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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Feb 09. 2020

재밌는 이야기, 어쩌면 ‘팩트’만큼 중요한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한반도의 고대국가 중에서도 가야는 유달리 신비로운 이미지가 강하다. 일단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네 번째’ 나라라는 사실부터가 어딘가 비밀스럽고 애잔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가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했고, 해상무역을 주요 업으로 삼았다. 자연히 땅이나 파먹고 살던 농업국가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개방적이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심지어 가야는 여섯 나라의 연맹으로 이루어졌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반도에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중세풍 판타지 속 도시동맹을 떠올리게 하는, 정말이지 ‘힙’한 설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야는 그야말로 ‘덕질’을 위해 만들어진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의 고대국가 중에서도 가야는 유달리 신비로운 이미지가 강하다

 

 이러한 ‘가야 판타지’의 결정판은, 아마도 허왕후 신화일 것이다. 인도 아유타(阿踰陁國)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가 왕비가 되었다. 허왕후가 김수로왕과 낳은 아들 열 명 중 한 명은 아비를 이어 가야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일곱은 산으로 들어가 신선 혹은 부처가 되었다. 딸 둘은 동쪽으로 건너가 일본에 나라를 세웠으며, 오빠 장유화상은 가야에 불교를 들여왔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가야는 건국신화마저 ‘힙’하기 그지없다.


허왕후 신화는 '가야 판타지'의 결정판이다

 

  하지만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의 저자 이광수는 허왕후 신화란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물론 지역과 민족을 막론하고 건국신화란 다 어느 정도 뻥이 섞여있다는 점에서, 굳이 가야의 허왕후 신화만 끄집어내 면박을 주는 건 좀 너무하다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저자가 애써 이를 비판하는 이유는, 유독 허왕후만 ‘신화’가 아닌 ‘역사’ 속의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고조선의 단군은 천신과 짐승 사이, 고구려의 주몽과 신라의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기에 애시당초 진짜라고 믿을 수가 없다. 반면 허왕후는 그런 ‘미신적인’ 요소는 일절 없는데다 상당히 구체적이기까지 해서 역사를 좀 안다싶은 사람도 혹하는 것이다. 바로 이 ‘그럴싸함’을 이용해먹고자 사람들은 허왕후 신화에 살을 붙여 제 욕망을 채워왔고, 대중은 대중대로 여기에 속아주며 ‘가야 판타지’를 충족시켰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광수의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저자에 따르면, 허왕후 신화의 원형은 신라 혜공왕 대(재위 765~780) 김지정의 난(780)이 일어나 김유신계가 모조리 숙청당한 뒤 처음 등장했다. ‘패밀리’의 구성원 대다수가 처형당하거나 육두품으로 강등되는 위기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김유신의 뿌리인 가야의 위대함을 찬양함으로써 결속력을 다지고 열패감을 보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게 『개황력(開皇曆)』 혹은 『개황록(開皇錄)』이고, 이는 고려 문종 31년(1076) 편찬된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모본(模本)이 된다. 승려 일연이 그 『가락국기』를 참고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지은 건 이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뒤이다.     

 

김유신 가문으로부터 시작된 허왕후 신화는 일연의 손을 거쳐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갖췄다

 

 승려 일연의 손을 거친 허왕후 신화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불교색 짙은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애초에 김유신 가문에 의해 ‘창작’되었을 때만해도 허왕후는 그냥 바다 건너 어디메에서 넘어온 존재였다. 그러나 일연은 허왕후의 출신지를 아유타국으로 둔갑시켰다. 아유타국이란 힌두 최고의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사리유(Saryu) 강변에 위치한 힌두 제1의 성도(聖都) 아요디야의 음차로, 그저 신화 속의 도시일 뿐이다. 오늘날 북인도 웃따르쁘라데시(Uttar pradesh) 주에 아요디야라는 도시가 있긴 하지만, 허왕후가 김해 앞바다에 닿았다던 서기 48년 무렵 이 도시의 이름은 사께따(Saketa)였다.

