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유영철 막으려면 어릴 때부터 자발적책임 배워야

[한국회복적정의협회 이재영 대표②] 피해 회복을 위한 자발적 책임

by 문슬아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 저자 이재영 한국회복적정의협회 이사장 인터뷰 ②


고작 3분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재판 받으러 와서 처분까지 걸린 시간이.
아이들이 뭘 배웠을 거 같습니까?

그 아이들이 처음 법정에 섰을 때 너희들이 장난으로 던진 벽돌 하나가 한 가정을 어떻게 파탄시켰고 그 삶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알려줬어야 했어요. 가정도 학교도 아무도 혼내지 않고 깨닫게 해주지 않으니까 법원이라도 그 아이들을 붙잡고 혼내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 中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심판>은 대한민국 사회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소년 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소년 범죄를 혐오하는 심은석 판사(김혜수 분)가 차태주 판사(김무열 분)와 소년들을 재판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파격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소년 범죄가 가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실패의 결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0002580158_002_20220223020301932.jpg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소년심판>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제공



국내 최초로 8년 연속 소년 재판을 담당했던 천종호 판사는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라이프와의 인터뷰에서 “소년범은 악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길러진 악”이라고 말하며 소년범에 대한 교화 가능성은 무시한 채 이른 나이에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면 오히려 사회성을 잃고 더 나쁜 범죄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혜진 기자, <“안 돼 돌아가” 천종호 판사가 말하는 ‘소년심판’>, 브라보마이라이프, 2022.04.07)


위기의 아이들, 우리 사회가 어떻게 품을 것인가에 대한 좀 더 폭넓은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이재영 원장은 책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에서 “비행과 범죄행위가 시작되는 초기에 어떤 형태의 정의를 경험하게 할 것인가를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고 썼다.


회복적 정의는 범죄의 처벌에 초점을 두는 응보적 정의의 원리와 달리, 잘못이 양산한 근본적인 피해에 더 초점을 맞춘다. 회복적 정의에서 범죄란 단지 법의 침해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침해한 행위다. 때문에 잘못이나 범죄로 망가진 관계를 최대한 회복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그렇다고 회복적 정의가 처벌을 반대하거나, 회복적 정의 운동이 응보적 정의를 대체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재영 원장은 정의에 다다르기 위해 좀 더 다양한 패러다임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정의의 여신의 저울에 피해자는 없다


책에서 학교 폭력을 저지른 가해 학생 측이 반성이나 책임을 위한 노력보다 자신에게 내려진 처벌과 불이익을 무효화하기 위한 노력을 더 많이 하게 된 현실에 대해 지적하신 부분에 공감이 되었는데요.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요?


‘꼼짝 말고 주는 벌 받아’ 라고 하는 순간 가해자는 수동적인 존재가 돼버려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소명 할 기회가 전혀 없죠. 이 상황에서 가해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기가 일으킨 범죄에 대한 형량을 줄이려는 본능적인 노력이에요.


그동안 만나왔던 가해 학생들 중에 ‘네가 한 일에 대해서 왜 거짓으로 진술했느냐’ 물으면 부모나 변호사가 시켰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래야 벌을 덜 받는다고 배웠거든요. 그러다 보니 일단은 안 했다고 무조건 버티는 게 잘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재판에서 형이 결정되었을 때도 그대로 받을 것인지, 아니면 상고 해서 더 버틸 것인지 이런 고민만 하게 되는 거예요. 자신이 저지른 행동으로 인해 피해자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어요.


가해자가 피해를 회복하는 일에 ‘자발적 책임’을 가질 수 있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인식 개선 및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할까요?


가장 먼저는 잘못을 한 사람이 개선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되고요. 가해자는 자신이 벌인 행동 때문에 생긴 피해와 영향이 무엇인지 직면하는 시간이 있어야 됩니다. 그걸 알아야 그 피해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에 대한 책임이 생겨요. 가해자 스스로 고민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줘야죠. 지금은 가해 행위 자체 그리고 강제적 처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스템에서 피해자는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예요.


