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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Apr 18. 2021

우연을 두 번이나 만나버렸다

작은 틈으로 스며든 행복

 어떤 상황에서 응당 느껴야 하는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새 학기엔 설레야 하고 죽음 앞에선 슬퍼야 하고 혼자면 외로워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어둠이 빛보다 편안할 수 있고 이별이 만남보다 행복할 수 있고 기쁨보다 슬픔이 소중할 수 있는 것을. 살면서 축적된 엄청난 양의 데이터에도 불구하고 난 또다시 상황에 맞는 감정을 주입하려 했다.


 3월에 본 프랑스어 시험인 달프 c1 시험지를 보러 서울에 가고 있었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결코 시험지를 확인하러 가지 않는다. 대신 그간의 노력을 치하하고 향상된 실력을 자축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고작 시험지를 확인하러, 그것도 채점지는 공유하지 않는다는 시험 주최 측 입장에도 불구하고 2시간의 여정을 감내하는 사람은 예상치도 못한 낮은 점수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고 무의식적으로 씁쓸함을 내면에 강요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감정은 곧장 휘발되어 버렸다. 따사로운 4월의 햇볕을 흡수한 채로 자고 깨기를 반복하며 서울에 점점 가까워지자 실패의 경험을 마주할 땐 마음이 무거워야 한다는 강박은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만 집을 떠나 낯선 곳에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들떴다. 그땐 전혀 알지 못했다. 들떠 있는 마음 사이로 비집고 들어올 무언가를. 


 직장인들이 모여 담배 피우고 있는 빌딩 사이를 한참 헤매다가 어학센터가 있는 빌딩을 찾아냈고 시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학센터를 나왔을 때, 서울에서 만나기로 한 지인과의 약속이 2시간 반 정도 남아있었다. 카페에서 책이나 읽자는 심산으로 교보문고 광화문점으로 향했다. 서점 입구를 찾기 위해 교보 빌딩 근처를 한참 서성이며 이순신 동상과 청와대를 두세 번 더 마주치고서야 서점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 권만 사려고 했는데 서점을 나서는 내 가방엔 네 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약속 장소인 시청으로 향하며 적당한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을 지나치며, 아무도 날 모르고 나도 그들을 모르는 상황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시청에 다다랐을 무렵 작은 길 하나를 지나고 있었다. 무심코 대로와 맞닿아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주황색 지붕 위에 작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교회가 보였다. 붉은 벽돌과 웅장함을 자아내는 화강석들이 좁은 통로 끝에서 햇볕을 맞으며 빛나고 있었다. 어느새 대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고 오래된 유적으로 향했다. 교회에 가까워질수록 소음과 인파는 사라지고 차분하고 잘 정돈된 골목이 나왔다. 순간 마카오에서 곳곳에 흩어져있는 성당을 찾아다니며 만난 골목들이 떠올랐다. 검은 수단을 입은 신부님들이 거닐면 어울릴 그런 장소였다. 그곳은 성공회 성당이었다. 성당 문을 열어보았지만, 코로나 때문인지 성당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다. 겉모습은 천주교와 비슷하지만, 교리는 개신교에 가깝다는 성공회답게 마당에는 성모 마리아상 대신 십자가가 놓여있었다. 아무 스트레스 없이 성당을 한 바퀴 돌았다. 저기 담 너머 한옥 건물 몇 채가 보였다. 곧장 성당을 나와 그곳으로 향했다. 성당 옆엔 바로 덕수궁이 있었다. 

예기치 찾아 온 우연의 시작! 서울에서 만난 조용한 골목
웅장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공회 대성당과 담 너머 보이는 덕수궁


 매표소 앞에서 “어른 한 명이요!”를 외치고 카드를 창구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창구 안에선 “몇 살이세요? 여기에 해당하는 나이면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으세요.” 난 다행히도 만 24세 이하였다. 뜻밖의 행운에 기분 좋게 궁에 들어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포근하게 데워진 봄날, 덕수궁은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좋은 곳이었다. 연못에 비친 만개한 철쭉을 보기도 하고, 분수 앞 따뜻하게 데워진 의자에 앉아 계절을 만끽할 수도 있었다. 담 너머 보이는 성당과 궁의 오묘한 조화가 퍽 나쁘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질 때쯤 벤치에 앉자 어디선가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고 나무 끝에서 새들이 지저귀며 차분함에 고즈넉함을 더했다. 한껏 여유를 즐기다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약속 시간이 되어 궁을 나섰다. 


 우연히 시청 근처 스타벅스를 찾아 헤매다 발견한 성당, 성당에서 바라본 덕수궁은 예기치 않게 붕 뜬 마음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도시, 서울에 숨겨져 있는 고요를 발견했다. 이 두 장소를 거닐며 답답했던 마음은 뻥 뚫리고 끊임없이 요동치던 내면은 잔잔한 호수가 되었다. 삶에 ‘우연’을 허하는 순간 현재를 느낄 수 있었고 밖에서만 불던 봄바람이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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