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입원으로 당분간 혼자 계시는 아빠에게 아침저녁으로 매일 전화를 했다.
아빠와의 대화는 항상 짧았는데 그 이유는 절약이 일상이 된 아빠의 습관 때문이다.
무제한 요금제로 바뀐 지 10년이 넘었건만 아빠는 아직도 10년 전 요금제에서 나오지 못했다.
아니 이제는 돈이 더 추가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셔도 공짜라도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전화 통화도 짧게 하시고 끊는다.
아빠에게 욕심이 있는 부분은 어떤 부분일까?
세월에 대해서는 욕심이 있을까?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다가오니 가을이 바람 속에 살며시 들어옴을 느꼈다. 아빠도 역시 그 바람을 느꼈는지 이제는 바람이 조금씩 시원하다고 말씀하신다.
문득 세월이 빨리 감이 서글퍼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세월이 빨리 가는 게 속상하지 않아? 좀 늦게 갔으면 좋겠다."
흔히 이런 질문에는 '좀 늦게 가면 좋겠다', '세월을 잡고 싶다.' 이런 대답이 나올 뻔한데 아빠는 욕심 없는 대답을 내놓으셨다.
"그래도 나에게만 그리 빨리 가는 것이 아니니 괜찮다."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며 세월에 대해 투정 한번 할 법도 한데 덤덤히 받아들이는 아빠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세월에도 욕심이 없구나. 그렇다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두렵고 힘들지만 받아들이는 걸 것이다.
그렇다면 아빠의 욕심 없는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혹을 주면서 견디라는 말이지 않을까?
세상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참다 보니 욕심 없는 사람이 될 뿐인 것을.
그런데 참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낸다.
그 상처는 아무도 몰랐다. 무뎌진 자신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몰랐는데 어느 순간 아빠의 상처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곧잘 그 상처들을 들여다본다. 그럴 때면 화장실이든 버스 안이든 그리고 일하는 책상에서든 눈물을 흘리곤 한다. 내 눈물이 아빠의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지만 아픔을 그리고 힘듦을 이해하게 한다. 그러면서 아빠에게 할 발짝 더 다가간다.
내 나이 마흔 중반에 아빠에게 손을 내민다. 손을 잡고 밝은 세상으로 많은 여행을 하자고.
상처가 아팠던 걸까? 아니면 아빠에 대한 이해가 통 했던 걸까? 조금씩 손을 잡고 움직이고자 한다.
아직은 서로가 이 여행을 어색 해 한다.
하지만 이 어색함이 사라질 그날이 오면 아빠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