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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Feb 02. 2020

침묵하는 기독교, 의화단의 나비효과?

『의화단과 한국 기독교』

 한반도 역사에서 (중원과 만주를 포괄하는) 대륙의 존재는 ‘상수’에 가까웠다. 중원의 역대 왕조는 별달리 먹을 게 없었던데다 알아서 납작 엎드리기까지 했던 한반도를 대체로 건드리지 않았지만, 일단 중원에서 뭔 일이 터졌다하면 그 불똥은 무조건 한반도로 튀었다. 고조선, 백제, 고구려, 고려가 그렇게 대륙의 불길에 휩쓸려 멸망했다. 그 뒤를 이은 조선 역시 국토의 세 면이 바다라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다 끝내 임진년의 참극을 맞은 반면, 대륙과 이어진 나머지 한 면만큼은 언제나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가 있기에 유달리 ‘자주’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웬만한 대륙의 변고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X변수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푸대접을 넘어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사건이 있으니, 바로 의화단 운동이다.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기치로 북중국을 휩쓸고 한때는 서태후의 지지까지 등에 업었으나 끝내 8개국 연합군의 총탄에 스러진 이 ‘영적인 복서들(The Spirit Boxers)’은, 그간 한국에선 미지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저 러시아가 의화단 토벌을 이유로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러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짤막한 설명만 전해질 따름이다. 좀 더 파고들면 깜냥도 안 되면서 출병카드를 만지작거렸다던 고종의 ‘웃픈’ 일화 정도를 찾을 수 있겠다.     


한국에서 의화단 운동은 '러일전쟁의 원인' 정도로만 취급될 따름이다

 

 하지만 역사학자 이혜원이 보기에 한반도 역사에서 의화단 운동은 결코 ‘러일전쟁의 원인’ 정도로 자리매김 될 수 없다. 원말의 홍건적이나 명말의 모문룡 일당만큼은 아닐지언정, 청말의 의화단 역시 이 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반(反)서양, 구체적으로는 반기독교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의화단 운동은 한반도 기독교의 나아갈 길을 사실상 결정지었다.     


 이혜원의 책 『의화단과 한국 기독교』는 일본과 미국으로부터의 영향만을 중시하던 그간의 풍조에서 벗어나 중국, 구체적으로 의화단과의 관계 속에서 한반도 기독교의 역사를 새로이 써내려간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 혹은 ‘동아시아사’는 불가능할지언정 ‘세계사/동아시아사 속의 한국사’는 충분히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는 확신을 안겨주는 책으로, 논문 모음집임에도 마치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계획된 양 탄탄하고 짜임새가 있다.      


이혜원의 『의화단과 한국 기독교』


 중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그것이 소수의 신앙을 넘어 보다 광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 19세기 중반 이후이다. 1844년 7월 청은 미국과 맺은 망샤조약(望廈條約)에서 조계지 내에서의 예배당 설립을 보장했고, 같은 해 12월 도광제(道光帝)는 이금(弛禁, 기독교 금지령의 해제)을 허가하는 조서를 내렸다. 비록 북경의 천주당 몇 곳을 내줌으로써 중국 내륙에서의 선교를 막아보려는 ‘예방적 조치’였을지언정, 천주교가 사교(邪敎)가 아닌 엄연한 정교(正敎)로 인정받은 것이다.     

 

톈진조약


 이윽고 1860년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중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중요한 전기를 맞이한다. 개신교와 가톨릭, 정교회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을 뿐 아니라 허가증만 발급받으면 외국인일지라도 자유롭게 중국 내륙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 교파의 선교사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중국 각지에 믿음을 퍼뜨렸고, 치외법권의 보호와 발전한 문물이 뒷받침된 결과 1900년에 이르면 개신교와 가톨릭은 세례교인만 각각 10만 명, 72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했다.     


중국에서 기독교는 빠르게 확산됐다


 기독교가 중국에서 보여준 경이로운 활약상은, 그러나 그만큼의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의 향촌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공묘(孔廟)와 문묘(文廟)를 중심으로 행해진 제례와 마을축제에 기독교 개종자들이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용부담 역시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종교란 개인의 사적인 믿음이 아니라 사회를 규율하는 거대한 체계였던 만큼, 어쩌면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거창하게 세계관 충돌까지 갈 것도 없이, 외국인 선교사가 누리는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제 잇속을 챙기는 일부 중국인 역시 이웃들의 공분을 샀다. 기독교는 어느새 중국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 그 자체와 동일시되고 있었다.     


