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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Mar 29. 2021

모든 것이 변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

 우리를 둘러싼 거의 모든 건 변한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즐비했던 5층짜리 아파트 단지는 재개발되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가을이면 잠자리채를 들고 누비던 공터는 식료품이 가득한 마트가 되었다. 심지어 자신도 바뀌어 종종 과거에 쓴 글을 볼 때 생경한 느낌이 든다. 끊임없이 변하고 진보하는 세상에서 종종 길을 잃어버린 듯 불안감이 엄습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미래를 잘 살아 보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고 싶은데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 열심히 준비한 시험을 보기 하루 전날 등이 그때이다. 이럴 땐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누구에게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할 수도 있고,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 분투해야 할 수도 있다. 


 하얀 목련이 활짝 핀 3월의 어느 날, 서울로 시험을 보러 가야 했다. 한 번 떨어지기도 했고 오래 준비하며 진이 빠져 꼭 이번 시험에 붙고 싶었다. 합격을 욕망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속은 더욱 울렁거렸다. ‘저번 시험보다 더 많이 준비했으니까 꼭 붙을 거야. 붙는다고 생각해야 붙지!’를 계속 반추했지만, 떨리는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수험표, 필통, 시험 전 공부할 자료와 소화제가 담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항상 그랬듯이 먼 길을 가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할머니가 따라 나오셨다.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상투적인 작별 인사에 언제나 그렇듯 ‘조심해서 다녀와.’라며 주의를 주셨다. 


 느껴질 듯 말 듯한 여우비를 맞으며 골목 끝에 다다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선을 집 쪽으로 돌렸다. 할머니는 우리가 헤어졌던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머리 위로 손을 크게 흔들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 몸짓에 화답하지 않으셨다. 코너를 돌자 할머니도 이내 집으로 발길을 돌리셨다. 울림 없는 메아리처럼 흩어져 버린 반가운 손짓은 잠시 후 더 큰 파동으로 마음을 울렸다. 할머니는 내가 잘 보이지 않지만, 저 흐릿하게 보이는 점이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믿음 하나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며 변해가는 할머니의 변하지 않는 사랑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면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진정시켰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건 정말 큰 힘이 된다. 이것들은 평소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어쩌면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과 함께 위태롭게 흔들릴 때 의지할 수 있고, 캄캄한 미래로 나아가며 앞이 보이지 않을 때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이 흔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랑으로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채 시험장으로 향하던 마음속에도 포근한 봄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야자수처럼 흔들렸지만,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인생의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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