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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Jan 25. 2023

들어가지 못해도 시작된 여행

할머니와 함께 떠나는 여행

 많은 종교에선 성스러운 장소에 들어가거나 중요한 의식을 치를 때 몸과 마음을 물로 깨끗이 씻는다. 인도네시아 식당마다 마련되어 있는 기도실이 화장실 옆에 위치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인도네시아 첫 일정도 다분히 종교적이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 통치하던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구교 국가인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점령한 시기에 지어진 자카르타 대성당과 동남아시아 최대 모스크 이스티크랄 사원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두 종교건축물을 방문하기에 앞서 7시간의 비행으로 쌓인 피로와 세속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할머니와 함께 마사지샵으로 향했다.


 마사지 샵은 2층에 있었는데 1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발 마사지만 받기로 하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뉘었다. 마사지사가 들어오셔서 딱 한 가지를 물었다. 인도네시아어를 몰랐기에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어깨를 주무르는 제스처를 했기에 어깨 마사지도 필요한지 물어보는 듯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에 대답하기보단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모른다는 상황을 전달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해를 구하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노 바하사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어)”라고 최대한 아는 인도네시아어를 이어 붙여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이해할 수 있는 동작과 언어로 된 설명을 원했지만, 그는 내가 낸 소리에서 ‘노’만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에 집중된 마사지를 받으며 내가 뱉은 ‘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어떤 말도 내뱉지 않으시고 어깨 마사지까지 받으셨다. 역시 소통은 언어로만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났고 우린 인당 약 8500원으로 만족스러운 마사지를 받았고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성스러운 곳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모나스 광장에 수많은 인파와 툭툭 그리고 노점들을 지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성당의 첨탑과 모스크의 돔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차를 세웠다.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에 이렇게 큰 성당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단단한 성벽 같은 성당의 외벽을 감상하며 성당 내부로 향했다. 내부에 들어가려고 하자 성당 안내원이 이제 곧 미사가 시작될 것이며 성당 안은 신자들로 가득 차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천주교 신자인 우리도 이렇게 된 이상 미사를 보자는 심산으로 미사가 언제 끝나는지 물었고 2시간 뒤라는 답을 받았다. 우린 그렇게 성당을 나왔다.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점령기에 지어진 천주교 자카르타 대성당

 대성당과 이스티크랄 사원은 도로 하나를 사이로 마주 보고 있다. 이는 다양한 종교를 포용한다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지향점을 나타낸다. 실제로 거리상으론 지척이지만, 전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차들이 달리는 도로를 건너기는 쉽지 않았다. 한참 길을 건너지 못하자 이슬람 사원 입구에서 작은 노점을 하는 청년이 우리를 위해 차량을 통제해 주었다. 그의 배려 덕분에 무사히 이슬람 사원에 입장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배려로 여행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고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이슬람 사원 앞엔 사람이 많아 소매치기당할까 봐 잔뜩 걱정하고 있었고, 도움을 받을 때도 무언갈 팔거나 요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이슬람 사원의 내부에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원이 사원 폐장 시간이라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원 마당에선 얼마든지 사진을 찍어도 된다며 친절히 알려주었다. 인도네시아 단체 관광객 속에서 사진을 찍고 동남아 최대 이슬람 사원을 떠났다. 차로 가는 동안 비가 오기 시작했다.

독립과 자유를 의미하는 이스티크랄 사원

 몸과 마음을 자신의 노력으로 성찰하며 정화하지 않고 손쉽게 남의 손을 빌려 무언갈 해결하려고 해서인지, 아니면 미리 성당과 모스크의 종교의식과 문 닫는 시간을 알아보지 않은 안일함 때문인지 우린 결국 이 두 종교 건축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청년 덕분에 무사히 도로를 건넌 경험은 마음속에 오랜 울림으로 남았고 우리 여행의 포문을 열기에 충분히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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