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언서이자 작가인 새벽달과 EBS 입트영·귀트영 강사인 이현석 선생님이 운영하는 <낭독스쿨>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다. 7월에 <명작동화과정>이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했고 마침 7월부터 휴직이었기에 ‘이건 나 하라는 신의 계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청했다. 7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5단계로 구성된 명작동화 영어책을 낭독하는 프로젝트였다. 제공되는 청킹, 강세 가이드와 원어민 음원의 도움을 받아 낭독을 하고 인스타그램에 녹음본을 올려 인증하는 방식이다. 재료가 ‘명작동화’인 만큼 아이와 함께 하는 참가자가 대부분이었고 나 역시 아이와 함께 했다.
헌데 우리 집 아이, 음원 듣는 것에 시큰둥하다. 들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란히 앉아 엄마가 하는 것을 듣는 게 전부다. 음원 듣는 거 싫어? 그래, 그렇다면 엄마가 음원이 되겠어. 아이를 위해 잘하고 싶어졌다. 그게 시작이었는데. 어럽쇼. 이거 재밌다. 욕심난다.
낭독 : 소리 내어 읽음.
영어를 좋아했고 가늘고 길게, 그저 놓지만은 않고 살았지만 본격적으로 낭독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간 해왔던 묵독과는 달랐다. 강세와 청킹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지켜가며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근육이 뭉쳐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부터 오전 내내 낭독 연습을 했다. 내용은 어렵거나 낯설지 않은 ‘동화’였지만 굳은 근육을 푸는 데는 시간과 공이 적지 않게 들었다. 아이가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파트를 나눠 함께 낭독 녹음을 했다. 엄마의 그날그날의 혹독한 훈련의 결과물을 아이는 들었다. 비록 ‘완성’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결과물이겠지만 적어도 옳은 강세와 청킹을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한 달 반이 지났을 때 낭독스쿨에 ‘홈커밍’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프로젝트가 공지되었다. EBS의 장수 영어프로그램 「입이 트이는 영어(‘입트영’)」 의 교재로 낭독 및 인증하는 3개월 과정이었다. 기분만큼은 한창 물이 오른 나는(명작동화에 왜 엄마가 탄력 받는데) 역시 망설일 것도 없이 뛰어들었다.
와따. 이건 또 ‘어나더레벨’이었다. 명작 동화는 강세, 청킹에 익숙해지는 과정으로 내게는 낭독 입문반이었다면, 입트영은 심화반인 셈이었다. 고난도의 어휘가 첫 장벽이었고, 후루룩 지나버리는 음원의 빠른 속도에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구독자 사연으로 구성된 내용들은 실생활에 근접하여 무척 공감되고, 그래서 재미가 있었다. 또한 낭독하기에 입트영은 한층 간지 나는 재료라 할 수 있다. ‘마, 이기 으른의 영어다, 마!’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았다.
명작동화를 시작하며 처음 한 달을 오전 내내 연습했다면, 입트영은 아이들 케어하고 어쩌고 하는 시간 빼고 정말이지 왼 죙일을 그렇게 했다. 완성하지 못한 날 저녁에는 집안 길목에 오늘 분을 펴놓고 왔다 갔다 하며 쓱 보고 한 번씩 중얼거렸고, 사마 씨는 “엄마 봐라, 또 쏼라쏼라한다.” 하며 놀렸다.
생소하거나 애매하게 알았던 어휘는 영영사전에서 찾아 예문 위주로 노트에 정리했고, 녹음본을 업로드하면서 그날 주제와 관련된 나의 사연을 짧은 글로 보태기도 했다. 이렇게 저렇게 더하고 빼가며 나만의 방법을 만들어갔다. 낭독만이 아니라 오랜만에 공부 같은 공부를 했다.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것은 분명 휴직 중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다. 더 없을 기회를 새로운 배움에 푹 빠져 보낼 수 있어 매일 감사했다.
