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회복적정의협회 이재영 대표①] 촉법 연령 하향은 전과자 양산하는 일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 저자 이재영 한국회복적정의협회 이사장 인터뷰
1974년 캐나다 온타리오 지방의 한 도시 ‘엘마이라(Elmira)’. 어느 날 밤 10대 소년 2명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차된 마을 사람들의 자동차를 때려 부수고 빈집털이를 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스물 두 가정이 피해를 봤다. 경찰에 체포된 소년들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과정에서 당시 보호관찰관이었던 마크 얀치는 소년들의 처벌에 앞서 피해 이웃들을 직접 만나도록 판사에게 제안한다.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보호관찰관의 거듭된 요청에 판사는 이를 수락했다. 가해자들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자신들로 인해 어떤 피해가 발생했는지, 피해자의 심정은 어떤지 직접 들었다. 피해자들은 이 과정에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소년들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이 아닌 안심을 갖게 되고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이것이 ‘회복적 정의’의 태동이 된 ‘엘마이라 사건’ 이다.
우리 사회는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가 어떤 처벌을 얼마나 받았는지 온 국민이 알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 가해자에게 잘못된 행동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리는 것이, 피해자의 피해 회복과 잘 연결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과 사단법인 한국회복적정의협회를 설립한 이재영 원장은 2020년 11월 출간된 저서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피스빌딩)에 “가해자에게 생겨야 할 관점의 변화는 ‘잘못’에 대한 인식과 인정을 넘어, 그 잘못이 일으킨 ‘피해와 고통’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썼다.
지난 7월 27일 이재영 원장을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피스빌딩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가해자 처벌로 끝나는 정의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회복적 정의’에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회복적 정의의 의미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촉법소년 연령 하향 논란과 학교폭력 가해학생 즉시분리 조치 등의 문제점 등을 들었다.
예전부터 마음은 있는데 아무래도 현장 돌아다니는 체질이 있어서 정리할 시간이 잘 안났어요.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강의도 줄어들고 하다 보니 시간적인 여유도 생겼고, 또 안식년을 갖게 되면서 아내 캐런과 아이들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한국에 남아서 집중해서 썼어요.
해왔던 일들을 쓰는 거라 주요 내용은 한 세 달 정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내어준 아이들과 처에게 감사하며 마무리를 했죠. 물론 ‘진작 쓸 걸’ 하는 후회의 마음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뻔한 이론서가 되었을 것 같고, 오히려 지난 20여년 간의 실천 영역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쓰다보니 볼륨이 커졌어요. 처음엔 250페이저 정도가 좋겠다 했는데 450페이지가 넘게 나온거죠. 그래서 이 두꺼운 책을 과연 누가 읽을까, 이런 생각도 사실 했어요.
그런데 ‘회복적 정의라는 게 외국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 ‘회복적 정의를 종합적으로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됐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이 책으로 공부하는 모임도 여기저기 생겼더라고요. 그런 부분에서 뿌듯한 마음이 있고. 또 강의는 시간이 한정적인데 뭔가 이후에 참고자료로 보셔라,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으니까 편한 부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책 하나 썼다고 설치지 말라고 했죠. 자만하면 안된다고(웃음)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생각이죠. 그런데 그 말 안에는 피해자는 사실 없거든요. 우리에게 권선징악, 인과응보 등 이런 주제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접해 온 동화책의 이야기잖아요. 누군가 피해를 호소하면 신이나 임금 등 어떤 힘을 가진 사람이 잘못한 사람을 혼내줌으로써 정의를 이루는 방식.