사실 저도 크면서 자발적 책임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옛날에 친구랑 싸웠다가 친구가 먼저 선생님께 일러서 화장실 청소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청소하면서 억울한 거예요. 나랑 똑같이 싸웠는데, 저만 청소를 하니까요. 그 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냐면 ‘다음번엔 내가 빨리 가서 일러야겠다.’(웃음)


그런데 제가 진짜 반성하는 마음으로 깨끗하게 청소했다고 해도, 화장실이 깨끗해지는 거하고 싸운 친구랑 관계가 회복되는 것 하고는 사실 관계가 없어요.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졌는데, 그 책임이 피해자의 피해 회복과 연결되지 않는 이런 상황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배워왔어요.


justice-g1b4fa1d09_1920-1.jpg 정의의 여신상. 사진=픽사베이
아이러니하게도 가해자를 응징하며 정의를 이뤘다고 하는 보복 논리가 저울의 다른 한 추에 놓인 피해자를 오히려 소외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왔다 ···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이 균형을 잡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 저울에 피해자의 자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 52~53쪽


그러다보니 잘못을 해도 걸리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고, 걸렸다 해도 일단 오리발을 내미는 거죠. ‘봤어요?’ ‘증거 있어요?’ 요즘 이런 말을 하는 청소년들이 정말 많다고 해요. 어른들도 마찬가지죠.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해자 만들기에는 열을 내지만 그 행동으로 인해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입었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다 보니까 가해자는 벌을 받을수록 괴물이 되어가고.


청소년 문제를 다루다 보면 피해 학생은 열 대 맞았다고 하는데 가해 학생은 “진짜 저 두 대밖에 안 때렸다니까요” 이러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주된 공방이 ‘얼마나 때렸는가’가 돼요. 이게 응보적 정의에서는 중요한 이유가 몇 대를 때렸는지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릴 수가 있거든요. 행위 자체에 불법성이 얼마인지를 따져야 하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매우 중요하죠. 그러다보니 공방과 싸움이 끝없이 벌어져요. 가해측에서 부인하는 일을 저도 많이 봐왔고요.


하지만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는 질문 자체가 달라요. 몇 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피해 학생이 가해 학생에게 맞았을 때 무엇이 제일 힘들었는지, 그 일 이후로 생긴 어려운 변화는 무엇인지 이게 더 중요하거든요. 어떤 피해가 발생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앞으로의 해결책, 가해자와 공동체의 구체적인 책임을 찾을 수 있거든요.


한 예로 피해 학생이 가해 학생 무리에게 돈을 지속적으로 빼앗기는 상황이었어요. 가해 학생들의 주장은 원래 이렇게 돈을 서로 모아서 간식도 사먹고 그랬대요. 뺏을 게 아니고 빌린 거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저는 이 학생들이 돈을 빌린 건지 빼앗은 건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피해 학생이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겪었던 어려움이 무엇이었는지 들어보자고 했어요. 피해 학생은 돈이 없으니까 엄마, 할머니께 거짓말 할 수밖에 없었고, 지갑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고. 이 친구 입장에서는 억지로라도 가져다 줘야 친구들 사이에 낄 수 있으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물으니 가해 학생들이 ‘친구가 힘들었을 것 같다’고 얘기를 했어요. 제가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물었죠. 여기서 구체적인 약속, 책임이 발생하거든요. 앞으로 돈 가져오라고 하지 않겠다, 그동안 받은 돈은 돌려주겠다. 이렇게요.


이처럼 피해를 회복하는 일에 ‘책임’이 들어가야 됩니다. 사실 이 부분은 현장에서 있었던 사례들을 모으고 해석하면서 이론으로 발전한 거거든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무책임하고 반성을 하지 않던 아이들이, 이렇게 회복적 관점의 경험을 제공했을 때 책임을 지는 아이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정의라고 생각해왔는가 역으로 질문하게 된 거죠.


회복적 정의 일찍 만났다면, 유영철 사건 없었을 것


형사사건 피해자-가해자 대화 모임을 이끈 경험담이 인상 깊었습니다. 지난한 과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유영철 살인사건 피해자인 고 선생님과 다른 살인 범죄로 복역 중인 사람들이 만나는 대화모임이었어요. 사실 고 선생님 입장에서는 그 날의 고통이 다시 살아나는 굉장히 힘든 시간이기 때문에 부담이 클 수밖에 없거든요. 진짜 어려운 과정이죠. 그래도 고 선생님은 유영철 사형을 반대하는 탄원서도 내신 분이고 어느 정도 이 만남에 대한 마음의 정리가 되신 분이었죠.