중국 내 기독교도와 비기독교의 갈등은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1898년, 오랜 시간 쌓여온 갈등이 마침내 폭발했다.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의 갈등이 유독 심했던 산둥(山東)에서 무술단체 대도회(大刀會)와 비밀 종교결사 백련교(白蓮敎)가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기치로 의화단(義和團)을 결성한 것이다. 본래 서양 사교에 맞서 중국의 전통과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게 목표였던 의화단은, 마침 발생한 대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대거 유입되며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가진 민중봉기로 거듭났다. 이들의 에너지는 금세 산둥을 넘어 화북, 만주, 내몽골로 뻗어나갔고, 한때는 제국의 수도 베이징까지 장악하는 등 엄청난 위세를 자랑했다.     


의화단의 선전물

 

 흥분도 잠시, 1900년 8월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며 의화단은 이내 ‘정리’되었다. 누군가는 이들을 반세기 넘게 중국에서 오만하게 군림해오던 서양에게 한 방 먹인 유쾌한 ‘혁명투사’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북중국에 거주하던 기독교도에게 의화단은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는 메뚜기 떼에 불과했다. 개신교 선교사 188명과 신도 1만 9000여 명이, 가톨릭 선교사 47명과 신도 3만여 명이 의화단의 무자비한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 의화단은 당시 놀랄만한 성장세를 보이던 중국 기독교계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패퇴하는 의화단

 

 북중국 평원에서 일어난 폭동의 여파는 저 멀리 남중국 해안지대까지 닿았다. 중국 최남단인 광둥(廣東)에서도 겁에 질린 신도들이 교회와 학교에 나가지 않고 선교사를 방해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오늘날까지도 ‘중원’과는 물리적·정서적 거리감이 강한 광둥이 그랬을진대, 황해와 요동만 거치면 바로 대륙과 연결되는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비록 1985년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독립’을 이뤘을지언정, 이번에도 한반도는 의화단이라는 X변수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는 Y변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역시 도망 온 피난민들이었다. 서양인 선교사들과 중국인 신도들이 의화단을 피해 바다로, 육지로 밀려들어왔다. 일종의 ‘난민캠프’가 들어선 인천항과 평안북도는 낯선 풍습과 언어의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저 사람이 들어오기만 한 게 아니었다.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농업이나 건설업에 종사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고향에서 일어난 변란 소식에 예정보다 일찍 대륙으로 떠났다. 한국 성공회의 경우 영국 해군의 요청으로 의료 선교사들을 대거 중국으로 파견했고, 그 결과 서울에 있는 둘 뿐인 병원이었던 성마태병원과 성베드로병원 모두 문을 닫았다.      


몰려드는 피난민들로 인천항은 북새통을 이뤘다

 

 물리적 충돌 또한 잇따랐다. 8개국 연합군에 격퇴당해 만주로 패주한 의화단과 청나라 군대의 패잔병들은 일단 이 지역의 한인(韓人)교회를 공격했다. 1884년 호러스 알렌이 최초의 정주(定住) 선교사로 한반도 땅을 밟기 5년 전인 1879년 이미 첫 삽을 떴고,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최초로 간행하는 등 여러 면에서 앞서나갔던 만주 한인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의화단의 마지막 물결에 휩쓸린 셈이었다. 평안북도 의주, 함경북도 삼수, 갑산을 비롯한 국경지대에서도 의화단과 청의 패잔병들이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켰다. 급기야는 의주 군수 이창권이 청국 비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만주에서 간행된 최초의 한국어 성경

 

 이처럼 대륙으로부터 낯선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고 이들을 둘러싼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한반도엔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비기독교도는 우리도 중국처럼 서양을 몰아낼 수 있다는 흥분에, 소수의 기독교도와 선교사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것이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북쪽 평안도에서는 동학당이, 남쪽 경상도에서는 활빈당이 들고 일어나 기독교 척결을 외치고 다녔다. 제주에서 가톨릭 신자가 300명 넘게 살해된 1901년의 신축교안 역시 직접적인 원인은 가톨릭을 믿던 마름의 가혹한 수탈이었지만, 저자는 그 정도의 대규모 학살이 일어난 건 의화단의 영향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분석한다.   

