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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Feb 16. 2020

식민지배의 ‘보편성’, 소농사회의 ‘특수성’

『식민지 시대 대만은 발전했는가』

“대만은요, 일제에겐 처음 산 핸드폰 같은 거에요”


 지인이 대만여행 중 가이드에게 들었다는 이 말처럼 일제의 대만 식민지배를 극명히 보여주는 비유가 또 있을까? 1895년,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대만과 펑후(澎湖) 열도를 할양받는다. 가장 눈독을 들인 요동반도는 러시아의 간섭으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만큼 사실상 유일한 전리품이었다. 이에 더해 아직도 자신을 노란 원숭이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서구열강의 코를 눌러주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식민지 대만을 ‘성공’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깟 섬 하나에 왜 막대한 돈을 쏟아 붓느냐며 식민지 포기를 요구한 국내의 반발을 찍어 누르면서까지 대만 경영에 ‘올인’한 이유다.     

 

청일전쟁기 일본의 대만 점령


 과연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대만은 제국의 미운오리새끼에서 화려한 백조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사실상 대만총독이나 다름없었던 민정장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의 묘수로 대만은 식민지경영 10년만인 1905년 재정자립을 달성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온난한 기후의 대만은 사탕수수농사에 안성맞춤이었기에, 이내 당업(糖業)은 제국의 효자사업으로 떠올랐다. 대만은 식민지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균형적이고 균혜(均惠)적인 발전을 경험했고, 이는 ‘내지’와의 경쟁을 촉발하지도 않았다. 제국 일본과 식민지 대만은 그야말로 ‘호혜적인’ 관계였다.  


식민지 시대 대만 총독부


 대만의 이러한 ‘번영’을 근거로, 그간 서구 학자들은 일본의 식민지배는 서구의 그것과 다르다며 그 ‘특수성’에 주목해왔다. 심지어 ‘진보적’ 지식인인 노엄 촘스키조차 일본은 서구와 달리 식민지들을 경제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서구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특수성’에 대한 믿음은 뿌리가 깊다.   


노엄 촘스키와 야나이하라 다다오

 

 하지만 대만사 연구자 커즈밍(柯志明)은 일본 제국주의를 서구와는 다르다고 여기는 시각이야말로 식민지배의 ‘보편성’을 실감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의 책 『식민지 시대 대만은 발전했는가』는 일찍이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로부터 이어지는 수탈론의 입장에 서되, 탄탄한 실증을 기반으로 ‘수탈’과 ‘근대화’의 복잡한 얽힘을 드러내는 역작이다.     


커즈밍의 『식민지 시대 대만은 발전했는가』


 일본이 청으로부터 대만을 막 넘겨받았을 무렵, 최대의 현안은 오랜 시간 묵혀온 복잡한 토지문제였다. 비교적 늦게 중화질서에 편입되었다는 특성상, 청의 중앙조정은 대만을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현지의 유력자인 간호(墾戶)에게 징세와 치안유지를 일임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며 간호 밑에서 땅을 부쳐먹던 소작농인 전호(佃戶)가 실질적인 토지소유자로 등극해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간호의 권리는 점차 유명무실해졌으나, 그렇다고 그 ‘명(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간호는 간호대로, 전호는 전호대로 불만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이 프랑스와 일본의 위협에 직면해 푸젠(福建)으로부터 대만을 독립시켜 별도의 성을 설치한 1880년대에 이르면, 법적인 토지소유자인 대조호(大租戶, 간호에서 유래)와 실질적인 토지소유자인 소조호(小租戶, 전호에서 유래)의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 당시 여타 동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만 역시 소농사회의 심화에 따른 중층적 토지소유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대만의 중층적 토지소유

 

 제아무리 무능해도 이런 문제를 아예 모른 체 할 수는 없었기에, 청 조정은 유능한 관료인 유명전(劉銘傳)을 대만순무(臺灣巡撫, 성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여 지세제도를 개혁하게끔 독려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비록 이빨 빠진 호랑이일지언정 그간 대만의 행정을 책임져왔던 대조호의 반발이 만만찮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소조호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도 아니었다. 이들이 대조호에게 납부하던 지세를 완전히 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지지도 얻지 못한 유명전의 지세개혁은, 비록 훗날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받을지언정 결과적으론 실패했다.     


대만순무 유명전과 민정장관 고토 신페이

 

 그러나 대만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일제는 청처럼 대조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 또한 갖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제는 반대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찍어 누르는 한편, 대조호를 남의 노동에 기생하는 ‘봉건적인’ 대지주로 몰고 감으로써 여론전에서도 승리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뒤이은 지세개혁을 통해 소조호는 ‘사실상의(de facto)’ 토지소유자에서 ‘법적인(de jure)’ 토지소유자로 인정받았다. 조선이나 대만이나 소농사회의 완전한 정착은 식민통치자인 일제가 중층적인 토지소유를 ‘정리’함으로써 이루어진 셈이다.     


 일단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자, 흥미롭게도 대만의 토지소유는 계속해서 ‘영세화’의 길을 걷는다. 저자에 따르면 기존 연구에서 주장하는 토지소유의 ‘집중’이란 결코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굉장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흔히 ‘자본주의’ 하면 으레 떠올리곤 하는, 수탈을 통한 원시적 축적이란 대만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토지소유의 측면에선 말이다.     


 어째서 대만에선 우리의 ‘통념’과는 반대되는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근대 이전부터 사적 소유에 대한 관념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집착 역시 강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만과 기후조건이 비슷한 네덜란드령 자바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바 역시 식민권력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었으나 대만과 달리 대부분의 토지는 공동체의 소유였고, 사적 소유라는 관념은 미미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 자바에는 결국 여타 동남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에서 쉬이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들어서고 말았다.     


