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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Jul 18. 2020

5년 전 오늘

인생 첫 배낭여행

 2020년 7월 11일, 핸드폰에 5년 전 오늘 찍은 사진을 확인하라는 알림이 왔다. 나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은 채 핸드폰의 제안을 덥석 수락해버리고 말았다. 거기엔 동생과 일본을 배낭여행하며 찍은 사진이 있었다. 이 사진은 그보다 더 과거에 일어난 일로 나를 이끌었다. 2015년 1월에 일어난, 일본 여행을 가능하게 했던 그 일로 말이다.  

5년 전, 동생과 일본에 가서 공항에서 자고 바닥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너무 더웠지만 행복했던 시간들

 택시를 탔다. 창밖으론 바다가 보였다. 기사 아저씨가 돌아가진 않을까 불안해하고, 또 창밖을 보며 설레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을 가니 주렁주렁 달린 설맞이 빨간 등과 바닥에 깔린 남부 유럽 양식의  타일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광장을 지나 차는 곧 멈췄다. 얼른 허름한 숙소에 짐을 놓고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거리엔 사람이 즐비했고 많은 사람이 금은방과 환전소를 들락거렸다. 그리고 보모의 보호를 받으며 하교하는 서양 아이들이 보였다. 학생들의 인파를 따라가다 성 한 채를 발견했다. 입장료는 무료였다. 상쾌한 마음으로 천천히 그 성을 돌다가 저 멀리 무언가를 보았다. 성 바오로 성당의 파사드였다. 1시간 전만 해도 가이드북에서만 보던 건축물이 눈앞에 놓여있었다. 아직 먼 이국땅에 도착한 게 믿어지지 않았기에 얼떨떨했다. 하지만 파사드는 거침없이 내 발길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성당을 구경하고 마테오 리치 동상을 지나 고급주택이 늘어서 있는 언덕을 오르자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를 발견했다. 한동안 벤치에 앉아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했다. 눈앞엔 본섬과 다른 섬을 잇는 긴 다리가 놓여 있었고 뒤에는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만 미사가 열린다는 펜하 성당에서 수녀님들이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그러자 일상을 벗어던진 자에게 아직 그 속에 있는 존재들이 카톡을 보냈다. 

‘야, 마카오엔 잘 도착했냐? 보충수업 째고 가서 개꿀이겠다.’

5년 전, 나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보충학습을 째고 마카오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도둑들 촬영지이고도 한 마카오에서 머문 숙소
정처없이 걷다 만난 성과 성 바오로 성당 파사드
당시 한참 쓰던 오줌 필터로 찍은 사진들 왼/펜하성당 오/다리&마카오 타워

 여행의 시작은 수학학원에 있는 고등학교 1학년인 나에게서 시작된다. 모르는 단어는 없지만, 문제를 풀 수 없었다. 그때 수학 쌤이 말씀하셨다. “내가 볼 때 넌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부족해. 문제를 보자마자 풀려고 하지 말고 먼저 문제를 이해하고 계획을 세워 풀어야지.” 이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그럼 계획을 세우는 능력은 어떻게 키우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제일 좋아하는 여행을 직접 계획하고 실행하며 이 능력을 기르기로 했다. 가용 금액이 50만 원 밖에 없었기에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많지 않았다. 그중 여행 난이도가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인 마카오가 끌렸다. 수학을 잘하기 위해, 아니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여행지를 마카오로 정했다. 당시에는 몰랐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나를 끼워 맞추려고 자유와 해방감에 몸을 던지는 행동이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분명히 우리나라는 1989년에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마카오를 가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아빠와 할머니가 여행지를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으로 받아들여서 문제가 발생했다. 쉽사리 자식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낼 부모는 없었다. 그래서 숨을 가다듬고 여행지가 마카오라고, 안전한 곳이라고 다시 말했다. 이번엔 아마 카슈미르쯤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당연히 협상은 결렬됐다. 내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건 엄마뿐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의도치 않게 최후의 지지자마저 배신했다. 엄마가 카드를 빌려주어서 저가 항공권 홈페이지에서 20만 원이 조금 넘는 왕복 비행기 표를 살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더는 당신들과 협상할 의지가 없고, 나를 틀에 가두려고 한다면 기꺼이 그 틀을 부수겠다는 선언을 할머니와 아빠에게 감정을 제거한 다소 객관적인 언어로 전했다.

