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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Dec 27. 2022

할머니와 떠나는 5000km의 여정

할머니와 함께 떠나는 여행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상상만 해도 심장이 간질거릴 정도로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아직 젊기에 여행하며 몸이 아프거나 하루 종일 길을 헤매도 금방 털어버리고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 하지만 80대가 넘은 노인이라면 과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조금만 무리해도 무릎이 아프고 약해진 이로 아무거나 먹을 수 없는 사람에게 여행은 맛있어 보이지만 함부로 베어 물 수 없는 사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전역을 앞둔 동생과 나는 할머니에게 해외에 있는 아빠를 보러 가자며 이 사과를 건넸고 할머니는 맛있게 베어 무셨다. 우리의 목적지는 인천에서 5000km가 넘게 떨어져 있는 인도네시아였다.  


 전역한 지 열흘째 되던 날, 10년 만에 우리 셋은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은 입대와 팬데믹 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시간과 돈만 있다면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공항은 품고 있었다. 공항엔 많은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고 있었다. 체크인과 수화물도 셀프로 진행해야 했다. 이 방식으로 획기적인 인건비 절감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저울에 캐리어를 올릴 때 드는 추가 요금에 대한 고객의 불안감은 증폭시켰다. 1kg 정도는 봐주는 자비를 기대하기 힘든 무자비할 정도로 정확한 기계에 캐리어를 올렸다. 다행히 23kg이 넘지 않았고 짐들은 무사히 트레일을 따라갔다.  


 화장실에 들러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 뒤, 출국 수속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검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다. 비행기표를 샀다는 사실과 가방에 폭탄이 없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짐 검사 후 노트북을 다시 집어넣을 때는 마치 들키지 않은 폭탄을 얼른 숨기고 싶어 안달 난 테러리스트처럼 서둘러서 의심을 살뻔했지만. 그다음 할머니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엔 또 다른 기계가 있었다. 여권, 지문, 얼굴을 인식하는 기계였다. 할머니 차례가 되자 공항 직원은 내가 할머니를 도와드리는 걸 허락했다. 기계에 여권을 대자 1차 관문이 열렸다. 기계 속으로 할머니는 걸어 들어가셨다. 그러자 검지를 대라는 안내가 나왔다. 손가락을 대자 다시 대라는 안내가 나왔다. 하지만 검지로 아무리 기계를 눌러도 지문을 인식하지 못했다. 너무 당황해서 할머니가 열 손가락을 다 대보려고 하던 찰나 공항 직원이 할머니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우린 서둘러 여권과 지문을 인식시키고 나와 할머니를 기다렸다. 한 3분쯤 지났을까 할머닌 무사히 수속 과정을 마치고 명품 샵이 즐비한 비행기 탑승장으로 넘어오실 수 있었다. 할머니의 지문을 지운 건 본인이 아닌 세월임을 입증하신 것이다. 우린 이 예상치 못한 재밌고, 한편으로 뭉클한 해프닝에 관해 이야기하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 

 밥 먹고 비행기 탑승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출발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서 그런지 한적했다. 창밖엔 비를 맞으며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었다. 티비를 보며 동생과 함께 할머니 다리를 주무르기도 때때로 한 번도 제대로 된 답을 들어본 적이 없는 ‘할머니는 인도네시아 가면 뭐 하고 싶어요?’ 같은 질문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무료한 시간은 엄청난 행복감을 선사했다. 여행을 준비하느라 느끼지 못한 여유를 이때 경험한 것이다. 더 이상 여행 일정을 조율하지도, 어떤 호텔이 좋은지 고민하지도, 무얼 타고 언제 이동할지도 골몰하지 않아도 된다. 떠나는 일 하나만 남아있는 이 순간에 여유를 느끼며 여행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여행 스케줄이 아닌 가족이 함께하는 경험으로서의 여행을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린 한동안 달콤한 쉼을 만끽하다 비행기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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