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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Jun 10. 2020

지극히 개인적인 6월의 시작

프랑스 귀국 후 도전기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한 개인은 자신만의 삶의 속도가 있다. 이 속도는 절대 항상성을 유지하지 않는다. 천천히 가고 싶지만, 가속페달을 꾹 밟기도 하고 빠르게 가다가 어딘가 부딪혀 멈춰버리기도 한다. 6월의 나의 삶의 속도는 세상이 정한 시간보다 약간 느렸다. 내 6월은 6월 6일에 시작했다. 

 '시작'은 시간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주로 시간보다는 어떠한 사건으로 촉발된다. 우리의 욕망이 특정 사건에 의미를 부여할 때 우리는 시작을 한다. 나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했다. ‘머리 깎기와 학원 등록’

 프랑스에 있는 4개월 동안 머리를 한 번도 자르지 않았다. 처음 도착해서 머리를 기를지 말지를 고민했는데 코로나로 프랑스 사회가 셧다운 되면서 선택지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 길러본 머리가 썩 마음에 들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머리 길이가 이 정도는 돼야지.’라는 생각과 내면에 있는 틀을 깬 듯한 느낌이 들어 계속 기르고 싶었다. 심지어 괜찮다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굉장히 소수였기에 괜찮다고 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천사 같은 친구가 꼭 천국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몇몇 지지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거센 저항과 더위에 못 이겨 아스팔트가 녹을 듯이 더운 토요일 오후 1시에 미용실로 향했다. 

 “어휴, 머리 많이 길렀네요!”

 “커트할게요.”

 미용실에 들어와 이 짧은 대화를 나누고 머리를 자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마스크를 벗기 전까지 헤어 디자이너 형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계속 기를 거니까 다듬어만 주세요.”

 시원섭섭했다. 머리카락이 점점 많이 잘려 나가는 걸 보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스스로 내린 선택이었지만 서운한 마음에 한국의 간섭 문화를 나무랐다.

 생각보다 많이 잘린 머리카락들을 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면서 내가 비치는 곳마다 보면서 이상한지를 확인했다. 뭔가 이상한 거 같으면서도 괜찮은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집에 도착하지 동생이 날 보자마자 “어, 이선희다!”라고 했다. 거울을 봤다. 여잔지 남잔지 헷갈렸다. 다른 건 몰라도 달리기를 잘할 듯했다. 급하게 속으로 ‘요즘 젠더리스가 유행이니까....... 아! 그리고 머리는 금방 길잖아.’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리고 가시적 결과보다 의미에 집중하기로 했다. 프랑스 교환학생의 상징과도 같았던 긴 머리가 다 잘려 나갔으니 이제 본격적인 한국에서 또 다른 도전을 해야 함을 의미했다. 다소 슬픈 결심으로 내면에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진정한 6월을 시작하기 위해선 내면의 새로움만으로는 부족했다. 진정한 시작은 서울에 있는 프랑스어 학원을 신청하면서 완성됐다. 이 돈과 의지만 있으면 실행 가능한 ‘학원 가기’는 생각보다 험난했다. 먼저 지방에 살기에 서울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최대한 대중교통 이용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같이 다니기로 한 형과 의기투합해 렌터카를 빌려서 가기로 했다. 둘 다 장롱 면허였지만 형은 도로 주행 경험이 있었기에 연습하면 고속도로도 충분히 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이 왠지 모험하는 느낌이 들어 흥분됐다. 하지만 모험은 항상 쉽지 않다. 도로 주행을 해보고 형이 도저히 운전을 못 하겠다고 한 것이다. 머릿속에 출발지와 도착지만 남은 채 그 두 점을 잇는 선이 없어져 버렸다. 이 선을 이을 방법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운전을 못 하는 나에게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마스크를 잘 쓰고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해서 학원까지는 일단 지하철을 타보고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전동 킥보드를 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다른 큰 파도가 밀려오는 걸 모른 채 미용실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가 왔다. 

‘6월은 수강생이 적은 달이어서 개강 가능 인원인 3명이 다 차지 않아서 개강이 어려울 것 같아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수강하고자 했던 수업이 없어진 것이었다. 당황한 채로 머리를 자르러 갔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며 어떻게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깎여진 머리를 보며 더 당황한 상태로 집으로 가며 같이 다니자고 한 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른 요일에 있는 수업을 수강하기로 했다. 평범하지만 험난하고 피곤한 시작이었다. 힘든 하루였지만 마음속으론 이 도전으로 11월에 있는 프랑스어 달프 C1을 꼭 따겠다는 다짐을 했다. 

원래 시작과 도전은 예상치 못한 놈에게 물리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인 듯하다.

 그리고 또 다른 작은 시작을 했다. 바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 ‘불문과가 이 책은 읽어봐야지.’라며 읽다가 혼란에 빠져 그만 덮어버린 적이 있었다. ‘이거 소설이라고 샀는데 철학책 아니야?’ 그리고 밀란 쿤데라는 ‘영원한 회귀한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라는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다. 이 문장을 읽고 나 또한 이 책을 더 읽을지 말지를 고민해야 하는 곤경에 빠졌다. 엄청난 무게감을 가진 첫 문장으로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졌다. 다양한 ‘시작’을 하며 피곤을 이기지 못하는 나에게 ‘밀란 쿤데라’는 말을 걸었다. 그 말은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여러 작은 도전을 시작한 나에게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위로를 받아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17p,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이번엔 다 읽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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