그런데 시작점에는 피해자가 있긴 한데 그 이후의 과정에는 피해자는 사라지고 벌을 받는 가해자가 주인공이 되는 아이러니가 생겨요. 저도 회복적 정의를 처음 접하고 ‘내가 왜 그동안 이걸 생각 못했지’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저는 특히 조두순 사건이 대표적이라고 보는데. 우리 국민들 조두순 다 알거든요. 출소한다니까 지역에서 난리가 났었어요. 정부에서도 수십억을 들여서 CCTV와 방범초소를 만들고 법석을 부렸어요. 그런데 막상 피해자 가족은 여기서 더 살 수가 없다 해서 이사를 가려는 데 돈이 없는 거죠. 그래서 그 피해학생의 주치의가 모금운동을 했어요. 시민들이 돈을 모아서 이사를 간거죠.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세금을 누구를 위해 써야하냐고 물으면 피해자를 도와야 한다고 쉽게 이야기하겠지만 피해자는 사실상 예산이 흘러가는 대상이 아닌 거에요. 조두순 같은 가해자를 위해 수십 억 쓰는 것 가지고 우리는 질문하지 않죠. 결국 우리의 관심은 가해측에 다 몰려있는 거에요. 그들이 무슨 처벌을 받았는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더 형량을 늘려라 이런 얘기는 많이 하지만 피해자의 필요에 대해서는 사실 전혀 관심이 안 생기는 현실이죠.
회복적 정의가 가장 큰 질문을 던진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피해 회복에 목표를 두고 가해자의 책임도 그와 연관을 시켜야 되지 않나. 그렇지 않으면 이 정의는 반밖에 이룬 것이 아니다. 일종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거죠. 저는 지금까지 응보적 정의가 필요했고 또 순기능이 당연히 있다고 보는데, 반면에 왜곡시켜 놓은 수많은 영역이 있거든요. 이걸 채우려면 회복적 정의 관점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줘야 한다, 이런 생각이죠.
응보적 정의가 인류 사회에서 발전하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처벌권’이 권력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사회든 권력기관 개혁이라는 게 참 어렵잖아요. 오늘도 뉴스에서 법무부의 경찰권 견제 및 통제에 대한 이야기가 논란이 되고 있던데. 엄벌주의는 어느 통치자에게나 매우 유용하고 중요한 통치 철학이이에요. 역사적으로.
그런데 회복적 정의는 정의의 기준을 당사자 간의 대화, 심지어는 피해자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큰 틀에서 엄벌주의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처벌기관이 아닌 피해자에게 권한을 줘버리니까.
만약에 피해자가 용서하고 싶다고 하면, 그게 자신의 필요라고 한다면. 이 정도 잘못이면 이 정도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응보적 정의의 질서가 사실상 다 무너져버리거든요. 사람들이 엄벌주의를 좋아하는 이유는 엄벌을 하면 뭔가 확실한 조치가 나오는 것만 같고, 그건 공평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응당한 처벌이 계량화 되어있잖아요. 안전을 느끼는 거죠. 기준이 모호한 것은 안정감을 절대 줄 수 없죠. 그리고 처벌권이 약화되는 순간 기득권도 힘을 잃는거에요.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스트롱 리더십이 지금까지 환영을 받는 거죠.
사실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을 아주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이건 굉장히 혁명적인 거에요. 체제 자체가 바뀌어야 되는 거라서. 회복적 정의 운동은 마이너리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있어요. 많은 마이너리티 운동 중에 대중적 설득력이 있는 정도지 이 자체로 회복적 정의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보기에는 간극이 너무 크죠. 다만 이 회복적 패러다임이 기여를 할 수 있는 영역은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입니다.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 청소년들을 ‘촉법소년’이라고 부른다. 촉법소년은 범죄를 저지르면 형사 처벌 대신 보호관찰을 받거나 최대 2년까지 소년원에 수감되는 보호처분을 받는다.
