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거울을 보면서
머리의 헝클어짐이나 옷의 구김 정도만 확인했다.
‘보여지는 나’를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멈추고 난 뒤 어느 날,
나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이마에 깊게 자리 잡은 주름,
왼쪽 어깨가 조금 내려간 자세,
굳어 있던 입꼬리.
마치 24년 동안
직장이라는 무대의 조명에 가려
보이지 않던 얼굴이
이제야 서서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잠시 멈춰 있으니 보였다.
‘일하는 나’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의 얼굴이.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편안했다.
퇴직 후 가장 먼저 느낀 변화는
조용함이 아니었다.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아침에 여는 베란다 창틀의 온도,
식탁 위에 떨어지는 오후 햇빛의 기울기,
지하주차장의 냉기,
집 거실을 걷는 내 발걸음의 무게.
예전에는 느낄 틈이 없던 것들이다.
아니, 느끼고 싶어도 느낄 수 없던 것들.
하루 종일 사람들의 목소리와 숫자,
보고서와 일정표 속에 묻혀 있던 감각들이
조용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의 나는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나는
오래된 물건 위에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 사람에 가까웠다.
이 변화는 슬프지도, 허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서야
내 시간을 살기 시작했구나.”
집에 혼자 있을 때
시곗바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틱.”
“틱.”
“틱.”
24년 동안 한 번도 귀 기울여본 적 없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시간을 조절하는 사람이었지
시간을 몸으로 느끼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회의 시간,
보고 마감,
실적 체크,
연간 KPI.
시간은 늘 업무를 담는 그릇이었고
나는 그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시간은
나를 재촉하지도 않고
나를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그저 흘러간다.
그 흐름을 들으며
처음으로 이런 감정을 느꼈다.
나는 이제야 ‘시간’이라는 것을 살아보기 시작했구나.
멈춤은 상실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감각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느끼는 능력,
멈출 수 있는 용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
조직의 리듬이 사라진 자리에
내 감각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감각이 돌아오자
또 다른 것이 함께 드러났다.
강하다고 믿었던 나의 얼굴 아래에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 하나가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감정을
아직은 정확히 이름 붙이지 못했다.
다만 알겠다.
멈춤은 감각을 되찾는 일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마음의 본모습이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