 

 한때 번영을 구가했으나 『라마야나』의 최종 편찬이 이루어지던 5~6세기경에는 몰락한 ‘황성옛터’가 된 사께따는, 이 무렵 비로소 『라마야나』의 성도 아요디야로 불리기 시작한다. 그랬기에 5세기 초에 인도를 다녀온 법현은 『불국기』에 사께따(沙祗)만 달랑 언급한 반면, 7세기 중반에 인도를 다녀온 현장은 아요디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요디야, 음차해서 아유타(阿踰陁)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도시보다는 불교의 나라 인도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였고, 허왕후 신화에도 정확히 그러한 의미로 삽입되었다. 천축국(天竺國)이라 했으면 그래도 좀 허구 같았을 텐데, 하필이면 현존하는 도시인 아요디야에서 왔다고 해서 쓸데없이 사실감을 높인 셈이다.


허왕후가 김해에 왔다는 서기 48년 아요디야는 존재하지 않았다

 

 허왕후와 김수로왕이 결혼한 곳에 452년 왕후사를 세웠다거나, 풍랑을 만난 허왕후가 아유타국으로 다시 돌아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가지고 간 덕에 무사히 가야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모두 거짓이다. 통일국가를 이루지도 못한 가야가 백제와 신라보다 100년 앞서 불교를 받아들일 턱이 만무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랬다 해도 흥국(興國)이나 흥복(興福), 흥륜(興輪)처럼 이데올로기적인 이름이 아니라 시조의 결혼 따위를 기념하는 이름을 사찰에 붙이는 건 어불성설이다. 파사석탑 역시 기이한 돌을 숭배하는 김해 지역의 풍습에 따라 만들어진 돌무지가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올 때 가지고 온 석탑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저자는 추측한다.    

 

왕후사와 파사석탑 모두 허구에 불과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허왕후 신화는 불교라는 틀을 넘어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욕망을 투사하는 장으로 ‘진화’했다. 그 시작은 성리학의 확산과 발맞춘 ‘족보 붐’을 타고 가문의 격을 높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소스를 물색하던 양천허씨 집안이었다. 조선 중기의 유력한 권력자였던 허엽(1517~1580)과 허적(1610~1680)은 모두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재임 중 수로왕릉을 크게 보수했다. 김수로왕을 추켜세움으로써 그의 아내인 허왕후 역시 역사 속 인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허왕후가 여성이기에 성씨를 물려줄 수 없다는 ‘페널티’조차 그가 열 아들 중 두 명에게 허씨 성을 잇게 했다는 민간설화를 끌어옴으로써 ‘해결’했다. 물론 허적의 12촌 형인 허목이 『양천허씨족보서(陽川許氏族譜序)』에 적었듯, 양천허씨의 시조는 허왕후가 아니라 고려의 개국공신 허선문이었다.


허적과 허목은 양천허씨의 시조를 각기 다르게 기록했다

 

 사찰이라고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오늘날엔 흥국사로 이름이 바뀐 김해 명월사는 증수과정에서 허왕후의 오라비 장유화상과 관련된 기와가 나왔다며 신도들을 현혹했다. 아예 이름부터 장유화상을 연상시키는 장유사는, 사찰이 왕후사 터에 지어졌다고 자랑스레 비문에 기록했다. 왕후사는 허왕후와 김수로왕이 식을 올린 곳에 세웠다고 일컬어진 사찰인데, 앞서 보았듯 이는 명백한 날조다.    

  

명월사사적비와 장유화상기적비


 이른바 ‘이성’과 ‘합리’의 시대라는 근현대에 접어들고도 허왕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은 도무지 식을 줄 몰랐다. 아동문학가 이종기는 탐사문 형식의 소설인 『가락국탐사』에서 허왕후가 북인도의 아요디야에서 서기 20년경 출발해 몇 년 뒤에 태국 아윳티야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48년 음력 5월에 마침내 김해에 왔다고 주장했다. 1977년 발표한 『가야공주 일본에 가다』에서는 허왕후에게 열 아들뿐 아니라 두 딸이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은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고 이야기했다.