2018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국회에 발의 된 형법과 소년법 일부개정안은 유엔 아동권리협약 등에서 강조하는 ‘소년의 사회 복귀와 회복관점에 반하고 소년 범죄 예방을 위한 실효적 대안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국회의장과 법무부 장관에게 표명한 바 있다. 즉 미숙한 처벌을 강화하기보다 보호와 교육방안, 예방이 우선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6월 9일 ‘촉법소년연령하향’을 공식화 하며 “소년범죄 흉포화에 대응하기 위해 촉법소년 연령기준 현실화 과제를 속도감 있게 추진해 달라”고 지시했다. 법무부는 이후 TF를 구성해 촉법소년 기준 연령을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촉법소년은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 처벌을 받지 않아 이를 악용한 소년 범죄를 이유로 촉법소년연령하향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잔혹해져가는 10대들의 폭력행위에 촉법소년연령하향으로 대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관련 전문가들은 촉법소년연령하향이 실제로 소년범죄율을 얼마나 낮출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법개정을 차치하더라도 일상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잇는 이야기를 먼저 해볼게요. 만약에 내가 학부모 또는 교사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 학교에 초등학교 6학년인데 형사 처벌 경험이 있는 친구가 전학을 온다고 상상해봅시다. 환영할까요? 제일 큰 반응이 뭘까요? ‘내 아이가 피해 받지는 않을까’, ‘그런 애가 여기 와있으면 안되지’ 뭐 이런 것들이겠죠.
실제로 학교는 대책 회의 열고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겠죠. 어느 국민도 이 상황이 본인의 상황이 된다면 당연히 ‘그런 애들 학교 돌아다니면 안되지’ 이렇게 생각하겠죠. 근데 국민의 80프로 이상이 촉법 사범 연령 하향에 대해서 지지를 하고 있거든요. 더 많은 아이들을 더 낮은 나이에 형사 처벌을 받게 하자는 거에요. 막상 그런 전과를 가진 아이들이 마을과 학교에 나타나면 다 싫어하는데도요. 실제로 촉법소년 연령이 하향되면 이런 친구들이 사실상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국민 대다수가 지지를 하고 있죠. 사실 우리는 모순에 빠지는 거에요.
처벌의 목적은 벌을 받음으로써 반성하고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죠. 즉 ‘변화’가 목적인 겁니다. 변화! 그런데 지금은 처벌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처벌을 받으면 마치 모든 책임을 진 것처럼 생각한다는 거에요.
실제 사법처벌을 받는 대다수의 친구들이 벌 받았으니까 책임 다 졌다고 생각해요. 피해자는 여전히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데. 전혀 회복이 되지 않았는데. 그건 자기랑 상관이 없는 거죠. 벌 받았으니까. 처벌 자체가 마치 책임이라고 배우는 왜곡된 세대가 늘어나는 거에요.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이 ‘우린 아직 나이 어려서 처벌 안 받는데’라는 문자를 보냈고 그것이 공개되면서 국민들은 공분했잖아요. 그런데 그런 아이들을 만든 건 우리 어른들이에요. 처벌은 책임의 전부가 아니고 수단이죠. 처벌을 통해 긍정적 변화와 개선을 시키자는 것이 소년법의 취지이고요.
이렇게 얘기하면 회복적 정의는 처벌을 반대하는 거냐 자꾸 물어요. 사실 우리가 반대하는 건 처벌자체가 아니라 처벌이 피해 회복과 무관하게 이뤄지는 것을 반대하는 거예요. 가해자는 처벌을 받았다고 하는데 피해회복이 전혀 안됐으면 처벌은 그냥 고통의 부과 외에는 의미가 없어요. 고통을 부과 당한 사람은 자기는 또 피해자라는 입장이에요. 자신도 억울하다고. ‘다른 친구들은 안걸려서 벌 안 받았는데 나만 받았다’던가, ‘이렇게 까지 벌 받을 일은 아닌데’ 라던가.
