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발령으로 등 떠밀려 새로운 팀으로 옮긴 첫날은 분주하다. 임명장 받으랴, 인사하랴, 낯선 자리에 짐 정리하랴 등등. 정신없이 오전을 보내는 와중에도 놓치지 않고 확인하는 한 가지가 있다.
"여긴... 점심 어떻게 해요?"
인수인계를 하는 전임자 또는 옆자리 직원에게 스리슬쩍 묻는다. 직장인에게 있어 공통 불변의 중요한 사항임을 고려하면 그 질문의 조나 투는 이상하리만치 낮고 조용하며 후미진 뒷골목의 밀회스럽다. 아닌 척 무심한 척해도 숨길 수 없다. 질문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말하고 있다.
점심은 직장생활의 낙이라고. 점심의 즐거움을 생각하며 출근한다고. 견딘다고.
그렇다. 점심시간은 직장 생활의 꽃이다. 8시간을 내리 일하는 건 생각만으로 숨 막히지 않은가. 오전 오후 근무 사이에 있는 건널목 같은 이 시간이 그래서 직장인에게는 숨통이다.
몇 년 전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어떤 연구를 기억한다. 점심시간 전후의 감정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점심시간을 보낸 후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답했는데, 이 응답의 경우 긍정적인 감정 변화의 큰 요인은 '맛있는 음식을 얼마나 여유롭게 먹었는지, 즉 식사 분위기가 어땠는지'였다.
우리나라 직장인 대부분은 사내에서 점심을 해결할 것이다. 여기서 '사내'라 함은 공간과 사람을 모두 포함한다. 구내식당이거나 근처 식당에서(공간), 대개는 팀원들과(사람) 먹을 것이다. 때로는 마음 맞는 동료들과 따로 약속을 할 때도 있겠지만 이렇든 저렇든 '사내'에서다.
점심시간에 우리는 밥만 먹는 게 아니다. 여유로운 대화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질적인 대화는 인간적인 교감을 만들기도 한다. 비록 업무 이야기더라도 경직된 사무실에서 끙끙 머리를 싸맸던 일이 점심을 먹으며 한결 편하게 나누다 보면 생각보다 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기도 한다. 물론 맛집에서 맛있는 메뉴를 먹는다면 금상첨화고. 위에 언급한 '연구에서 점심시간 후 긍정적인 변화를 이끄는 요인'이 바로 이런 상황일 것이다. 이런 경우 점심시간은 오전 오후 근무를 잇는, 또한 동료 관계를 잇는 윤활유가 된다. 딱 이상적인 상황이지만 모든 상황이 같을 리 없다. 저 연구에서 일부 응답자는 점심시간 후 부정적인 감정 변화를 경험한 것으로 답했다.
이 연구 결과를 읽으며 생각한다. 내가 응답자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응하는 시점이 포인트일지 모른다. 그 시점에 어떤 팀에, 어떤 구성원과 함께인지처럼 내가 속한 환경이 분명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그 무렵에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내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무엇인지도 중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점이 지금이라면 내 대답은 아래와 같다.
새로운 팀에서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2년 만의 조직 생활에 열심히 순응하고 있었다.
점심은 어떻게 하느냐는 첫날 내 물음에 옆자리 직원은 팀에서 식비를 모아 같이 먹는다고 알려주었다. 팀 계좌에 십만 원씩 입금했다. 오전 열한 시쯤 되어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 물으면 약속한 듯 ' 아무거나'를 말한다. 반복되는 같은 대답에 나도 예의상 물어볼 뿐, 취향이 없거나 말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내 취향에 따라 메뉴를 정하고 식당을 예약한다. 기호가 분명하고 먹는 기쁨도 즐기는 나여서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은 그다지 큰 일은 아니다. 다행인 것은 아무거나를 말하는 팀장 및 나머지 팀원들은 그야말로 아무거나 맛있게 먹어준다는 것이다.
거기서 이탈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다.
12시가 되면 식당에 간다. 식당에 도착, 메뉴가 나오면 먹기 시작한다. 먹는 소리만 들리는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아무 말하지 않아도 편한, 그런 사이가 '아직' 아니다. 피차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건데도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비슷한 생각인지 누구든 불쑥불쑥 대화를 시도하지만 단답과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는 불어 터진 면처럼 연신 맥없이 끊어지기만 한다.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관계가 있고, 시간이 문제가 아닌 관계가 있음을 떠올리며, 여기 네 명은 어느 쪽일까 혼자 가늠해 본다. 그렇게 어색하고 뚝딱거리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밥을 먹고 돌아온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 삼매경 중이다. 한두 번은 합류했지만 겉도는 대화 주제에 영 빠져들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후 고작 10분이 남았더라도 이어폰을 꽂고 일단 나갔다. 내 취향의 음악이나 유튜브를 들으며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걸었다. 바로 이 10분이 내게 숨통이었다.
그만해야겠다 생각했다.
매일같이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도(어렵지 않지만 좋은 것도 아니다), 어색함을 깨려 애쓰는 것도, 의미 없는 대화를 하며 먹는 것도, 식당까지 왔다 갔다 하고 먹는 것 밖에 한 게 없는데 한 시간이 그냥 사라지는 것도. 복직 2주를 보내고 나서였다.
예전에는 점심시간도 업무시간의 연장인 듯 보냈다. 애초에 '업무시간인가 아닌가'라는 고민조차 없었다. 그러다 3년 전 몸담았던 부서에서 처음 점심시간이 '내 것'이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업무과 과중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자리여서 단 한 시간이라도 스스로 나를 꺼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만 같은 위기감에서 비롯된 자각이었다. 그게 브런치 첫 글이 되었다.
01화 점심시간에는 나가겠습니다. (brunch.co.kr)
휴직 동안 나는 아이들 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알차게 보냈다. 꿈꾸던 것들을 하며 내가 얼마나 이것들을 좋아하는지 절감했다. 한정된 기간이기에 시간을 쪼개가며 더욱 밀도 높게 했다. 이제 원래의 일터로 복귀했다. 그간 해온 루틴이 무너질까 봐, 끊길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막상 닥쳐보니 걱정했던 것보다 오히려 내 안이 단단해져 있음을 느낀다. 꾸준히 해온 것의 힘이 한순간에 스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 가질 수 없다. 놓을 건 놓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한 마음은 더욱 간절하고 강렬해진다.
깨어있는 시간 중 긴 시간 일하고 퇴근 후에는 아이들과 보내는 워킹맘. 그렇다면 내 시간은 어디? 답은 명확해졌다. 점심시간을 사수하라.
즉시 검색에 들어갔다. (충동이라 쓰고 추진력이라 읽겠습니다.) '00 피아노 학원'. 작은 지역이라 성인 레슨을 하는 학원이 딱 두 곳 나왔다. 직장에서 멀지 않은 초등학교 앞으로 바로 상담을 예약했다. 본격적인 레슨에 앞서 선생님이 설문 링크를 보냈다. 열댓 개의 문항 중 끝 무렵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멈칫했지만 고민 없이 답변을 써넣었다.
'도피'
이렇게 점심시간만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으로 도피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