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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Jun 21. 2020

좋아하는 책 필사하기

데미안 필사하기

 작품이 창조될 때, 꿈을 꾸기 시작할 때, 나무를 심기 시작할 때, 아기가 태어날 때, 삶은 시작되고 어둠의 시간을 뚫고 나아갈 커다란 틈이 생깁니다.
-서간집, 헤르만 헤세

 하루에 소설 한 장씩 필사하기로 마음먹은 지 한 달이 지났다. 필사하고자 하는 의지는 글다운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서 일어났다. 글쓰기 실력을 기르기 위해 시작했기에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 필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관련 정보를 뒤졌다. 시간이 많고 적음과 자신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맞춤형 방법이 있었다. 그중에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면 그 대목을 노트에 손으로 옮겨 적고 마음이 동한 이유를 쓰는 방법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 생각이 든 순간, 내면 깊숙이 잠자고 있던 완벽주의와 강박감이 내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얘는! 그러다가 혹시라도 중요한 부분 놓치면 어쩌려고 그래! 잔말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다 써!” 

아침마다 5분씩 명상을 하며 잠재워놨던 그것들이 올라와 순식간에 결정을 내려버렸다. 필사 방법이 결정되자 필사할 책을 고르는데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헤세의 데미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다행히 이번엔 뇌의 선택을 거스르는 무언가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필사하는 대장정이 시작됐다.

내가 산 첫 프랑스어로 된 소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자발적으로 우러나와서 하게 된, 어쩌면 자신의 내면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자아실현에 크게 기여할 이런 활동들은 현실적인 삶의 과제에 쉽게 밀린다. 자격증 준비와 가족 행사 등에 밀려 필사를 못 한 날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사랑하는 책을 필사하기에 금방 다시 계획했던 궤도로 돌아와 필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필사하며 마저 쓰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고, 고등학생 시절 그냥 지나갔던 부분도 새롭게 다가왔다. 나중에 이런 종류의 글을 쓰고 싶었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었다. 필사하며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잠시 쓰기를 멈추고 생각을 하고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때쯤이면 다시 베껴 썼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미술품을 감상하듯 작가의 의도와 상징을 발견하고 나름 해석을 하는 게 재밌었다. 필사를 시작하면 점점 내용에 집중해 무의식적으로 손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다소 흥분한 채로 글을 적는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약간 손목에 통증이 느껴지고 다시 소설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온다. 

비록 글씨는 잘 쓰지 못하지만 꾸준히 쓰기

 삼십 분 남짓한 비현실적인 시간이 보내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오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내일이 기대된다. 이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티브이에서 영화를 보다 중요한 장면에서 뚝 끊기고 광고가 나올 때 느끼는 아쉬움이 든다. 평소 독서를 할 때는 그 광고가 더 재밌어 영영 다시 책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에 이는 정말 낯선 경험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다른 책을 읽고 싶은 마음과 일상의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이끌어낸다. 또한 ‘나도 소설을 써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처음엔 자신조차 항마력이 달려 읽기 힘든 졸작이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계속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간 읽을 만한 소설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막상 소설을 쓰려면 머리가 하얘지고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기에 부담 갖지 않되 일상에서 소재나 영감들을 수집하며 새로운 도전을 해볼 것이다. 그리고 혹시 필사가 하고 싶지만 부담스러워하지 못하는 분이 계신다면 좋아하는 책으로 시작한다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이 시간이 매일 작은 행복을 선사할 거라고 이야기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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