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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인 Jan 12. 2024

4. 남미의 개들아, 거리 두기를 부탁해!

대도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남미에서는 목 줄 안 한 많은 개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물지 않는다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주위에 송아지만 한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머리 털이 쭈뼛 서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실제로 간혹 개에 물리는 여행자도 있다 하지 않은가?      


아르헨티나 엘칼라파테(El Calafate)는 유난히 길거리 개가 더 많아 보인다. 숙소에서 시내까지 걸어가는 길은 모험의 길이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룩이는 민박집 개가 앞장서는 날도 있고 이 집 저 집 어딘가에서 나온 개들이 서너 마리씩 따라오기도 한다. 개들 눈에 내가 만만해 보이는지 주로 내 옆으로 온다.

     

한 번은 이제껏 본 개 중에 가장 덩치가 큰 사나워 보이는 개 한 마리가 옆구리 쪽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그 개는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따라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개 사정이고 내 사정은 다르다. 간혹 개의 입김이 느껴지며 주둥이가 손을 스칠 때마다 얼음이 되어버린다. 1km 정도 따라오는 동안 개를 자극하게 될까 봐 뛰지도 못하고 소리도 못 내고 경직되어 로봇처럼 앞만 보고 걷던 그날의 공포를 잊지 못한다.     


다운타운이라고 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공원과 골목 곳곳, 도로 한복판에 더 많은 개들이 돌아다닌다. 과장 조금 보태서 엘칼라파테는 사람 반, 개 반이다. 아니, 개 세상, 개 판이다. 자동차가 지나가도 잘 피하지 않고 오히려 차를 향해 사납게 짖아대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은 개들도 많다. 당연히 길에는 개똥이 널려 있으므로 참사를 겪지 않으려면 바닥을 주의 깊게 살피며 조심조심 잘 피해서 걸어야 한다.      


안데스 산맥 속에 들어앉은 아름다운 마을 우스파샤타(Uspallata) 통나무 집에 머물던 밤, 별 구경하러 마당으로 나오자마자 깜깜한 어둠 속 어딘 가에서 개들이 컹컹 짖으며 다가온다. 별구경은 무슨, 하며 바로 안으로 들어오니, 큰 개 한 마리가 주방 싱크대 앞에 배를 깔고 누워있다. 나갈 때 잠깐 문 열고 하늘 올려다보며 한 눈 판 사이 잽싸게 들어온 것이다. 남편이 아무리 내보내려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아 결국 한밤중에 호스트와 스텝들이 달려오는 소동이 빚어졌다. 개들아, 내 영역 좀 침범하지 말아 줄래?


아르헨티나의 북부 도시 틸카라(Tilcara) 식당에서는 개들이 식탁마다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걸했다. 어떤 녀석은 아예 식탁 밑에 드러누워 버린다. 식사 중인 남편의 무릎으로 갑자기 고양이까지 뛰어들어 기절하는 줄 알았다. 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주둥이로 엉덩이를 들이받아 몸이 앞으로 휘청한 날은 또 얼마나 놀라고 기가 막혔는지... 남미의 개 썰만 서너 시간 거뜬히 풀어낼 수 있겠다.     


대문을 열자마자 반갑다고 달려드는 개들을 보고 움찔하며 피하자 엘칼라파테 민박집주인은 건조한 어투로 '안 물어요'라고 하며 내버려 두었다. 개를 꺼려하는 손님에 대한 태도는 호스트마다 다르다. 푸에르토이과수 민박집 사장님은 숙소를 나가고 들어올 때 개가 마당에 돌아다니지 않도록 세심하게 마음 써 주셨다. 멕시코시티 숙소에서는 체크인할 때 숙소 반려동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먼저 물어보고 조치를 취해주었다. 숙소에서 게스트가 목줄 안 한 개를 참아야 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게 아닌가?


나만 꺼리는 줄 알았다. 서양인들은 모두 개와 친하게 지내는 줄 알았다. 우수아이아 선착장에서 비글해협 투어 유람선을 타려고 줄 서 있는데 역시나 또 어디선가 개 두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뛰어다니다 급기야는 유람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 바로 앞에 서 있던 프랑스 여인이 사색이 되어 비명을 질렀다.

      

나만 유난을 떠는가 싶기도 하고, 명랑해야 할 우리 여행을 위해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날 그 프랑스 여인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위로받을 수 있었다. 개 스트레스로 구겨져 있던 마음도 다소 펴졌다.     


동물에 친화적일 것도 적대적일 것도 없고, 동물은 동물대로 살아가고 인간은 인간대로 살아가자는 것뿐인데...     


나는 남미의 동물, 라마(Llama)와 알파카(Alpaca)가 좋다. 그 순한 얼굴과 귀여운 눈망울을 바라볼 때면 입가에 미소를 장착한 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떤 경우 사람에게 침을 뱉기도 한다지만 겪어보지 않았으니 상상이 잘 안 간다.

     

왜 라마와 알파카가 좋을까? 경험 상 그들은 먹이로 유인하기 전엔 낯선 사람에게 다가오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제 구역에서 저희들끼리 몰려다니며 지낸다. 아무 때나 불쑥 경계를 뛰어넘어 내 영역을 침범해 오지 않고 다짜고짜 격하게 애정을 표현하거나 갈구하지도 않는다.


마음의 속도대로 내가 편하게 느끼는 거리만큼 다가가서 그 귀여운 얼굴을 보면 된다. 관계의 속도와 거리를 내가 컨트롤할 수 있으니 당황하고 놀랄 일이 없다.


남미의 개들아, 너희도 거리 좀 지켜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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