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북부의 작은 도시, 우마우아카(Humahuaca)는 14가지 다채로운 색깔을 띤 오르노칼(Hornocal) 산맥으로 유명한 곳이다.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몇 걸음 옮길라치면, 오르노칼(Hornocal) 투어 호객꾼들이 여행객들에게 몰려든다.
그중, 글로리아라는 중년 여인에게 투어 일정과 비용을 물어보고 예약을 진행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선 채, 들고 있던 메모장에 이름과 투어 출발시간을 적고는 쭉 찢어서 건네준다. 제대로 된 계약서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 종이 쪼가리는 계약금 영수증도, 뭣도 아닌 것이 너무 허술하지 않은가? 시간 맞춰 왔는데 예약이 안되었다고 시치미를 떼거나 투어비를 슬쩍 올리며 딴소리를 한다면?
남미에서는 예약한 투어가 일방적으로 취소, 지연되기도 하고, 갑자기 투어사와 연락이 두절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들어왔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정을 재차 확인하며, 합의된 투어 금액도 그 종이 쪼가리에 추가로 기입해 달라고 그녀에게 요구한다. 이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또렷한 영어 문장 하나가 들려왔다. "Gloria is honest!"
글로리아의 지인이거나 마을 주민이 지나가다, 정황을 알아채고 끼어든 것 같았다. 순간, 고개를 들다 글로리아의 눈과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속을 알 수 없는 반질반질한 호객꾼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세상 순박한 여인으로 보인다. 긍정적인 평판 쪽으로 귀가 얇은 편이라, 곧바로 글로리아에게 미안해진다. 그녀는 이 지역에서 통용되는 방식과 절차대로 투어객을 모집했을 뿐이리라.
4,350미터 전망대에서, 수채화인지 실제 산인지 분간이 안 가는, 14가지 색깔의 오르노칼을 보고 돌아오는 투어는 문제없이, 일정대로 잘 진행되었다.
우마우아카를 떠나는 날, 그날도 여행객들을 기다리며 터미널에 서 있는 글로리아를 발견하고, 서로의 행운을 기원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무례하게 함부로 드러냈던 의심을 부끄러워하며, 그녀의 모객 실적이 날마다 흐뭇하기를 바라며 버스에 올랐다.
페루 우루밤바(Urubamba)에 머물며, 근처에 있는 살리네라스(Salineras) 염전에 가보기로 한 날! 보통 마추픽추 가기 전, ‘성스러운 계곡' 투어를 통해 들르는 곳 중 하나인데, 우리는 투어를 신청하지 않고, 궁금한 살리네라스 염전만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우루밤바 터미널에서 마라스(Maras)행 콜렉티보를 타고 가다, 라말(Ramal)에서 내려, 염전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일정을 계획하고 터미널에 갔다. 마라스 가는 콜렉티보를 찾고 있는데, 어떤 기사가 다가오더니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제안하며 염전까지 가주겠다고 한다. 누굴 바보로 아나 싶을 정도로 기가 막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바로 화제를 돌린다. 노골적으로 사기를 치려다 실패했으니, 민망해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뜰 법도 한데, 그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다정하게 말을 걸며 웃는다. 어이가 없어 덩달아 웃는다. 참 난해한 순간이다.
갑자기, 신경이 곤두선다. 관광객인 우리에게, 이곳 대중교통인 콜렉티보 요금까지 속일 것만 같은 불신이 부풀어 오른다.
함께 기다리던 현지인 아주머니에게 먼저, 요금을 물어본 후에 콜렉티보에 올라탔다. 눈 뜨고 코 베일까 봐, 자잘한 바가지에 마음 상해 여행 기분이 망가질까 봐, 이제 현지인에게 먼저 확인해 보는 절차를 추가하기로 한다.
콜렉티보에 함께 탄 아주머니들이, 마라스에서 염전까지 가는 보행자용 길이 있다고, 걸어갈 것을 추천해 주신다.
수확 끝난 옥수수 밭은 다정하고, 산자락에서 풀을 뜯고 있는 산양들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당나귀에 짐을 싣고 느릿느릿 돌아오는 농부들을 만나며, 페루 안데스의 목가적인 풍경 사이로 타박타박 걷다 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발걸음이 날아갈 것만 같다.
아, 드디어, 우유니에서 시작되어 3주 내내 들러붙어 있던 지긋지긋한 고산증세가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이 아름다운 시골길은 순박한 페루 아주머니들이 준 귀한 선물이었다.
살리네라스 염전을 둘러본 후, 손님을 싣고 들어왔다 나가는 빈 택시를 이용해 라말까지 나가, 거기서 콜렉티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날이 저물어가니 택시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고, 쿠스코까지 간다는 승합차 한 대가 등장하여 태워주겠다고 한다.
큰 도로까지 나가는데 2인 40 솔을 부른다. 기다리는 동안 현지인들에게 주워들은 정보에 따르면, 콜택시를 부르고도 남는 금액이다. 2인 10 솔로 가자니까, 또, 곧바로 좋다고 한다.
아니, 여기 사람들은 정말, 일단 막 던져 보는 것일까? 걸려들면 횡재이고, 아님 말고, 식인가?
우루밤바 터미널에서 숙소까지 모터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이번에도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 잔돈이 없다면서 안주기도 하지만, 아무 말없이 그냥 안주는 경우도 다반사다. 굳이 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금액이라, 팁을 준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잊어버리려 애쓴다.
불가항력으로 당할 때 당하더라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남미 여행에서 사전 가격정보 조사와 흥정은 필수다. 흥정할 때는, 급히 외운 생존용 스페인어로 숫자를 듣고, 재빨리 계산하여, 말도 해야 하니, 난이도가 최상이다. 흥정은 성공할 때도 있고, 성공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되짚어보면 실패한 것일 때도 있다. 그 숫자가 스페인어로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날은 대형마트 계산대의 바코드 찍는 소리를 격하게 그리워하며, 코미디가 된 우리의 여행을 유쾌하게 긍정하며 한바탕 웃어 보는 날이다.
여행의 액션이 일어나는 모든 순간에, 절대로 당하지 않겠다고, 너무 오랜 시간 정보의 바다에서 헤매거나 경직된 의심의 갑옷을 입고 있으면, 숫자와 계산에 매몰된 각박하고 쪼잔해진 자신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단 한 번도 같을 리 없는, 매번 다른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신뢰와 의심 사이 그 어디쯤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사람의 언어와 몸짓, 주변 분위기, 정황, 다큐먼트, 누적된 경험, 직감 등을 토대로, 얼마만큼 믿고, 의심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언제든지 나의 믿음은 배신당할 수 있고, 의심이 미안해질 수도 있다.
매 상황마다 신뢰와 의심이 지혜롭게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여행자로서의 기본 값인 경계심과 의심을 우아하게 감추고, 여행지의 문화와 시스템, 거기 사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우리의 여행도 품위 있고 만족스럽게 진행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