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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ug 05. 2019

동과 서의 국제질서는 과연 ‘충돌’했는가?(上)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날도 덥고, 몸도 마음도 좋지 않다.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지난 학기에 제본해놓고 사물함에 처박아두었던 박사학위논문들을 죽 읽고만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짧게나마 정리해보려 한다. 


‘사대’란 작고 약한 조선이 크고 강한 중국을 상대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수단이었다는 생각은 오늘날 한국인들 사이에서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의 왕이 중국의 천자에게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친다한들, 이는 조선의 ‘주권’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고, 1885년 원세개를 조선에 파견한 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조공질서를 무시하고 조선을 ‘근대적인’ 속국 혹은 식민지로 전락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질서와 근대 서구의 국제법 질서는 상충한다는 ‘통념’이 깔려 있다. 
한편, 일본의 역사학자 오카모토 다카시는 이른바 ‘속국자주론’을 꺼내들며 위와 같은 한국인의 역사인식에 딴지를 건다. 그는 ‘속국’의 대립항은 ‘독립’이지 ‘자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속국이면서도 충분히 자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조선은 청의 속방인 동시에 자주지방(自主之邦)이기도 했다. 
1880년대 청의 조선정책 역시 속국화 혹은 식민화라기보다는 이러한 전통적 조공질서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주권이라는 ‘알맹이’를 내준 대신, 종주권이라는 ‘껍데기’를 취함으로써 조선을 둘러싼 분쟁을 봉합했다. 동양의 비스마르크라 불리던 노회한 대정치가의 묘책 덕분에 톈진조약을 체결한 1884년부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까지 동아시아는 잠잠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오카모토의 주장은 한국인의 통념을 깨부수는 참신한 면이 있다. 허나 그 역시 전통적 조공질서와 근대적 국제법 질서는 상충한다고 여긴다는 점에선 대다수 한국인과 큰 차이가 없다.(오카모토의 주장에 관심이 있다면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을 참고하라)


젊은 역사학자 유바다가 문제 삼는 건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지반이다. 그는 자신의 박사논문인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에서 전근대와 근대, 동아시아와 서구의 국제질서를 ‘단절’이 아닌 ‘연속’의 시각에서 새롭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쪽 분야에선 퍽 이례적으로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나온 논문이 아니고, 그래서인지 기존 학설에 반하는 놀라운 내용들이 많다. (저자도 이를 상당히 의식한 듯한데, 자세한 건 뒤에서)
많은 사람들은 주권국가만을 국제사회의 유일한 행위자로 인정하는 서구의 ‘주권국가체계’를 완전무결한 ‘법칙’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주권국가체계는 특출난 개인이 고안해낸 수학공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근대 서구라는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탄생한 역사의 산물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혹은 여러 명망가들이 모여 “이렇게 합시다”하고 결정한 게 아니었기에 근대 서구의 국제질서는 굉장히 많은 ‘예외’들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유럽과 서남아시아에도 수많은 제국과 제후국, 공국이 산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법 바이블’이었던 『만국공법』이다. 1836년 미국의 휘튼이 저술한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한문으로 번역한 『만국공법』은 주권국가 간의 평등을 제창했고, 이는 동아시아 각국이 서구열강의 무력침탈에 저항하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만국공법』은 주권국가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국제법적으로 애매한 지위를 갖는 제국의 속국에 대한 상세한 용례 역시 담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만국공법』은 봉건적인 관계에 영향을 받는 국가로서 번속(藩屬, Vassal State)과 진공국(進貢國, Tributary State)을 규정하고 있는데, 봉건적 관계에 얼마만큼 구속되느냐에 따라 주권국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예컨대 나폴리 왕국은 교황에게,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의 바르바리 국가들은 오스만 튀르크에게 명목상 예속되어있지만 이들은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반면 1840년 런던조약이 체결된 이후의 이집트는 똑같은 진공국이었을지언정 오스만의 율법과 조약의 구속을 받았으므로 불완전한 주권을 누리는 ‘반주지국(半主之國)’이었다. 
이처럼 번속과 진공국은 국제법상 상당히 애매한 개념이었다. 번속이 곧 반주(半主)요, 진공국이 곧 자주(自主)인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번속과 진공국은 점차 완전한 주권을 누리는 독립국으로 ‘상승’하거나, 보다 많은 제약을 받는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식으로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였다. 하지만 청에게는 어찌됐건 서구 국제법에 의거해 조선을 비롯한 조공국의 지위를 확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었다.


