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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Mar 08. 2022

아플 때 책을 읽다.

내게 건네는 인사의 힘

 우린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고 배우지만, 병원이 모든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은 혼자 체득해야 한다. 원인이 불분명한 내적 고통을 경험하고 뚜렷한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존재는 쉽게 무기력해진다. 남들은 멋진 커리어를 이어가고 우주를 탐사하고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으며 살아가고 있는 듯한데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질 때가 있다. 22년이 막 시작되었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머리와 가슴은 끔찍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새해의 야심 찬 계획을 살고자 하는 생각과는 달리, 답답함, 무기력함, 우울감 등 각종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음을 둘러싸고 있었다. 다양하고도 모호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원인을 찾아보았다. 고통의 원인으로 치부할 수 있는 그럴듯한 원인이 너무 많았다. 일단 추운 날씨에 줄어든 외부활동, 입대하면서 원하는 대로 삶을 온전히 이끌어가지 못하는 현실, 제한된 자유 속에서 하는 공부가 원하는 만큼 되지 않는 상황, 20대 초반을 온전히 함께 한 연인과의 이별 등등. 원인은 이쯤 찾았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까? 빨리 해결하고 싶다는 조급함이 부정적인 감정들의 무게를 더 할 때 휴가를 떠났다. 





 부대로 복귀하는 날, 가방에 서점에서 산 책 여러 권을 넣었다. 그중 하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었다. 이 작가의 또 다른 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그녀가 복잡한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고민 없이 골랐다. 사강이 어떤 식으로라도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맹목적인 희망도 이 선택에 큰 지분을 차지했다. 



 부대에 들어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격리를 하며 ‘슬픔이여 안녕’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을 펴자마자 나오는 시를 읽었다. ‘아, 이 책 괜히 샀나?’ 좋은 시인 듯한데 아직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부족했다. 2, 3 페이지 가량을 넘겨 1부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첫 문장이 선사한 감동으로 순식간에 도달한 책 말미에서 나도 주인공처럼 감정에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나는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 슬픔이여 안녕의 첫 문장


 첫 문장이 카타르시스를 일으킨 까닭은 감정에 대한 무지가 한 겹 깨졌기 때문이다. 감정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주인공은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마주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준다.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해 스트레스 받았던 내게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강을 따라 감정에 슬픔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자 직감적으로 고통스러웠던 감정과의 교착상태를 벗어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난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복잡한 감정을 해소할 수 있던 이유가 주체적으로 독서로 감정을 해결하려는 새로운 시도 때문인지, 첫 문장에서 받은 따뜻한 공감 때문인지 말이다. 하지만 부정적 감정을 해결 대상으로만 여긴 내게 사강은 마음 속 고여있는 낯선 감정을 명명함으로써 마주할 용기를 주었다. 내면의 광활함과 복잡함을 조금은 더 이해했고 자신만의 처방을 내리기 위한 여정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여행을 즐기다 보면 언젠간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새로 발견한 나의 모습과 감정에 당황하지 않고 ‘안녕’ 인사를 건네고 싶다.        



Sur ce sentiment inconnu, dont l'ennui, la douceur m'obsèdent, j'hésite à apposer le nom, le beau nom grave de tristesse.
- De Françoise Sagan / Bonjour triste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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