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다 태어나서 처음 고백하고 겪은 실연(?)의 아픔은 예상을 해서 그런지 그렇게 타격을 받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전처럼 도서관과 운동장으로 마음과 몸을 향했다.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논문도 더 열심히 썼다. 그러던 며칠 뒤 저녁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나가려던 나를 갑자기 사감이 불렀다.
“성일 학생 이따가 몇 시에 시간 돼요? 할 말이 있는데?”
“할 얘기요? 이따가 9시쯤에 오는데 그때 괜찮으세요”
“그럼요 그럼 이따가 봐요”
“네 알겠습니다.”
기숙사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으며 불현듯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사감이 왜 갑자기 날 보자고 하는 거지? 무슨 잘못이라고 한 걸까라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날 따로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불안해졌다.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생각난 것이 하나 있다.
며칠 전 실연의 아픔을 달래 주기 위해 방사람들과 함께 몰래 야식과 함께 술을 마셨다. 혹시나 그것이 걸린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만약 술이 걸렸다면 바로 퇴사이기 때문에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을 했다.
결국 하루 종일 고민만 가득한 채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길었다. 불안감을 두 어깨에 메고 기숙사 행정실로 향했다. 사감은 날 보자마자 행정실이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라고 말했다. 그 순간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한소리 듣고 끝날 상황이면 행정실에서 조금 혼이 나고 사유서를 쓰고 끝이 난다. 그런데 밖에서 따로 부른다는 것은 아마도 최악의 상황밖에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쫄아서 소파에 앉아 거실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최대한 잘못에 대한 미안한 태도를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몇 분을 기다려도 사감은 오지 않았다. 행정실을 쳐다보니 누군가와 전화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퇴사를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더 높은 사람(?)과 통화하고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통화하던 사감이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휙 돌리자 불안감은 한층 더 높아졌다.
만약 사감이 어찌 된 거냐고 물어보면 사실대로 말하고 선처를 바라는 길밖에 없었다. 사실 퇴사를 당하면 갈 데가 없었다. 생각은 이어져 4명이서 방을 구하는 볼까 하는 생각과 한 명이 총대를 메고 희생하는 방법 등 다음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거실 바닥에 내 두발 앞에 다른 슬리퍼 두 개가 보였다. 뭔가 싶어 위를 쳐다보니 내 고백을 거절한 그녀였다. 갑자기 그녀가 보였고, 그녀가 갑자기 내게 말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괜찮은 것 같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난 하나도 안 괜찮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왜 하필 지금 여기서 나한테 말하는 건지 몰랐다. 그러곤 내 앞에 계속 서 있는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어.. 뭐지..”
나는 어리둥절했고 그녀 역시 대답을 인지 못한 나를 보며 멀뚱멀뚱했다. 고개를 돌려 행정실을 쳐다봤다. 그제야 사감은 미소로 답을 해주었다.
그제야 사감이 날 부른 이유가 술 때문이 아닌 그녀와 만남을 가지게 해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까맣던 세상과 사라졌던 그녀가 다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서있는 그대로 나는 계속 앉아 있는 그대로 대화를 이어갔다.
“괜찮다는 무슨 말인가요?”
“생각해 보니 만나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저는 아무 연락이 없길래 그냥 차인 줄 알았어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네 뭐가요?”
“사귀어 주는 게요”
“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인가요?”
“그런가요?”
“앗싸~ 나도 이제 여자친구가 생겼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두 손을 흔들며 기뻐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약간 쑥스러워했다. 기뻐한 후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녀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과제가 있다며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녀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드디어 핸드폰에 ‘여자친구’ 라고 저장된 번호가 생겼다. 그녀의 고백을 받은 후 행정실로 찾아가 고마움을 알렸다.
“축하해요! 잘 만나봐요”
여사감의 축하를 받고 바로 내 방으로 향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 내게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녀가 내 고백을 받았다~!나도 여자친구가 생겼다.!!”
다들 시간이 멈춘 듯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정확히 1초 후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을 때처럼 다들 두 팔을 벌려 기뻐했다. 아무 연락 없다가 왜 갑자기 허락을 했는지 궁금해했다. 사실은 나도 궁금했다. 아직은 서로 사귀자고는 말만 주고받았다고 했다. 이날 밤 내 귓가엔 ‘괜찮은 것 같아요’ 란 말이 계속 맴돌았다. 이날 밤에도 우리는 축하의 야식을 먹었다. 하지만 술은 제외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