휘감고 있는 저 작고 예쁜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산 능선을 따라 걸으며 이 아름다운 산을 좀 더 누리고 싶다. 저 길을 가보자고, 부부는 홀린 듯이 매우 신속하게 의견 일치를 보고 일어선다.    


멀리서 마냥 평화롭게만 보이던 산길은 실제 매우 좁고 위험했다. 길옆이 낭떠러지라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초긴장하며 바닥을 잘 보고 걸어야 했다. 그 와중에 문득 고개를 들면 사방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 같은 산들과 마주치게 된다. 탄성이 터져 나온다. 계곡물에 세수도 하며 산 모퉁이를 돌고 돈다.   

   

프랑스 커플이 되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가다가 그대로 마을로 내려갔을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도 그 길을 찾아 내려가기로 한다. 이곳 지리도 모르고 인터넷도 안 터지는데 낙관적인 마음만 장착하고 계속 걷는다.  

    

반가운 외딴집 한 채가 나타나 도움을 청하러 들어가니 안에 사람이 없다! 그리고 여기부터는 길이 여러 갈래 나 있다. 머리를 굴려 소똥인지 마똥인지 가축의 배설물이 있는 쪽으로 갔더니 곧바로 초원을 지나 절벽 끝 가장자리에서 길이 끝나버린다.     


이 길 저 길 따라 산모퉁이를 세 번쯤 더 돌고 나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걷고 있는 길이 길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간다. 길을 잃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3시다! 산은 빨리 어두워질 텐데 늦어도 6시 전에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불확실한 희망을 포기하고 아는 길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는데 너무 많이 와버렸다. 시간이 빠듯하다. 위기 상황을 인식한 몸과 마음이 팽팽하게 긴장한다.   

   

되돌아 출발한 지 몇 분 만에 둘 다 선인장 가시에 찔렸다. 운동화를 뚫고 들어 와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면서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무섭다. 어떻게 이렇게 아찔하고 위험한 길을 왔던가!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낭떠러지로 추락하지 않도록 조심하되 빨리 걸어야 한다. 그 어려운 걷기를 해내야 한다.


갈 때 흘렸던 남편의 스포츠 타월을 찾았다. 누군가가 눈에 잘 띄도록 활짝 펼쳐서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네 귀퉁이를 돌멩이로 눌러놓았다. 우리의 사소한 물건을 이렇듯 소중하게 대접해 준 착하고 고운 사람은 누굴까? 이 경황 중에 받은 감동이 눈물 나는 위로와 힘이 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옮겨가는 중에, 반대편에서 긴 통나무 두 개를 어깨에 둘러매고 오는 원주민 청년을 만났다. 내 한 몸 균형 잡고 가기도 힘든 고산 좁은 길에서 무겁고 긴 통나무를 양 어깨에 걸치고 가다니!     


드디어 콘도르 전망대가 보인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도 못 하고 불과 몇 시간 전에 평화롭게 앉아 경치를 감상하던 곳.


때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콘도르 서너 마리가 날아올라 주위를 빙빙 돈다. 비로소 안도감에 숨이 편안해진다.      


어둠이 밀려오기 전에 무사히 마을로 내려왔다. 콘도르 전망대 3시간 다녀오기 일정이 7시간 넘는 모험적인 트레킹으로 바뀐 날이다.    


인터넷 세상에서 유명 여행지에 대한 정보는 차고 넘친다. 몇 시간씩 글과 사진, 영상을 클릭하다 보면 이미 다녀온 것이나 다름없는 마음상태가 되거나, 기대감이 자동적으로 풀충전된다. 막상 가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상황에 내심 당황하지만 주위를 의식해 내색하지 않고 인증샷을 찍으며 ‘음, 여기가 거기군. 듣던 대로 괜찮네. 끝!’.


일정을 짜고 예산을 세우고 안전 여부를 파악하는데 유용하지만, 적절한 지점에서 검색을 멈춰야 한다. 미지의 영역을 남겨놓고 여행의 우연과 모험에 몸맡겨야 한다. 여행도 인간사처럼 기대와 실망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니 함부로 기대하지 말 일이다. 기대와 선입견에 지배당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면 만족과 감사가 솟아날지니.


이루샤는 인근 San Isidro까지의 트레킹 코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바쁜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일반적인 여행지가 아니다. 정보도 기대도 없이 갔다가 보물을 만난 기분이다. 예기치 못한 모험까지 더해져 이루샤는 이후 우리가 꼽는 남미 최고의 여행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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