표지색 때문에 ‘빨강이’라 부른 <여가생활 편>을 그렇게 세 달을 완주했다. 이 루틴에 완전히 탄력 받은 나는, 해가 바뀌기 직전 새로이 개강한 ‘초록이’ <일상생활 편>으로 세 달을 또 달렸다.
이제 완전히 초보자로서의 어려움은 조금 벗었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과 맞닥뜨렸다. 연말연시가 걸쳐 있는 데다, 아이들의 겨울방학과 겹친 것이 최대 강적이었다. 가족과, 특히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하루가 채워졌다. 낭독 인증은 점점 밀려갔다.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만든 루틴인데.
그러나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한번 맞본 완주에의 성취감은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과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아이들과 삼시 세끼 해 먹고, 냉장고 문 수시로 여닫는 아이들에게 간식 내어주고, 틈틈이 도서관 들락거리며 방학을 채우는 와중에도, 짬을 내 ‘나의’ 영어책을 펴고 음원을 들었다. 제법 많이 밀려있었지만 비슷한 처지의 낭친(=낭독친구)들로부터 힌트를 얻어, 오늘 낭독과 밀린 낭독 이렇게 두 개를 하루 세트로 하여 따라잡기 시작했다.
열심히 낭독하고 있는 엄마에게 때로 아이가 다가와 ‘오늘 주제가 뭐예요? 나 그거 대화문 할래요’ 하며 Dialogue 낭독에 대화 상대로 참여하기도 했고, 인증 영상에 그날그날의 일상 사진과 짧은 글을 올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렇게 부수적으로 얻는 효과도 즐거웠는데, 본 목적인 영어 낭독에 있어서도 그간 허투루 보낸 게 아니구나, 하는 발견이 있었다.
몇 날 며칠을 밀린 낭독으로 박차를 가하는 중, 어라, ‘입이 풀린다’는 말이 이런 건가 보다? 좀처럼 입에 붙지 않던 문장들도 ‘흘러간다’는 느낌으로 읽고 있고, 발음과 강세도 전보다 자연스럽다. 그동안 제때제때 그날 미션을 성실히 해온 것은 분명 루틴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차곡차곡 쌓였을 것이다.
어떤 능력이 발전할 때 계단식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꾸준히 하긴 하는데 늘고 있는지 당최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다 그 노력이 누적되어 어느 지점에서 훅 올라가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잔뜩 밀린 숙제는 스트레스가 되긴 하지만 동시에 그 압박감 ‘덕분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내가 가진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하루하루 꾸준히 하는 것은 그것대로, 못하든 안하든 밀리더라도 그것을 벼락치기로 메꿀 때 또 그것대로,각각의 모양으로 모두 내게 온다. 어떤 방식으로든, 하면, 하면 된다. 어디 낭독뿐이겠냐마는.
아, 이거 뭐 거의 수상소감 발표하듯 다 해놓고 새삼스럽게 부끄럽지만, 기분만큼은 원어민이다.
6월부터 새로운 낭독프로젝트를 또 시작했다.
이른 아침 6시 40분에 생방송으로 강의를 듣고 마찬가지로 낭독하여 인증한다. 그동안 했던 단행본과 다르게 월간지를 교재로 한다는 점과 강의를 EBS 라디오 생방송으로 듣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새해부터 새벽 기상을 하고 있는데 해이해지지 않고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목적이 보태졌다. 이른 아침,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모여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 신선하고 탄산 같은 자극이 된다. 서너 달 쉰 후 오랜만에 시작한 낭독이 정말이지, 재미있다.
낭독 일 년이 된 시점에서 생각하건대 ‘내 사랑’ 빨리 걷기 같은 존재가 되지 싶다. 만병통치약이라 할 수는 없을지언정, 기초 체력을 키우기 위해 놓을 수 없는 유산소 운동. 건강에 더해 마음의 위안과 설렘까지 모두 주는 평생 운동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