살인 피해 유가족하고 살인으로 복역 중인 사람들이 만날 때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벽이에요. 가해측도 마찬가지더라고요. 피해 유가족을 만났을 때 자신들이 겪게 될 죄책감과 개인적 트라우마가 엄청 클테니까요. 실제로 교도소 내에서는 구체적인 범죄를 지칭하는 단어를 잘 언급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냥 여러분 다 그런 일들 하셨지만” 이런 식으로 돌려서 표현하는 거죠.


교정 영역에 들어간 범죄자들은 그 곳에서 자신을 ‘중립화’시키는 게 적응을 잘 하는 것으로 여겨져요.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지내는 거죠. 그런데 피해자를 만나는 순간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나름대로 죗값을 치러왔다고 생각했던 가치관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당신이 그동안 져 온 책임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게 우리의 메시지거든요. 그건 강제적으로 부과 받은 것이었고 피해자의 회복과는 무관한 일이니까요. 복역 중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멘붕’이 오는 거죠.


살인사건 이후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인생은 서로 전혀 알 수 없는 길을 가게 돼요. 가해자는 잊을 수 없는 현장 감식, 여러 번의 재판 등을 다 겪고 교도소까지 오거든요. 또 거기서 적응하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려요. 이런 과정을 다 겪고 이제는 어느 정도 수감 생활의 안정기에 접어든 사람들인 거죠. 반대로 강력 범죄 피해자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삶을 또 살아가고 있어요. 피해자와 가해자는 서로가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여기 대화모임으로 처음 만나는 거거든요.


DSC_0537-1-scaled.jpg ⓒ 고유



저희가 대화모임을 5일 동안 진행하기로 했는데, 중간에 복역 중인 분들이 이 프로그램 더 이상 못하겠다고 거부했어요. 아니 약속을 했는데, 왜 그러시냐 물었더니 가만히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한사람이 “아시잖아요” 이러더라고요. 고 선생님을 만난 이후에 이 사람들이 잠을 못자고 며칠 밤을 샜다는 거예요.


설득하는 과정이 정말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행을 했어요. 제가 끝나는 날 그 분들에게 이 대화모임을 하고 나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무엇이 좋았는지 물어봤어요. 한 사람이 말하길 이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자신은 책임이라는 걸 모르고 죽었을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물론 이제 와서 피해자를 찾아간다고 어떻게 할 수는 없고, 또 연락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 자체가 피해자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되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할 수 없지만 고 선생님 덕분에 자신이 책임을 배웠다고 하는 거죠. 왜 더 이상 이런 짓을 하면 안 되는지. 그저 다시 교도소 들어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거에요.


저는 이러한 경험, 메시지가 작은 사고를 쳤을 어린 시기부터 강력하게 들어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벌을 받았던 아이들이 계속 벌을 더 받고 있거든요. 전과를 쌓고 있어요.


교도소에서 진행된 프로그램 이후 저희 워크숍에 함께 하셨던 고 선생님께서하신 말씀이 뭐나면, 회복적 정의 배우는 선생님들이 늘어나는 것이 좋으시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처음 문제를 일으켰을 당시에 이런 교사들을 만났더라면 우리 가족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유영철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가 이미 전과 14범이었을 때였거든요. 청소년때부터 처벌에만 익숙해진 괴물이 된 것이지, 처음 잘못을 했을 때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는 의미겠지요.


결국 자신이 야기한 고통만큼의 고통을 당하는 응보적 정의의 원칙은 사회적으로는 고통의 총량을 두 배로 늘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통이 치유되어야 사람과 사회공동체가 건강해질 수 있는데 고통의 총량이 오히려 더 증가하는 현상이 일반화되는 것은 모두를 병들게 만든다. 결국 피해자는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만, 가해자는 절차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강화되는 왜곡 현상이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위의 책, 56쪽


물론 지금도 ‘자발적 책임’이라는 단어가 아직 낯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회복적 정의 운동을 접하는 교사들이 생기면서 학교 현장에서 달라진 부분들이 있어요. 학급에 싸움, 왕따, 폭력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묻기 시작한 거죠. 괴롭힘을 당한 친구, 괴롭힌 친구, 옆에 있었던 친구 등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앞으로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도록 하는. 선생님도 교사로서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을 내놓고요. 하나의 문제 행위를 가지고 교실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대책을 만들어보는 과정 자체가 교육되기 시작한 겁니다.


