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남미에서는 목 줄 안 한 개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물지 않는다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주변에 송아지만 한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머리 털이 쭈뼛 서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실제로, 간혹 개에 물리는 여행자도 있다지 않은가?
아르헨티나 엘칼라파테(El Calafate)에는 유난히 길거리 개가 더 많아 보였다.
숙소에서 시내까지 걸어갈 때 면,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룩이는 민박집 개가 앞장서고 이 집 저 집 어딘가에서 나온 개들이 서너 마리씩 따라왔다. 개들 눈에 내가 만만해 보이는지 주로 내 옆으로 온다.
한 번은 이제껏 본 개 중에 가장 덩치가 큰, 인상도 사나운 개 한 마리가 옆구리 쪽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그 개는 나와 친해지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그건 개 사정이고 내 사정은 다르다. 간혹 개의 입김이 느껴지고 주둥이가 손을 스칠 때마다 얼음이 되어버렸다. 1km 정도 걷는 동안, 개를 자극할까 봐 뛰지도 못하고 소리도 못 내고 경직되어, 로봇처럼 앞만 보고 걷던 그날의 공포를 잊을 수 없다.
다운타운이라고 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공원과 골목 곳곳, 도로 한복판에 더 많은 개들이 돌아다닌다. 과장 조금 보태서 엘칼라파테는 사람 반, 개 반이다. 아니, 개 세상, 개 판이다. 자동차가 지나가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차를 향해 사납게 짖어댄다. 그렇다 보니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은 개들도 많다. 당연히 길에는 개똥이 널려 있으므로 참사를 겪지 않으려면 바닥을 살피며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안데스 산맥에 들어앉은 마을, 아름다운 우스파샤타(Uspallata) 통나무 집에 머물던 밤이었다.
별 구경이 하고 싶어 마당으로 나오자, 곧 깜깜한 어둠 속 어딘 가에서 개들이 컹컹 짖으며 다가왔다.
별구경은 무슨, 하며 바로 안으로 들어오니, 큰 개 한 마리가 주방 싱크대 앞에 배를 깔고 누워있다. 잠깐 문 열고 나가 하늘 올려다보는 사이 어느 틈에 잽싸게 들어온 모양이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아무리 내보내려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아, 결국 한밤중에 호스트와 스텝들이 달려오는 소동이 빚어졌다.
개들아, 내 영역 좀 침범하지 말아 줄래?
아르헨티나의 북부 도시 틸카라(Tilcara) 식당에서는 개들이 식탁마다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걸했다.
어떤 녀석은 아예 식탁 밑에 드러누워 버린다. 식사 중인 남편의 무릎으로 고양이가 뛰어드는 일도 있었다.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주둥이로 엉덩이를 들이받아 몸이 앞으로 휘청한 날은 또 얼마나 놀라고 기가 막혔는지...
남미의 개 썰만 서너 시간 거뜬히 풀어낼 수 있겠구나!
개를 꺼려하는 손님에 대한 태도는 호스트마다 다르다.
대문을 열자마자 반갑다고 달려드는 개들을 보고 움찔하며 피하자, 엘칼라파테 민박집주인은 건조한 어투로 '안 물어요' 하며 내버려 두었다.
푸에르토이과수 민박집에서는 숙소를 드나드는 시간에 개가 마당에 돌아다니지 않도록 세심하게 마음 써 주었다.
멕시코시티 숙소에서는 체크인할 때 숙소 반려동물에 대한 생각을 묻고 조치를 취해주었다.
게스트가 숙소의 목줄 안 한 개를 참아내야 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게 아닌가?
서양인들은 모두 개와 친하게 지내는 줄 알았다.
우수아이아 선착장에서 비글해협 투어 유람선을 타려고 줄을 서 있을 때였다. 역시나 어디선가 개 두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뛰어다니더니 급기야 유람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 바로 앞에 서 있던 프랑스 여인이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나만 유난을 떠는가 싶기도 하고, 즐거워야 할 여행을 위해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날,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위로받았다. 개 스트레스로 구겨져 있던 마음이 살짝 펴졌다.
동물에 친화적일 것도 적대적일 것도 없고, 동물은 동물대로 살아가고 인간은 인간대로 살아가자는 것뿐인데...
남미 여행 중에 라마(Llama)와 알파카(Alpaca)가 참 좋았다.
그 순한 얼굴과 귀여운 눈망울을 바라볼 때면 입가에 미소를 장착한 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떤 경우 사람에게 침을 뱉기도 한다지만 겪어보지 않았으니 상상이 잘 안 간다.
라마와 알파카가 왜 좋을까?
경험 상 그들은 먹이로 유인하기 전에는 낯선 사람에게 다가오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제 구역에서 저희들끼리 몰려다니며 지낸다. 아무 때나 불쑥 경계를 뛰어넘어 내 영역을 침범해 오지 않고 다짜고짜 격하게 애정을 표현하거나 갈구하지도 않는다.
마음의 속도대로 내가 편하게 느끼는 거리만큼 다가가서 그 귀여운 얼굴을 보면 된다. 관계의 속도와 거리를 내가 컨트롤할 수 있으니 당황하고 놀랄 일이 없다.
남미의 개들아, 너희도 거리 좀 지켜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