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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Aug 11. 2021

‘처음’의 환각작용

너무나도 환상 같은 현실


 ‘첫 경험’. 이 단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인간에게 강한 환각 작용을 일으킨다. 새로움이란 마약에 취하기 위해 누군간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도 하고, 줄기차게 다른 이성을 갈망하기도 하며, 때론 미지의 세계로 떠나기도 한다. 새로움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경험을 본인이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군인인 내게 지난 삼 개월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할 환각을 선사하지 못했다. 첫 휴가를 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상이 온통 아름답게 보이는 필터를 자는 동안 각막에 이식한 게 분명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앉아서 보는 뒤뚱거리는 비둘기와 뚜렷한 특징 없이 천천히 걷는 노인의 걸음걸이도 아름다운 재즈로 느껴졌다. 날씨는 우중충했고 터미널은 낡았지만, 그 모두가 자유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고 사랑스러웠다. 버스에 몸을 싣고  커튼을 열어젖힌 뒤 바깥세상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산에 자욱한 안개가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걸 마주하며 세상은 역시 아름답다고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드디어  앞에 당도했다.  손에 우산을 들고 다른  손엔 가족에게  선물을 한가득 들고 있었고 땀은 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의 외관을 사진에 담고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순간  발이 지면으로부터 족히  센티미터는  뜨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서둘러 군복을 갈아입고 할머니가 해주신 불고기와 청국장을 먹었다. 그래도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이 집이 진짜 내 집일까, 내가 정말 집에 온 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뜨면 부대가 아닐까?’ 밥을 다 먹고 침대에 눕자 또 ‘내가 입대를 하긴 한 걸까?’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이 떠올랐다. 한 5초 정도 이 질문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이내 옷걸이에 걸려있는 군복을 보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두 현실 사이에 놓인 간극을 어쩌지 못하고 방황하며 하마터면 장자의 호접지몽을 이해할 뻔했다.


 우린 가끔 새로운 환경에 툭 떨어졌다가 한참 있다가 익숙한 곳으로 기어 나오는 경험을 한다. 신기하게도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이질감보다 익숙한 곳으로 돌아온 뒤에 느끼는 낯섦이 더 큰 환각 작용을 일으킨다. 이전에 이곳에 머물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지 않아서 느끼는 감정일까, 아니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밀려오는 행복을 이렇게 느낀 것일까?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익숙함 속에서 경험한 ‘처음’은 어지러웠고 아찔했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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