  

신축교안의 참상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의화단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최대의 사건은 1900년 11월의 도륙밀지사건(屠戮密旨事件)일 것이다. 비록 언더우드의 기지와 알렌의 노력으로 미수에 그쳤지만, 몇날 며칠에 일제히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도륙하라는 고종황제의 가짜밀서가 전국 각지에 유포되었던 이 사건이 현실이 되었다면 그 피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지금까진 내장원경 이용익과 평리원재판장 김영준의 이름으로 밀서가 배서, 유포되었던 만큼, 당연히 이들이 사건의 주모자라는 해석이 정설로 자리잡아왔다. 하지만 저자는 두 사람이 고종의 총애를 입었던 데다 사건 후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은 기록이 없다며, 이들은 그저 이름을 도둑맞았을 뿐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용익과 언더우드

 

 그렇다면 도륙밀지사건의 진정한 주모자는 누구인가? 특정할 순 없지만 의화단 운동에 영향을 받은 반기독교세력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당시 한반도에 주재하던 선교사들이 하나같이 도륙밀지사건과 의화단의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1900년 가을과 겨울은 한반도가 의화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날조된 밀지 말미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모든 전봇대를 파괴하라”는 명령 역시, 중국의 기를 억누르는 모든 전선과 철도를 파괴하려던 의화단을 모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다 건너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친 의화단의 엄청난 에너지, 그 가공할 폭력성에 세계 선교사 사회는 일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그 충격은 극동의 야만성에 대한 경악이 아닌, 지금까지의 선교방식에 대한 진지한 회의와 성찰로 선교사들을 이끌었다. 대표적으로 1900년 9월 21일, 미국과 캐나다를 대표하는 개신교 교파 32개의 대표가 뉴욕에서 모인 초교파 선교회의에서는 하루 빨리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지를 안정화하되, 본국의 힘을 선교에 이용하거나 중국 정치에 개입하지 말 것을 결의했다. 또한 이들은 부패한 중국 지방 관리가 죄 없는 빈민들을 쥐어짤 우려가 있다며 선교사의 사망과 고통에 따른 위로금마저 청구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로 1901년 중국과 한국, 필리핀, 태국 등을 방문한 아서 브라운 역시 놀라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는 선교사들이 외국인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현지의 각종 송사에 개입함으로써 중국인들의 공분을 샀다며, 중국에서의 선교는 철저한 정교분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브라운은 광대한 중국을 서양인 선교사만으로 복음화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미국 교회가 유럽으로부터 독립했듯, 중국 교회 역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으로 목사를 길러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서 브라운

 

 이러한 브라운의 제안은 곧바로 한반도 선교에 반영되었다. 1900년까지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가까운 미래에 별도의 신학교를 세울 계획은 없다”고 단언하던 장로회 선교사들은, 브라운의 한국방문 이후 입장을 바꿔 이듬해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같은 해 9월 새문안교회에 모여 연합공의회를 개최한 한국의 네 장로교회는 “대한(大韓) 나랏일과 정부 일과 관원 일에 대해 도무지 그 일에 간섭 아니하기를 작정”했다며 정교분리를 천명했다.     


새문안교회

 

 수많은 선교사와 신도들이 무참히 살해된 초유의 사태 앞에서, 미국 기독교계는 결코 분노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의 민중이 기독교에 갖는 적개심을 이해하고자 했고, 그간의 잘못을 냉정하게 반추했다. 이를 토대로 미국 기독교계는 ‘정교분리’와 ‘현지인 목회자 자체 양성’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진보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시대의 진보는 다음 시대의 퇴보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일부를 제외한) 식민지시기 한국 기독교계의 침묵은, 결국 브라운의 보고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아닐까? “교우를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랏일 보는 단체가 아니요 또한 나랏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라는 한국 장로교 연합공의회의 결의는, 총독부의 지배를 합리하화는 그럴싸한 알리바이는 아니었을까? 식민지시기 내내 기독교가 천도교에 맥을 못 추었던 것 역시, 전자와 달리 후자에겐 어쨌거나 자신들이 주도하는 국가에 대한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평양에서 신사참배하는 장로교총회대표들


 브라운은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불의를 참지 못한다고 보았고, 청교도혁명이나 미국혁명처럼 그 에너지로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킨 사례 역시 얼마든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의 ‘정치’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그 ‘방향’을 고민할 수는 없었을까.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필요할 때만 요긴하게 써먹는 ‘정교분리’,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등장한 전광훈 같은 이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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