청이 전근대 조공질서와 근대 국제법 질서를 연결 지을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오스만과 러시아의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체결된 1878년의 베를린조약이었다. 이 조약을 통해 오스만의 지배를 받던 불가리아는 진공국으로 지위가 격상했고,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게 되는 등 일정한 주권을 부여받았다. 허나 여전히 오스만이 종주권을 쥐고 있었기에 불가리아는 결코 완전한 독립국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은 불가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불가리아가 주권국임을 내세워 러시아의 입김을 차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베를린조약의 결과는 거의 실시간으로 청국 엘리트들의 귀에 들어갔다. 1878년 일본에 주재하던 청국공사 하여장은 베를린조약을 한문으로 번역해 톈진의 이홍장에게 전달했다. 비상한 두뇌와 탁월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인 이홍장은 베를린조약의 가치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이 조약대로라면 청과 조선의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를 근대 국제법질서 위에 안전하게 ‘연착륙’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일본과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지키면서도 이에 따른 청의 부담은 최소화하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이홍장은 곧장 조선 조정이라는 ‘공식채널’과 영의정 이유원이라는 ‘비공식채널’을 통해 오스만(土耳其)의 사례를 들어가며 조약을 체결할 것을 거듭 권유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김홍집에게 건넨 것도, 임오군란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한 것도, 갑신정변 이후 통리조선통상교섭사의(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라는 관직을 주어 원세개를 조선에 파견한 것도 모두 베를린조약에 의거하고 있었다. 청은 분명 종래의 방식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이는 엄연히 국제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홍장을 비롯한 청국 엘리트들이 세계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제국을 보전하기 위한 최선의 방도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 기민성! 그 명민함! 이홍장은 실로 19세기의 대정치가요, 동양의 비스마르크다. 외교에 관해서만큼은 흔히 라이벌(이라기엔 나이차가 좀 나지만)로 비교되곤 하는 이토 히로부미에 견줄 바가 아니다. 만약 이토가 이홍장의 절반만큼이라도 식견이 있었더라면 조선을 식민화하자는 다른 원로들의 결정을 그리 무력하게 따라가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청이 국제법을 활용하여 조공국 조선과의 관계를 정당화했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저자 유바다가 기울인 노력이다. 기존연구는 하나같이 1880년대 청의 조선정책이 ‘모순적’이었다고 비판했지만, 저자에게 ‘모순’이란 ‘이해불능’을 좋게 포장한 말에 불과했다. 따라서 저자는 『만국공법』을 샅샅이 훑어 근대 국제법도 동아시아의 조공국에 해당하는 Vassal State와 Tributary State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작은 실마리를 붙잡고 온갖 사료를 뒤진 끝에, 저자는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당안관에서 공개한 『외교당안』에서 하여장이 총리아문에 보고한 베를린조약의 한문 번역본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사소한 의문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끝까지 파고든 저자의 집념이 놀랍고, 또 존경스럽다. (저자의 눈물겨운 여정은 한국역사연구회 홈페이지의 「나의 논문을 말한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댓글에 링크첨부)
물론 논문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저자가 서울대 외교학과로 대표되는 기성학계와 자신의 연구를 철저하게 구분 지으려다보니 생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크게 세 가지 정도를 꼽아보려 한다. (下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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