이렇게 가다가는 다음 대선 때 형사처벌 받지 않는 11세 아이들이 처벌 안받는다고 문자를 나누면 또 10세로 내리고 계속 이렇게 할 건가요?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이 문제에 대해서 언론의 책임도 굉장히 크다고 봐요. 촉법소년은 사실 지금도 처벌 받아요. 보호 처분 받는다고요. 보호처분도 절대 약하지 않아요. 소년원에도 가고 하잖아요. 그런데 언론에서는 나이가 어려서 처벌 안받는다라고 하니 일반 국민들이 모두 공분하는 것이죠. 이 친구들이 어른과 같은 형사처벌을 안받는다는 얘기지, 그 나이에 맞는 처벌을 지금 주고 있거든요.
저는 이 시기에 연령 하향문제를 논의한다면 뉴질랜드의 모델을 참고해서 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거기서는 누군가 잘못을 하면 자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를 가족 친지들과 같이 만나야 해요. ‘가족자율협의회'(Family group conferencing, FGC)라고 하는데 자신의 행동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족과 같이 듣고 책임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함께 해결해가는 방식이죠. 이런 걸 도입해도 시원찮은 판에 형사처벌 더 일찍 받도록 하겠다?
얼마 전 한 소년원 원장님이랑 다른 일 때문에 전화했다가 제가 “원장님 이제 고객이 많아지겠어요” 그랬더니 “죽겠습니다” 이러시더라고요. 그분들은 알거든요. 그 환경에 나이 어린 아이들이 오면 형들 사이에서 어떤 좋은 영향을 받겠어요? 상식적으로. 근데 국민들은 무조건 애들이 처벌이 없으면 잘못한다 생각하고, 이걸 실행하겠다고 하는 정치인들이 박수를 받고. 우리나라 유엔아동권리 협약에 조인된 국가거든요. 국제적 망신이에요.
저는 농경 중심 사회 말고는 다 비슷하다고 봐요. 앞서나간 국가들도 산업화 현대화 다 겪으면서 공동체가 붕괴되고 이런 건 사실 마찬가지거든요. 저는 직계가족이 아니더라도 그 친구를 둘러싼 교사, 종교 기관, 멘토 등 참여 범위나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우리가 사회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봐요.
문제는 말씀하신대로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거에요. 결국은 응보적 패러다임이 고착되었단 얘기거든요. 사실 우리가 해야 될 운동은 응보적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정의 패러다임을 다양화 시킬 필요가 있다고 봐요. 응보적 정의라는 렌즈 하나였는데 다른 렌즈를 가질 수 있어야 되는 거죠.
이전에 가정법원에서 화해권고제도 생길 때 제가 참가 범위를 직계가족이 아니라 뉴질랜드 모델처럼 넓게 잡아보자 했었는데 그게 2010년이에요. 그 때 법원 관계자들이 하는 말이 뭐냐면, 우리나라는 체면문화 때문에 형제들끼리도 자기 자식 재판받고 있다고 얘기 안하는데 긁어 부스럼 해봐야 부작용만 생긴다, 아마 참여 안할거다 이러는 거에요.
그럼 전 다시 얘기해요. 그러니까 더 해야 된다고. 그렇게 창피한 걸 아니까 자기도 책임의 범위에 들어가줘야 되는 거지. 이게 책에서 말했던 존브레트웨이트의 공동체 재통합을 위한 수치심의 활용의 핵심이거든요. 우리 문화만 체면 문화인가요? 다른 나라도 똑같아요. 거긴 체면 문화가 없어서 이런 접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문제는 이런 제도는 운영하는 입장에서 일이 늘어나죠. 더 많은 사람에게 연락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 않겠죠. 아 이거는 하루아침에 안되는 것이라(웃음)
맞습니다. 분명한 건 정의 패러다임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좀 어릴 때부터 배웠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처음에 학교에서 저희 프로그램을 요청했을 때 저도 사법 시스템이 변하는 게 우선이 아닌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는. 그런데 막상 학교 현장에 가보니까 단순히 아이들간의 문제를 푸는 기능이 필요한 게 아닌 거에요.
