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읽고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감이 오지 않았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이름만이
이 책을 집어 들게 한 거의 유일한 이유였다.
혹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비틀어 놓은 소설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이야기일까.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아무런 기대도, 예측도 없었다.
읽다 보니 이 책은 소설이 아니었다.
알랭 드 보통이 몇몇 철학자들을 불러와
그들의 생각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놓은
짧은 철학 에세이 모음에 가까웠다.
가볍게 읽히지만,
쉽게 넘길 수는 없는 종류의 책이었다.
첫 장은 소크라테스였다.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등장한 그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바로 그 소크라테스였다.
무지를 드러내게 만드는 질문,
끝까지 파고드는 대화법.
그런데 읽으면서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예고도 없이 다가와 질문을 던지고,
상대가 스스로 모순에 빠질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 태도.
진리를 위한 방식이었겠지만,
나는 그 집요함이 어느 순간부터
‘아집’처럼 느껴졌다.
왜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을까.
왜 주변과 함께 가는 선택지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밀어붙이면,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으며 속으로 물었다.
소크라테스여,
당신은 왜 ‘타협’이라는 단어를 끝내 부정했는가.
이 책을 읽으며
나는 한 명의 철학자를 잃었다.
바로 이어서 만난 인물 세네카였다.
폭군 네로의 스승,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인물.
그의 문장은 차분했고, 태도는 단단해 보였다.
세상은 이미 정해진 질서 안에 있고,
인간은 그 안에서 주어지는 좌절과
슬픔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
“삶의 단편들을 붙잡고 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데.”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위로받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다면 극복하려는 의지는 어디서 오는가.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철학이라면,
지금의 나에게 그것은 너무 쉽게
체념으로 기울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세네카에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의 철학은 단단했지만,
내가 기대하던 답은 아니었다.
나는 담담히 외쳐보았다
세네카여!
그것이 당신의 답변이라면
나는 당신을 거부하겠습니다.
마음이 어수선해진 채로 다음 장을 넘겼다.
몽테뉴.
‘부적절한 존재를 위하여’라는 제목은
솔직히 처음엔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그냥 몇 장만 넘겨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장을 덮지 못했다.
몽테뉴는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숨기지 않는다.
이성을 가졌다고
스스로를 우월하게 여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지식조차
얼마나 하찮았는지 알게 된다고 말한다.
'이성에 대한 잘못된 신뢰는 백치의 뿌리다'는
그의 문장이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관찰했다.
멀리 있는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주변과 일상에서부터 글을 썼다.
고위 관직까지 지낸 사람이 쓴
"수상록"이
이웃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몽테뉴는 말한다.
지식은 아는 척이 아니라고.
나에게 유익하지 않은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어려운 말로 자신을 감추지 말고,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인정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자고.
이 장을 읽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 이 사람은 다시 읽어야겠구나.
철학이 삶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삶 옆에 앉아 조용히 말을 거는 방식도
가능하다는 것을
몽테뉴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읽으며
나는 철학자를 숭배하는 법보다
철학자에게 동의하지 않을 자유를 배웠다.
그래서 이 책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작은 거리와 숨 고르기의 기쁨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