저는 학급의 위기를 생활 교육의 기회로 만드는 것이 굉장히 이게 혁명적인 일이라고 봐요. 옛날에는 그렇게 묻던 교사가 없었으니까. 우리 세대에는 못 바꿀 수 있다 해도 이처럼 질문을 바꾸는 어른들, 교사들의 훈련과 그들의 운동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 선생님 말씀처럼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경험을 해야 유영철 같은 사건을 막을 수 있겠죠. 그런데 사실 이럴 수 있는 분이 흔치 않아요. 다른 유가족들 중에는 고 선생님을 싫어하시는 분이 대부분이에요. ‘네가 뭔데 용서를 하고 사형시키지 말라고 하느냐’는 거죠.


사실 참 어려운 문제죠. 누가 대변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가해자들에게 피해를 직면하고 제대로 책임을 질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비록 소수가 택하는 선택지라 할지라도.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왔던 프로그램처럼 학교단계나 사법단계에서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전문가들이 늘어야 해요.


피해 회복을 위한 자발적 책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자발적 책임을 지는 것은 자기가 일으킨 행위가 초래한 결과를 보고, 듣고, 느낄 기회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스스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 자율권과 주변의 지원을 통해 실질적으로 책임을 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책, 91쪽


학교 폭력 가·피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은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단체에서 ‘사랑의 교실’을 운영하고 있어요. 학교폭력 가해 학생들은 특별교육을 10시간씩 이수해야 해요. 이제 그 친구들이 오는 거죠.


우리는 처음에 경찰한테 가해자만 보내지 말고 피해자도 함께 보내달라고 했어요. 문제는 경찰이 피해자 명단을 안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가해학생 정보는 다 있어요. 관리대상이니까.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는 보호의 대상이 되고 가해자는 선도와 교육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피해자는 관리대상에서 빠져버린 거예요. 여기서 말한 선도와 교육은 징계를 뜻하고요.


저희가 처음 지역 경찰서로부터 사랑의 교실 위탁운영을 부탁 받았을 때 사랑의 교실에 피해자 회복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포함시킬 것이니 피해자들도 10시간 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10시간을 모두 이수 한 학생들 중에 원하는 사람은 피·가해측이 서로 만나서 앞으로 같이 지내는 것도 불안하지 않도록 문제를 같이 풀어가보는 걸 시도해 보자고 했죠. 저는 이게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사실 이 곳에 오는 친구들을 보면 가피해가 섞여있거나 계속 피해를 입던 학생이 가해자가 된 경우도 있어요. 특히 소년원 청소년 아이들 만나다보면 더 어린 시기에 자기 피해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체격도 커지고, 힘도 생기니까 가해로 넘어간 친구들이 있거든요. 아니면 자기 주변에 힘 있는 무리에게 붙어서 자신도 그 힘을 남용하는 쪽으로 가버리는 케이스가 생기는 거죠.


많은 연구에 따르면 폭력을 저지른 아이들의 내면에는 풀어내지 못했거나 감추고 싶은 수치심, 공포, 억울함 등 더 어렸을 때 왜곡된 관계 속에서 겪었던 폭력이 있거든요. 이런 것들을 풀어내려면 이 아이들이 그 때의 상황과 맥락을 설명 받을 수 있는, 또는 설명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응보적 관점에서는 이런 마음을 받아주면 이 친구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해요. 소명할 기회를 주면 일종의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맥락을 설명하면 이게 경감의 사유가 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피해자나 일반 국민들의 관점에서는 충분한 경감사유로 보이지 않는데, 형량이 낮아지면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죠.


응보적 관점에서는 철저히 가해자의 동기와 의도성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어요. 가해자를 중심으로 놓고 사건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죠. 저는 그들의 시각을 자신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영향으로 옮겨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을 배우는 과정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죠.


photo_2022-07-15_12-57-21.jpg 사단법인 한국회복적정의협회 회복적적의실천센터에서 진행한 ‘사랑의 교실’ 진행자 훈련 모습. 사진=한국회복적정의협회 제공


회복적 정의에서는 가해자가 나름대로 자신이 잘못한 행동에 대한 상황과 맥락을 설명하는 기회를 부여받는 사람이 됩니다. 현 사법체계 안에서 경감사유나 가해 행동 정당화의 근거가 되는 등의 염려가 있으신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과정이 가해자의 자발적 책임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는 잘못한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줘요.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을 충분히 공감하고 수용해줘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생한 피해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가해자를 공감해주고 맥락을 이해해 준다고 해서 그 행위가 끼친 피해와 영향은 사라지는 게 아니고 그대로 남기 때문에 피해 회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이 남아있는 거죠.


