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by 나들

설거지를 끝내며 서둘러 앞치마와 고무장갑을 벗었다.

넓지 않은 집을 종종거려 매트를 가지고 나와 거실에 던지듯 펼쳤다. 휴대폰 구글킵에 저장해 둔 영상을 열었다. 지난주 인스타에서 우연히 발견한 ‘5분으로 뱃살타파’ 영상. 쉬운 동작 낮은 문턱이 마음에 쏙 들어 정착한 지 나흘째다.


머지않아 헐떡거리고 있는 내 옆으로 아이들이 보인다. 열한 살 쌍둥이 아들 둘은 앉은 건지 누운 건지 같은 각도 같은 자세를 한 채로 맟은편 티비 화면을 향하고 있다. 여섯 살 때부터 시작해 일상이 된 영어 영상 시간이다.

티 안나려 애쓰면서 공들였던 '시작'이 꿈만 같다. 이제는 알아서 굴러가며, 저희가 좋아서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다행이기도 감사하다. 엄마는 부럽기도 하구나. 좋겠다, 너네는.

부러운 얘네들은 지금, 요즘 꽂힌 유튜브 채널 영상을 보며 까르르 까르르 둘 다 숨이 넘어가는 중이다.


각자 ‘요즘의 무언가’에 정착한 나와 쌍둥이 사이로 열다섯 살 딸이 막 지나간다.

입이 궁금하다며 냉장고를 열더니 체리를 발견한 그녀는 급격히 환희에 찼다가 급격히 새침한 표정을 하고는 동생들과 엄마에게 각각 몇 개씩 먹을 거냐고 묻는다. 어느 새인지 혼자 체리를 조물조물 씻어 세 개의 접시에 곱게도 나눠 담아 각각 건넨다. 엄마 아빠가 늘 씻어서 주던 방식으로 그렇게 똑같이.

나는 또 갑자기 콧잔등이 뜨거워진다. 요즘 자꾸만 눈물이 왈칵거리네. 열심히 팔다리를 팔딱거리던 터라 다행히 티는 안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럼 이제 체리 먹으면서 숙제해야지!” 혼잣말을 크게 하는 편인 소녀는 자기 몫의 체리 접시를 안고는 방으로 총총 들어갔다.



삑삑삑 삑-

남편이다.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 늦은 남편이 들어왔다. 부시럭 부시럭 소리는 어김없다. 거나하게 늦었을 때 남편들은 아빠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나는 같은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던데, 어릴 때 우리 아빠가 그랬고 내 남편이 그렇다. 볼이 적당히 발개져서는 아이스크림이 든 봉다리를 달랑달랑 들고 들어오는 남편을 보니 꼭 작년에 돌아가신 우리 아빠같다.


거실의 아들 둘과 방에서 나온 소녀까지 “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하고 즐거워한다. 그 와중에 아이스크림은 제각기 다른 종류다. 개인 취향을 떠올리며 하나 하나 찾아 집어 모으고 있는 볼빨간 아저씨를 상상한다. 딱 요 정도 취했으면 귀엽다.




퇴근해서 같이 저녁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의 세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 우리가 모두 같이 있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또 아주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한다.

아이들이 더 어릴 때도 그랬다. 문득문득,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충만하게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 때때로는 우리를 질투한 누군가가 이 소소함마저 빼앗아 갈까봐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새삼스럽게 나는 가족들을 안아보았다. 슬금 빠져나가려는 어느 꾸러기까지 엄마의 권력으로 꼭 껴안았다. 지금 다시 스며드는 그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애먼 것이 우리의 지금에 들어올 틈이 없도록, 더 더 꼬옥.


만끽하고 감사하는 것만으로도 '순간'은 충분히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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