더 많은 교사들이 이 회복적 패러다임을 접하면 일상에서 학생들에게 설명할 기회들이 생기잖아요. 때린 학생만 처벌 받으면 맞은 학생이 과연 좋아지나? 이런 고민을 아이들과 함께 하는거죠. 그러면서 이 피해를 입은 학생에게 어떤 필요가 있는지 물어보면서 다른 아이들과도 함께 피해회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거죠. 저는 이런 교사들이 늘어야 다음 세대가 응보적 정의도 있지만 회복적 정의도 있구나 알게 된다고 봅니다. 물론 시간은 한참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더 다양한 정의 개념을 배우게 되겠지요.
그러다 보면 응보적 정의로 쏠려있던 사회가 ‘아 회복적 정의도 필요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중간 지점까지는 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완전한 회복적 정의로 가야 한다는 거는 진짜 꿈 같은 얘기고요.
과연…제 생애 안에 본다면 완전 대성공이죠.(웃음)
이 운동자체가 74년 엘마이라 사건으로 시작됐고, 90년에 하워드 제어 교수님이 첫 이론서를 출판했잖아요. 그 책이 반향을 일으킨지 이제 32년밖에 안됐거든요. 이 분이 이제 70대 중반으로 현장을 떠나셨는데. 수천 년간 있었던 응보적 패러다임이 이 32년의 운동하고는 비교가 안되겠죠. 제 생애가 아니라, 그 다음 생애 아니 또 그 다음 생애 정도? 지금은 그저 이 운동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두가지 측면의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아주 현실적 문제에요. 누군가 학폭 신고를 했어요. 그럼 신고당한 사람은 일단 최장 3일 동안 교실에서 나가야 돼요. 이 학생은 소명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요. 그러면 억울함을 느낀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이 나가야 되니까. 일단 나간 학생은 개인적 불만, 친구들한테는 낙인, 부모는 분노. 선생님은 또 나간 학생을 돌봐야 돼요. 집에 보내면 교육권을 박탈한 것이기 때문에. 그럼 선생님은 또 일이 늘어나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인거에요.
그렇다고 이 나간 친구가 개선이 되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는 보호가 될까요? 3일이 무슨 3년도 아니고 이게 무슨 보호입니까. 다시 교실로 올건데. 그리고 즉시 분리가 필요할 만큼의 사건이면 이미 보호조치로 갔겠죠. 근데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충분히 교사 재량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의 사안들까지 이렇게 되고 있는 거거든요. 또 나가있던 학생은 3일 동안 이를 갈다 돌아온단 말이에요. 나갔다 돌아오면 자기를 신고했던 학생을 보복 신고 하는거죠. “선생님 쟤 학폭신고 할래요. 쟤가 저 째려봤어요” 그러면 가해 의심 학생은 또 나가야 돼요.
한번은 3대 1 사건이었는데 가해 지목으로 세 명이 나간 거에요. 그리고 그 셋은 따로 있어야 된대요. 몇 배로 선생님들은 고생하겠죠. 문제는 이 3명이 돌아가면서 보복 신고를 하니까, 결국 처음 피해 호소한 친구는 9일 동안 나가있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에요. 서로를 더 분노케 하는 거죠. 학부모들도 서로 이를 갈게 만들고.
학교라는 곳은 싸우기 전에도 같이 있고, 싸워도 같이 있고, 싸운 후에도 같이 있는 공간이잖아요. 학교의 특성이라는 걸 놓고 법이 나와야 되는데. 이렇게 툭 던져놨다가 지금 학교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교육현장을 붕괴시키는 법이죠.
두 번째는 피해 회복과 전혀 연관이 없다는 거에요. 일단 분리조치된 학생은 학생대로 열받거든요. 피해자 회복을 생각할 여지가 있겠어요? 자기가 피해자가 되었는데. ‘나가’ 하는 순간 자신도 피해자가 되는 것이죠.