무엇이 대만과 자바의 차이를 낳았는가?

 

 반면 대만의 소농가정은, 차야노프(Chayanov)의 말마따나 혹독한 ‘자기착취’를 통해 끝끝내 자기 땅을 지켜냈다. 뒤집어 말하면 자본의 입장에선 그냥 작은 땅뙈기 한 뼘만 내주고 소농가정으로부터 얼마든 이윤을 뽑아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토지만 보장받는다면 얼마든지 제 살을 깎아먹을 수 있는, 경제논리에서 약간 비켜난 독특한 존재였다. 요컨대, 식민지 대만에선 ‘소농사회화’와 ‘자본주의화’가 함께 진전되었다. 시장에서 수출용 봉래미(蓬萊米)를 팔고 자신들이 먹을 저품질의 재래미를 사오는 소농가정의 모습은, 당시 대만에선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칼 맑스와 알렉산드로 차야노프

 

 이처럼 ‘자본주의화된 소농사회’인 대만에서 일제가 가장 주력했던 사업은, 앞서 말했듯 당업(糖業) 즉 사탕수수 농사였다. 식민통치 초기 일제는 대만의 농업을 생계작물인 재래미 생산과 수출작물인 사탕수수 생산으로 재편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주 교활하게도 두 작물의 가격을 연동시켰다. 1905년 성립된 악명 높은 미당비가법(米糖比價法)이다. 사탕수수의 가격을 계속해서 낮게 유지하는 동시에, 사탕수수를 생산하는 자농(蔗農)이 유일한 대체재인 재래미로 쉽게 옮겨갈 수 없게끔 강제하는 절묘한 수였다. 덕분에 쌀과 설탕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내리며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했고, 대만농민의 생활수준 역시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그간 많은 학자들이 대만 경제의 특질로 꼽은 ‘미당상극(米糖相克)’의 본질이다.     

 

이른바 '미당상극'

  

 상황이 바뀐 건 1920년대 중반부터다. 일본의 급속한 공업화로 ‘내지’의 쌀 수요가 높아지며 대만에서 수출용 봉래미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미와 수확시기(11월~이듬해 2월)가 겹치는 조선미와 달리, 대만의 봉래미는 정확히 일본의 보릿고개에 수출되었기에(6월~10월) 아무런 견제 없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자연히 그동안 재래미를 재배해오던 대만의 많은 소농가정은 하나 둘 봉래미로 작물을 바꾸며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개량종 봉래미의 등장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그 결과, 그간 농민의 임금을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도구였던 미당비가법이 이번에는 정 반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쌀과 설탕의 가격을 연동시켜놓았기에 봉래미 가격이 올라가며 설탕수수 가격 역시 올라갔던 것이다. 게다가 설탕의 경우 가공과 유통을 일본 자본이 장악했기에 통제가 용이했던 반면, 쌀은 대만의 토착 정미업자인 토롱간(土礱間)이 꽉 쥐고 있었으므로 총독부가 손을 쓸 수도 없었다. 많은 서구 학자들이 예찬한 식민지 대만의 균형적이고 균혜적인 발전은, 사실 총독부가 제 꾀에 넘어간 결과였던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전시통제를 이유로 미곡전매제를 실시하기 전까지, 총독부는 쌀과 설탕의 가격이 함께 오르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봉래미를 재배하는 논

 

식민지 대만에서 발생한 아이러니를 통해 저자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분명 소농사회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관철된 식민지배의 ‘보편성’이었으리라.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눈이 가는 건 아무래도 ‘보편성’보다는 ‘특수성’ 쪽이다. 그것이 오로지 대만만의 성격이 아니라,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가 공유하는 ‘보편적 특수성’이기에 더욱 그렇다. 가령 오늘날 온 가족을 동원해 어떻게든 인건비를 아끼려는 한국의 자영업자들은, 어쩌면 ‘자기착취’를 통해서라도 제 땅을 사수하고자 안달이었던 소농가정의 후예는 아닐까? 어디까지나 망상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달리 높은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장기지속하는 소농사회의 유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의 자영업자는 소농가정의 후예가 아닐까?

 

 아쉬운 건 그간 한국에서 이 소농가정의 후예들을 결집시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보려는 시도가 전무하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소농가정은 필요하다면 얼마든 제 살을 깎아먹어가며 ‘존버’할 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랬기에 일본 자본도 대만의 소농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플랜테이션을 만드느니 그냥 내버려두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물론 일본 자본은 구태여 소농과 충돌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들을 착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소농가정의 이러한 강인함은, 당연하겠지만 두 가지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 만일 뜻 있는 이들이 소농가정을 독려해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개혁적인 정당을 결성했다면, 이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맞서는 유력한 제3세력으로 우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치경제학자 김종철이 『금융과 회사의 기원』에서 이야기했던, 기본자산제를 통해 만인이 든든한 ‘밑천’을 갖는 소자산가의 사회를 꿈꿔볼 법도 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협동조합인 한살림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끝끝내 혈연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한 소농가정은 그 에너지를 오로지 가족의 출세에 쏟아 부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으로 비로소 자기 것이 된 토지는, 대부분 아들들 대학 뒷바라지나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가게를 여는 밑천으로 쓰였다. 그 결과는 기껏 공부시켜놨더니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장남에 분통을 터뜨리는 노부모, 그리고 오늘도 온 식구가 총동원돼 불철주야 일하는 자영업자 가족들이다. 


소농사회가 만든 한국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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