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상담을 시작한 이유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벼락같은 이별을 한 이들의 삶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벼락처럼 잃고 홀로 남거나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이별의 인사조차 남기지 못한 채 떠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둘 중 하나가 우리의 삶이다.
- 정혜신,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
항우울제를 늘리지 않고 한 달 경과 낮동안에 기분조절이나 충동성에 문제는 크지 않았는데, 악몽이 다시 시작됐다. 나는 어차피 나는 이제 약 없이는 잠을 잘 수 없고, 약은 단지 내가 잠을 조금 더 잘 수 있도록 해주는 부스터 역할일 뿐이다. 항우울제로 인해 잠에 영향이 바로 생기긴 했지만 이 정도는 조금 견뎌보면서 상담을 잘 받아보자고 마음을 다잡을 뿐이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감정과 체력이 너무 소진되다 보니 아침이면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았던 것 같다. 자살을 시도한 적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나를 벼랑 끝으로 내 몰아넣은 경험은 많다. 나는 빈곤과 학교폭력, 성폭력을 오랜 시간 겪어왔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이 세상에 살아있으면 안 되는 존재 같았다. 내가 국가폭력 현장의 활동가로 살아보고자 했던 것도 어쩌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보다는 내 무의식이 죽음을 향해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과한 해석일까.
2014년 4월 16일. 아침 일찍부터 세종시 환경부장관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다는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루 이틀 지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세상에 대한 가치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들을 매일 겪었다.
고통 속에 놓인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을 볼 때마다 무력감과 죄책감이 올라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시 종합터미널 화재가 발생했고, 그 길이 출근길이던 나는 어쩌다 최초 보도 기자가 되어버렸다. 소방대책본부가 꾸려지기 전이었다. 들것에 실려 나오는 까맣게 그을린 희생자가 내 발 앞에 놓인 순간, 그만 카메라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 무의식은 점점 더 삶 보다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산재 사고 사망자, 투쟁하다 돌아가신 분, 재난의 희생자들을 계속 마주하면서 어느 순간 나 자신이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사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기자를 그만두고 우울의 늪에서 헤매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 정말 죽을 만큼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 이후 죽음이 너무 두려워졌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은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애착을 갖게 한 존재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지난 몇 년 간 눈앞에서 목격했던 벼락같은 죽음으로 잃어버릴까 봐 나는 전전긍긍했다. 삶의 의지 앞에서 지난 상처가 불안으로 발현됐다.
정신과에서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고 진단을 내렸다. 나는 여전히 약을 먹고 있다. 약 없이는 잠을 자지 못한다. 남편이 서울에 가는 날이면 기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길을 걷다가도 갑작스러운 재난 장면이 훅 하고 눈앞에 펼쳐진다. 공황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진다. 혹시 모를 사고 때문에 여행을 가지 못하고, 밤길을 혼자 걷지 못하고, 운전을 하지 못한다. 매일 악몽을 꾼 지 7년이 넘어간다. 자꾸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라고 하는데. 나는 소중한 이들을 상실할까 봐 두려워서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누리지 못한다.
그래도 지금은 약의 도움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불안 조절도 가능해져서 다행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구는 여전하다. 정신과와 더불어 심리상담을 따로 시작한 이유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더 뿌리 깊은 곳에 신에 대한 원한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 정신병의 최후의 요새는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