피해자가 회복 되고 보호를 받으려면 가해 학생이 사과를 하거나 잘못한 행위였다는 걸 인정하고, 앞으로 저 친구를 위협하지 않겠다거나, 단톡방에서 괴롭히지 않겠다거나, 빵셔틀을 시키지 않겠다 등 구체적인 약속을 정하고 이 걸 지킬 수 있도록 공동체의 압력을 행사하는 게 맞는데. 분리 자체가 마치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거죠. 그것도 영원히 분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죠.
최근에 접한 사건은 6학년 학생 둘이 서로 욕한 일이 있었는데 둘은 서로 사과하길 원했어요. 그런데 부모들이 말로 사과해서는 안된다고, 학폭심위를 열도록 교육청으로 넘기라고 했다는 거에요. 변호사 써서 본 때를 보여주겠다고.
백 번 양보해서 부모입장에서는 자기 아이가 너무 소중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보자고요. 그런데 이 일로 엄마 손 잡고 학폭심위에 참석하러 지역 교육청에 가는 이 학생은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이 학생은 자기는 전에 피해를 봤어도 신고 안했는데 신고 당했다고 억울하게 생각할거에요. 화도 나고. 그런데 징계는 또 받아야 되고. 다시 돌아 오면서 분노만 커지겠죠. 그 보호자인 엄마도 상대 부모에 대한 분노가 생기고. 그러니까 “너 앞으로 쟤 잘 보다가 누구한테 욕하는 거 보면 얘기해. 신고하게” 이렇게 돼버리거든요.
변호사들은 이런 케이스가 늘어나면 이득이 되니까 좋겠죠. 실제로 법률사무소에서 접수받는 소송 사건 중 초등 저학년 사건이 늘었다고 해요. 이건 부모싸움이거든요. 사법사건이 되면 선생님들은 중간에서 손을 쓸 수 없어요.
교사가 학생들 싸움을 말리고 화해를 시키면 처벌을 받는 나라는 전세계에 우리밖에 없어요. ‘분리대응 안했다’, ‘화해를 종용했다’ 해서 징계 대상이 되거든요. 학교 갈등의 사법화 문제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어요. 신고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맹신이 만들어 놓은 우리사회의 단상이죠. 빨리 바뀌어야 돼요 정말. 심각합니다.
형사사법체계가 확립된 근간에는 역사적으로 ‘왕권 강화’라는 대목적이 있어요.
옛날에는 ‘커뮤니티 저스티스’라고 해서 마을마다 문제를 해결하는 자정능력이 다 있었거든요. 농경사회기 때문에 서로 힘을 합쳐 수로를 만들어야 하고, 마을의 기반을 함께 다져나가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어떤 잘못을 한다고 해서 이 사람을 쫓아내면 마을 유지가 안되는 거에요. 때문에 자체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치리하는 능력이 계속 이어지는 거죠.
그런데 유럽 정치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앙의 왕이 있지만 지방 영주가 군사력을 따로 갖고 있으니까 불안한거에요. 많은 고민을 했겠죠. 생각해낸 것이 사법권을 국가가 독점해야 한다는 거에요.
저 멀리 지방에서 벌어진 범죄도 왕의 통치권 안에서 벌어진 것이니 중앙에 와서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하는 시스템을 만든 거죠. 즉 공동체 사법에서 국가사법 시스템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문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법권, 처벌권이라는 게 체계화되기 시작하면서 ‘피해자’가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왜냐면 형사사법에서 피해자는 국가에요. 짐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 남는건 가해자와 국가일 뿐이에요.
이 체계이기 때문에 지금 이 말도 안되는 분리 조치 이런 것들도 이 패러다임에서는 맞는거에요. 학교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다 중앙으로 넘기라는 거잖아요. 때문에 교사는 신고 안하면 징계받고. 신고하는 순간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데도.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소송이 늘어나면 모두가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테니. 검사를 왜 이렇게 중용하느냐는 질문에 그게 법치국가라고 답한 대통령이 있는 나라이니… (②에서 계속)
※ 건강매거진 데이드 (2022년 7월)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