아동문학가 이종기

 

 물론 그는 어디까지나 아동문학가고, 저자가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이런 작업을 했다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버젓이 학자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들이 이종기의 상상을 고대로 베껴와 마치 사실인 양 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고고학자 김병모는 서울대-옥스퍼드라는 탑티어 학벌을 무기삼아 이종기의 주장을 교묘히 자신의 연구 성과로 둔갑시켰다. 그는 200년도 채 안된 수로왕릉의 쌍어문이 아요디야 시의 공식 문장이라거나, 단청의 요상한 그림이 인도에서 신성시하는 코끼리라고 주장한다. 전부 이종기의 소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옮겨온 것이다.


유사역사학자 김병모

 

 김병모의 ‘발랄한(!)’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허왕후 집안은 중국 사천성 보주(普州) 출신으로 인도로 건너가 꾸샨국을 세웠고 그 일파가 아요디야로 이주했으나 전란에 휘말려 고향인 보주로 돌아온 뒤 서기 48년 김해의 금관가야에 당도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허왕후는 결혼예물로 운남·사천의 명산물인 차나무 씨앗을 가져와 가야에 차문화를 널리 전파했단다. 아, 이토록 아찔한 ‘트랜스내셔널’함이란!     


아, 이토록 아찔한 '트랜스내셔널'함이란!

 

 정치권 역시 김병기를 비롯한 유사역사학자들의 재롱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유력한 김해김씨 정치인인 김종필과 김대중은 1999년 4월 29일 김해숭선전춘향대제에 자신을 허왕후의 후손이자 아요디야 왕손이라 주장하는 미슈라(Mohan Pratap Mishra) 씨를 초청해 주한 인도 대사와 함께 허왕후릉에 참배하게 했다. 사실 대다수의 김해김씨와 마찬가지로 김종필과 김대중 역시 조선후기 언제쯤에 족보를 구입한 평민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말이다.


 전 국민의 판타지로 떠오른 허왕후 신화는, 급기야 본국 인도로 역수출되기까지 했다. 2002년 아요디야시에 검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멋을 낸 허왕후 탄생 기념비가 들어섰다. 당시 인도의 집권 여당이었던 극우 인도국민당의 적극적인 후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5년 7월에 개최된 허왕후 관련 국제 심포지엄 역시, ‘위대한 인도’를 알리려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에게 한국정부가 놀아난 꽃놀이패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을 찾은 미슈라와 인도를 찾은 영부인 김경숙

 

 저자 선생님껜 죄송한 얘기지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허왕후 신화의 ‘왜곡’은 분노나 안타까움보다는 오히려 감탄과 놀라움을 자아낸다. 본디 아주 보잘것없었을 한 줄의 이야기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살이 붙고 개연성을 갖춰가며, 끝내 그럴싸한 ‘역사’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허왕후 신화의 역사는, 역사란 곧 저마다의 욕망에 의해 끊임없이 첨부, 생략, 변형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묻게 된다.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 진영에 ‘팩트체크’만으로 대응하는 기존의 전략은 과연 유효했던가? 엄밀한 사료비판의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어차피 첨부, 생략, 변형이 이야기의 운명이라면, 사료를 기반으로 하되 보다 재밌고 풍요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유사역사학의 ‘구림’을 만천하에 까발릴 순 없느냐는 것이다. 요컨대, 젊은역사학자모임의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만큼이나, 곽재식의 『역적전』 역시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만큼이나『역적전』 역시 중요하다

 

 물론 이 작업은 전문 역사학자들에게 맡길 수 없다. 일단 그들은 너무 바쁘다. 무엇보다 좋은 연구자라 해서 언제나 좋은 이야기꾼인 것도 아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한 얘기지만, 저자 선생님의 필력은 유사역사학자 김병기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 애초에 재미를 염두하고 쓴 책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두 사람의 재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에는 이미 역사를 소재로 재밌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이 여럿 있다. 소설가 곽재식과 이문영, 만화가 굽시니스트와 박시백 등이 그들이다. 전국의 수많은 역사학과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다 ‘전문적으로’ 육성할 수는 없을까? 학내 구성원의 반발을 깡그리 무시하고 기왕에 ‘역사문화콘텐츠학과’로 이름을 바꾸었다면, 그에 걸맞은 새로운 인재라도 길러내야 한다. 그게 갑작스런 학과 통폐합과 명칭 변경으로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길이다. 


곽재식, 이문영, 굽시니스트, 박시백같은 이야기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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