응보적 정의에서는 이게 왜 안되냐면, 가해 행위로 인해 어떤 피해가 발생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해 행위 자체의 불법성을 기준에 맞게 재야하기 때문이에요. 말하는 순간 경감사유가 되니까 아예 인정을 해주지 않아야 잘못한 만큼의 해당되는 벌을 부과할 수 있는 거죠.


과거 피해 경험이 있는데 가해자가 된 친구들이야 말로 저는 회복적 접근에 딱 맞는 친구라고 생각하는데요. 억울함만 남아있는 아이들은 책임에 대한 자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벌을 받아도 변화가 없죠. 그런데 그 친구의 억울함을 충분히 수용해주되 그 친구가 저지른 잘못과,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 직면하는 과정. 이런 과정을 통해 ‘네가 뭘 해주면 피해를 입은 친구를 도와줄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너한테 생긴 억울함은 누구에게 어떤 요구를 해서 풀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이렇게 할 수 있게 되거든요. 하지만 현실은 이런 기회가 없다보니까 방법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뿐이죠.


왜 다른 사람을 때렸느냐 물으면 그 사람이 자기한테 재수 없게 굴었다고 해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는 거죠. 이렇게 피해경험이 자기 폭력의 정당화가 되어 버릴수록 자신이 더 나쁜 행위를 하는 게 도리어 공평하다고 느끼게 되거든요. 이렇게 되면 사회나 주변이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저는 자신의 피해를 직면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피해를 볼 수 있고, 자신이 공감 받아봐야 타인을 공감할 수 있다고 봐요. 사랑의 교실에서는 가해 학생들에게도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물어봐요. 지금의 반에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지, 자신이 받은 피해는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행위 때문에 상대 피해자는 어떤 어려움이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하죠.


저희는 가해 학생의 부모들도 참석하도록 하거든요. 처음에 경찰에서 반대가 많았어요. 불가능하다고. 이미 부모와의 관계가 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고, 오려고 하지도 않을 거라고요. 그런데 계속 설득했죠. 지금은 ‘당연히 부모도 오는가보다’ 이렇게 자리를 잡았는데.


참여했던 한 어머님이 처음에는 너무 오기 싫었는데, 오길 정말 잘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실 가해 학생으로 지목된 이후에 이 친구들이 경험하는 것은 대부분이 비난받는 자리고 혼나는 자리고, 즉 처벌을 경험이란말예요. 근데 부모들이 와보니까 여기서는 부모와 관계회복에 대한 이야기, 자발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 등 새로운 언어들을 접하게 되는 거죠. 그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본인도 이런 걸 배우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누군가에게 어려움을 주었을 때가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처벌의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요. 원래 처벌의 목적은 변화를 위한 교육이거든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좀 더 건설적이고 건강한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경찰들도 학생들을 보내면서 이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요. 문제는 저희처럼 전문화된 몇 사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좀 더 체계를 가지고, 예산 지원도 충분히 받을 수 있어야 더 오래갈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그런데 이런 데는 안 들어오고 촉법 소년 연령하향으로 더 많은 또 더 어린 청소년이 처벌을 경험하는 데만 예산이 들어가니까 문제죠.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이 건강한 사회를 위한 길이 되려면


최근에는 소위 ‘사이다’, ‘매운맛 정의’라고 불리는 것들이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있는데요. 이러한 사회적 맥락에서 회복적 정의 운동이 놓치고 있는 부분 혹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람은 다 보복심리가 있어요. 내가 좋아지지 않더라도 나한테 피해를 준 저 사람만큼은 고통을 받았으면 좋겠는 마음. 이 마음을 전혀 이해 못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심리적으로 매우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죠.


문제는 고통을 가하려는 방식이에요. 드라마에서는 직접 찾아가서 죽이고, 음모를 꾸며서 망하게 하고, 나쁜 사람이 고통을 겪은 후 반성을 하는 등 이런 식으로 대리만족을 주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할수록 복수를 당하는 사람의 피해의식은 더 커져요.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도리어 피해자가 되는 거죠.


