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귀인이란
누군가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고만 믿었다.
경험 많은 선배가 조언을 건네주고,
나를 아끼던 후배가 연결을 만들어주고,
뜻밖의 제안 하나가
나를 다시 세워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있을 때,
세상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귀인은 언제나 ‘사람’의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그리고
내가 기대하던 방식으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고.
어느 화요일 낮,
나는 아무 목적 없이 동네를 걸었다.
퇴직 전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시간이었다.
평일 대낮의 도시는
내가 알던 도시와 달랐다.
카페테라스에는
유모차를 밀며
커피를 마시는 젊은 엄마들이 있었고,
공원 벤치에는
햇볕을 쬐며
느린 호흡을 하는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문방구 앞에서는
초등학생 몇 명이 간식을 고르며
깔깔 웃고 있었다.
낮 두 시의 식당에는
점심시간이 지나간 자리처럼
빈 의자들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평일 낮의 세계’를
나는 처음 보고 있다는 사실을.
도시가 달라진 게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다른 속도로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내가 기다리던 귀인은
누군가의 손길이 아니라
그동안 단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던
이 풍경 자체였다는 것을.
다음 주,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뒤쪽 테이블에서
젊은 직장인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팀장님 또 야근하래…”
“하…
이번 분기 실적 발표 진짜 지옥이다.
너무 익숙한 말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서
그 말을 듣던 사람이었고,
누군가에게
그 부담을 주던 사람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처음엔
그저 배경음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한 문장이
정확히 가슴에 꽂혔다.
“바쁘다 바빠…
그래도 어쩌겠어. 살아야지.”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한참을 멈춰 있었다.
저 문장은
분명 과거의 ‘내 문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말이 속한 어떤 자리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그들은 여전히
‘움직이는 세상’에 속해 있고,
나는 아직
새로운 속도를 찾는 중이라는 것을.
그 순간
어디선가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는 순간마다 다른 사람이 된다.”
— 칼릴 지브란, 『예언자』
나는 회사 밖으로 나오며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뒤늦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류를 떼러 간 주민센터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성들이
조용히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중장년 일자리 프로그램’,
‘평생학습 강좌’,
‘지역 커뮤니티 안내문’이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마음이 놓였다.
귀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탁월한 누군가일 필요는 없었다.
내가 기다리던 ‘도와줄 사람’은
능력 있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살아가며
서로를 비추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날 이후
나는 도서관에 자주 가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곳은
가장 ‘고요한 생존자’들이 모인 공간이었다.
신문을 넘기는 노인의 손,
책을 들었다가
잠시 후 창밖을 바라보는 중년의 눈빛,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
그들 모두에게서는
공통된 기운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이겨내는 중이라는 느낌.
힘을 내어 나아가기보다
힘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표정.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오래 남았을까.
아마도
“누군가가 나처럼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다”는
그 조용한 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귀인은
거창한 조력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리듬으로 살아가는
낯선 사람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귀인은
나를 대신 끌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다시
걸음을 내딛게 만드는 힘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믿는다.
“도와줄 사람이 곁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조금 다른 결론에 닿았다.
평일 낮의 도시 풍경,
카페에서 스쳐간 한 문장,
주민센터의 조용한 복도,
도서관의 고요한 공기.
이런 평범한 장면들 속에서
나는 다시 살아갈
작은 용기들을 발견했다.
나를 일으킨 귀인은
결국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었고,
장면이었고,
그 장면 앞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내 마음이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누가 나를 도와줄까.”
대신 이렇게 묻는다.
“오늘 나는
어떤 장면에서
다시 힘을 얻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