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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Jun 13. 2023

나의 신규시대

“일 년 만이네.”



인사담당자이자 동료인 직원과 밖에서 점심을 먹고 함께 청사로 올라가는 길. 긴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저 건물, 아침마다 여러 생각으로 마주하던 이 장면에서 말했다.

휴직한 지 일 년을 한 달 앞둔 날, 인사 상담 건으로 그곳에 다시 들르게 되었다.


전(前) 부서에서 야근 메이트였던 그가 옆자리에서 대꾸한다.

“야아, 진짜 너무 한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일 년씩이나 발길을 똑 끊냐.”

나도 그도 깔깔 웃었다.

튀어나간 내 말이 이상한 감회를 잔뜩 머금은 게 부끄럽던 참에 농반 진반으로 받아준 그가 고마워서, 가 내 웃음의 반이었다.


출산으로 이어지는, 누구라도 그러려니 하는 자연스러운 육아휴직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그리하여 결정에 소요된 고민의 크기만큼이나 작정하고 옹골차게 보내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제 겨우 일 년이 되어갈 뿐인데 수년이 흐른 기분이다. 타임머신 같은 것을 타고 아주 멀리 온 것 같기도 하며, 한편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않을 것 같은 저 청사가, 생경하다.

이상하고 낯선 공감각 탓인지(아니면 늙어서인가,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는데) 오래전 그날, 임용되어 처음 이 오르막을 걸어 오른 그때가 불현듯 떠오른다.     






15년 전 8월 6일 아침 7시 반. 인근 지역에서 버스를 타고 온 나는, 어제 막 태풍이 쓸고 간 그 작은 도시에 내렸다. 청사로 걸어가는 길은 흙바닥은 기본이요, 밤새 다 빠지지 못한 빗물 오수와 여기저기 쓰러진 나뭇가지, 날아다닌 쓰레기 등으로 처참하고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임용식을 위해 예를 갖춘 나의 복장과, 그것을 신경 쓰며 조심조심 내딛는 걸음이 어느 순간 민망하고 부끄러워졌다.


대회의실에서 임용식을 마치자, 다른 동기들은 저마다 해당 부서에서 누군가가 데리러 왔다. 긴장한 채 두리번거리는 내게 끝내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덜렁 남겨진 어린양에게 인사담당자는 부서를 알려주었다. 계단 어디쯤 붙은 부서 안내도로 찾아 올라가 부서명을 확인했다. 문 앞에서 한 번 두 번 심호흡하는 신규의 모습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았지만 그녀만큼 당차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침에 통과한 거리보다 더 정신없는 현장이 거기 있었다. 어젯밤까지 이곳에 휘몰아친 태풍의 잔재였다. 대충 봐도 팀은 여러 개였는데 어디 업무랄 것도 없이, 복구를 원하는 민원 전화와 사태 파악을 위한 조사로 놀고 있는 수화기가 거의 없었고, 그 전쟁터에서 정확한 정보 전달의 필요로 누구랄 것 없이 목청이 높아져 있었다.

한발 전진도 못 한 채 발과 입을 옴짝옴짝하고 있는 애를 누군가 알아봤을 거다. 그는 얘가 민원인은 아니란 것을 알아봐 주었고 곧바로 배정된 팀으로 떠넘겨졌, 아니 인계가 되었다.      


부족한 인원을 ‘웬’ 일반행정직 신규가 채울 거라는 통보를 ‘우리 팀’은 이미 지난주에 받았을 것이었다. 그런 그들은 지금, 그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밖에 없이 묵직한 존재감의 장벽을 단체로 뿜어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나는 건축직이 아닌 일반행정직이 건축팀에 발령을 받은 최초의 사례였다. 물론 그들도 나도 그 맥락없는 인사의 연유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인재라 할 수 없었다. 아닌 정도가 아니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 팀에 있거나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건축사 또는 건축기사 자격증이 있는 ‘건축직’이었다(나 이후 신규 임용되어 이 팀에 들어온 후임들도 모두 건축과 출신이었다).

관련 자격증은 고사하고, 영어영문학과 전공인 내가 ‘건축’에 대해서라고는 조간신문에 끼어오는 아파트 모델하우스 평면도를 즐겨본 게 전부이니 말 다 했다. 대학 중퇴하고 시험 준비만 하다 들어온 것까지는 모르겠어도, ‘눈치 0단 사회생활 초짜’라는 것을 기존 사회인들은 절망스럽게도 한눈에 알아봤으리라. 그러니 인사팀과의 통보와는 별개로 얘가 그 자리를 채울 거라는 기대가 일말도 없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죄다 팀장급이다시피 한, 나보다 열댓 살은 위인 다섯 명의 주사님들 틈에 미운오리새끼처럼 끼게 되었다. 빈 책상 앞에 엉거주춤 앉았다. 적진으로부터 사정 봐줄 리 없이 쏟아지는 총알처럼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비었던 자리에 사람이 채워진 걸 자동 감지라도 한 듯 앉자마자 컴퓨터 옆 전화기가 성내듯 울리는 게 신기하고 무섭다. 주사님들 역시 민원 전화로 피해 접수를 하며 내게 전화받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바로 지난주에 끝난 한 달간의 교육원 연수에서 분명 배웠을 텐데. 머리가 하얗다. 여보세요, 라니. 어찌 됐든 수화기를 통해 저쪽에서 들려오는 말들을 얼결에 받아 적었다. 그렇게 종일 수해 피해 접수를 했다. 가르쳐주는 이 없이 바로 실전이었다. 그날 퇴근하여 다시 버스를 타고 귀가한 나는, 저녁을 먹기도 전에 기절했다.

  




인구 4만의 군 단위에 무려 20년 만에 들어오는 아파트를 신축하는 일, 상습 수해 지역을 통으로 이주시켜 주택 단지를 새로 건설하는 일 등이 내가 건축팀에 몸담았던 일 년 반 동안 있었던 일들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뉴스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 일이었고, 솔직히 부모님이 틀어놓을 뿐이거나 혹은 식당에서 밥 먹으면서 귓등으로 듣고 본 ‘남일’이었다. 어마어마하다 못해 무시무시한 그것들을 남일 아닌 업무로써 하나부터 열까지 처리해 가는 선임들을 보며 일기장에 자주,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다만 ‘기라성’은 일본어투이므로 1990년대부터 ‘빛나는 별’로 순화되었다고 한다.)

 ‘빛나는 별’들 틈에서 꽤 오랫동안 나는 송구하고 긴장‘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사이 나의 전화응대는 ‘여보세요’에서 ‘안녕하세요. 건축팀 문박사입니다.’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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