그리고 복수를 하는 입장에서는 그게 성공하면 자신의 삶이 좋아져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이전에 한 학생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자살을 한 사건이었는데. 유가족인 아버지가 가해 학생들을 두고 재판을 2년 반인가 진행을 해요. 이 아버지는 학생들이 엄벌을 받기를 원했어요. 계속 상고 올리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높은 형량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 분이 재판이 끝나자 삶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거예요. 만족스러운 게 아니고요. 가해자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 싸울 때는 삶의 목적이 있었는데, 막상 결정이 났다고 해서 자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이제 무얼 위해 싸워야 하나 목표 자체가 사라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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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사회가 변하기 위해서는 이런 분들의 고통과 아픔을 사회적 자원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시혜’는 삶의 의미와 만족을 줄 수 있거든요.


고 선생님이 5일간 대화모임을 하는 동안 한숨도 못 주무셨다 하셨지만, 마지막 날에 이 분이 의자에 다리가 묶여있는 사람들한테 다가가서 그 천을 풀어서 목에 걸어주는, 성직자를 세울 때 하는 상징적 행동을 하셨어요.


피해자가 갖는 유일한 특권이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시혜를 베풀 때 사람들이 갖는 도덕적 우위라는 게 커요. 보복이 아닌 용서가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어요. 물론 정말 힘들죠. 그런데 보복을 하고 싶어도 드라마처럼 되기는 어렵거든요. 고통이 결국 당사자에게 가거든요.


제 책에도 피해자를 보호나 돌봄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우리 사회 자원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썼는데요. 끝내 고통을 가하려고 하는 방식이 아닌, 우리도 겪을 수도 있었던 고통을 입은 사람으로서 그분들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 선생님께서 가족을 잃고 10주기 때 자신의 재산을 모아서 살인으로 복역 중인 재소자들의 자녀, 그리고 살인 피해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 기금을 만드셨어요. 제가 정말 대단하시다고 했더니, 이게 선생님께서 먼저 가신 가족들을 잘 기억하는 일이고 당신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뵀던 선생님의 따님 두 분이 한 번은 우리한테 선물을 주시면서 아버지께 잘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분들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같은 가족이라도 그만큼의 스테이지 까지 갈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거죠. 당연히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하지만 저는 피해자들의 피해경험을 돌봄과 동정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분들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고, 그분들의 경험을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는 일은 필요하다고 봐요. 피해자의 호소가 한 순간의 불쏘시개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 순간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여요. 그런데 그 관심은 가해자의 처벌 여부로 다 흘러가고, 그러다보면 피해자는 잊혀지고. 좀 지나면 가해자는 또 활동하고.


우리는 피해자를 주체로 보지 않고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문화에 익숙하다. 하지만 가해자가 존재한다면 피해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피해자의 회복이 가해자의 책임이 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회복적 정의는 목소리가 없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지도록 돕는 전반적 노력을 의미한다.

위의 책, 290쪽


저는 피해자가 주체가 되도록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피해가 회복되는 데에 사회적 자원이 이어지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면 그들이 가진 특권인 용서를 베풀고 자신이 더 도덕적으로 우위를 갖고, 시혜적으로 살 수 있는 기회도 늘어나겠지요. 엄벌의 요구가 있듯이 이것도 피해 회복의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거든요. 사회적으로 더 깊이 있게 논의되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저는 회복적 정의로 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모두가 회복적 정의로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 등 이런 마이너리티 운동에 몸담고 계신 분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내 의지 만큼 따라올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지점과 대척점에 있는 이상향을 계속 제시하면서 대중이 중간지점까지 와서 어떤 균형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거죠.


저는 회복적 정의가 세상을 치유한다고 말했지만 저와는 반대로 처벌을 더 강화해야 되는 목소리도 엄청 많잖아요. 그걸 인정하고 있고요.


다만 대중이 새로운 관점을 접하고, 이 사회가 회복적 정의와 응보적 정의 사이에 중간 지점까지라도 오는데 이 책이 참고 자료로 잘 쓰였으면 좋겠어요. ‘회복적 정의는 말도 안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한 번 쯤 고민해보는 계기를 드리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서 사회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서는 이런 가치가 필요하다고 까지 느낄 수 있다면 저자로서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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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정의, 세상을 치유하다 ⓒ 고유



※ 건강매거진 데이드 (2022년 7월)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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