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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May 29. 2020

4일간의 프랑스 탈출기 - 드디어 도착한 집

프랑스 교환학생 이야기

 새벽 1시, 인천 공항 근처 호텔 침대에 누워 코로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1시 40분에 핸드폰이 울렸다. ‘음성’이었다. 혹시라도 귀국하는 길에 감염되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였는데 한시름 놓였다. 그 후, 시차 적응이 안돼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여러 생각을 한 호텔 방의 밤과 아침  

 아침 7시에 호텔 전화기가 울렸다. ‘누구지?’ 전화를 받았다. 알람 전화였다. 일어나서 집에 갈 준비를 하고 호텔 로비로 내려가 아침으로 음료수와 샌드위치를 받고 버스에 탔다. 버스는 한참을 가 광명역에 도착했다. 광명역에서 버스비와 기차표 요금을 한 번에 계산할 수 있었다. 돈을 내고 거주 지역 부스에 가서 체류했던 국가와 한국에서 사는 동네 이름을 적고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거기엔 여러 국가에서 온 한국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티비 혹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아침을 먹지 않아 배는 고팠지만, 혹시 모르는 감염에 대비해서 샌드위치는 집에서 먹기로 했다. 1시간이 지나고 같은 기차를 타는 사람들과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기차를 타러 갔다. 거기엔 한국에서 생활하시는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코로나가 거의 소강상태인 한국에 들어와 그들이 나 때문에 걱정과 두려움을 느끼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이런 약간의 죄의식과 집에 간다는 설렘이 마음속에서 양립했고 그때 기차는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아침으로 받은 샌드위치와 음료수! 너무 맛있었다 !!!

 나를 포함한 모든 입국자는 입국자 전용 칸에 몸을 실었다. 두 자리씩 붙어있는 좌석엔 한 사람만 앉을 수 있었다. 난 중간쯤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엄청 기쁘거나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 줄 알았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잔잔했던 내면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약 100일 만에 본 한국의 풍경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전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풍경이 새롭게 느껴졌다. 산이 많았고 논과 슬레이트집들은 우리나라 농촌의 마스코트라는 걸 깨달았다.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한국에 처음 도착한 외국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외국에서 30년쯤 산 척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꼭 동영상 찍으면 벽이 나오는 인생의 진리,,,
조용하고 간간히 가족들과의 통화가 들리던 기차 안

 나와 중년 남성분이 같은 역에서 내리셨다. 공무원 세 분이 나와 계셨다. 그들의 인솔을 따라 역을 가로질러 갔다. 그때도 방역이 잘되어 있고 잘 정돈된 한국 사회를 어질러 놓는 듯한 죄의식이 들었다. 내가 사는 지역은 코로나 환자가 당시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감정이 더 켰다. 그리고 인솔자 중 한 분에게 질문했다.

“저 집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아, 차 타고 지역 검사소에 가서 검사받고 가실 수 있어요.”

“저 유증상자로 분류돼서 인천공항에서 검사하고 음성 판정받았어요.”

“아 그래요? 음성 나왔다는 거 한번 보여주세요.”

문자를 보여드리니 잠시 앉아있으라고 했다. 잠시 후, 한 분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저희가 택시 잡아드릴 테니까 그거 타고 가시면 돼요.”

역 앞에 세워진 안심 택시에 짐을 실었다. 공무원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계셨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택시에 탔다. 

기차 밖 대기 장소

 택시가 집 근처에 다 도착해서 카드를 꺼내고 계산할 준비를 했다. 집 앞에 택시가 멈추고 얼른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택시 아저씨는 짐부터 내리라고 하셨다. 뒤에 차가 서 있는 상태여서 얼른 내려 트렁크에서 짐을 뺐다. 그러자 택시는 출발했다. 돈을 아직 내지 않은 상태였기에 당황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를 해결하고 다시 오실 거로 생각했다. 옥상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가족들에게 택시 요금을 내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10분을 기다려도 택시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에게 혹시 택시가 오면 돈을 내달라고 부탁하고 가족들이 절대 만지지 말고 들어가라고 미리 열어 놓은 문을 통해 집에 들어가며 2주간의 자가 격리 생활이 시작됐다.

 시차 때문에 몽롱해서인지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집에 도착한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어항에서 나는 물소리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이불도 부드러운 허상 같았다. 이렇게 멍한 상태로 한 상 차려진 집밥을 맛있게 먹었다.             

 시차의 영향을 밤까지 이어졌다. 새벽 3시 반까지 잠은 오지 않았고 머리가 띵했다. 잠이 오지 않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읽기 시작했다. 이제 안락한 한국 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됐지만 언젠간 다시 거친 파도가 치는 세계로 출항하리라 다짐하며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드디어 영접한 집밥이랑 닭강정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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