“저 비행기 표 샀어요.”

그리고 질문이 돌아왔다.

“비행기 표는 어떻게 샀어?”

“엄마 카드로요.”

이 말을 하지 않아야 했다. 비판 없이 학습한 정직함이 최후의 지지자를 가족들의 다수 의견을 따르지 않는 배신자로 만들었다. 엄마에겐 죄송했다. 그 선언한 뒤, 일주일간 아빠는 나와 밥을 같이 먹지 않았다.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으로 수학 실력 향상은 물론 삶을 주도적으로 계획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견딜 만했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상황은 여행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가까워졌다. 새벽 비행기였기에 공항까지 타고 갈만한 교통수단이 녹록지 않았다. ‘공항에서 하루 잘지’ 등 여러 고민을 하다 결국 아빠에게 조심스럽게 무거운 발을 내디뎠다. 

 “아빠, 나 내일 공항까지 태워다 주면 안 돼?”

 아빠는 짧게 할머니와 대화한 뒤 내일 새벽에 함께 공항에 가겠다고 했다. 마지막까지 이-티켓이 사이트 문제로 출력이 안 돼서 비행기 출발 5시간 전까지 진땀을 흘렸지만 결국 마카오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3박 4일 마카오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비록 귀국 비행기에서 안경 코 받침이 떨어지고 장염이 도졌지만, 여행은 새로움으로 가득했다. 호스텔에서 알바니아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코소보 사태에 대해 듣기도 하고, 한국인 대학생 형들을 만나 예정에도 없었던 홍콩을 다녀오기도 했다. 처음으로 포르투갈 음식도 먹어보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진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식당에서 맥주도 시켜보았다. 그리고 한국인 가족들과 완탕면 집에 가 저녁을 얻어먹기도 했다. 또 마카오는 버스에서 잔돈을 거슬러주지 않는다는 걸 모른 채 버스에 타 한 필리핀 분에게 금전적으로 신세를 지기도 했다. 낯설고 실수투성이인 여행이었지만 그때마다 타인의 호의로 넘어가기도 하고 또 그 실수 자체가 그렇게 삶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여행 계획은 세웠지만 발길 닿는 대로 걸었고, 그 자유로움은 뜻밖의 만남과 감동을 선사했다. 성당들을 구경하고 또 세나도 광장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며 생각했다. 

‘아, 혼자 여행 와도 죽지 않을 수 있구나.’

홍콩에서 처음 본 이층 버스 & 아름다웠던 세나도 광장의 저녁

 아까도 말했다시피 결과적으로 난 장염을 얻었지만 죽지 않고 귀국했다. 하지만 얻을 게 더 많았다. 전보다 수학을 체계적으로 풀기 시작한 건 물론이고, 혼자 떠난 배낭여행을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알기 위한 도전을 하기가 조금은 쉬워졌다. 무엇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우리는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우리가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인식해야 존재의 영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명확해지고 도전을 실행할 수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이 여행을 떠나려는 나에게 물었다. 혼자 여행하는 게 위험하지 않냐고. 하지만 이 질문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전쟁, 테러, 범죄로 죽는 사람보다 집 앞에서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로 더 많이 죽는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나로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을 막는 행동이다.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행을 준비하고 할 때 삶과 죽음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여행 위험지역을 여행으로 선택하지 않고, 정한 여행지의 우범지대와 현지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확인했다. 최대한 삶이 죽음을 허락하지 않게 말이다. 이 일련의 행동은 나중에 부모님의 신뢰를 얻어 중학생 동생을 데리고 일본 배낭여행을 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고 또 조금씩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변화하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 개인적 깨달음은 내 삶에서만 유효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다른 분들이 쓴 여행기도 많이 읽어 다양한 삶의 경험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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