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15 - 보랏빛 편지
그녀와 사실상 헤어지기로 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주말이 되어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오랜만에 집에 돌아갔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녀와 만나고 고백하고 사귀었던 순간순간들이 마치 한여름의 꿈처럼 지나갔다. 좋은추억임에는 분명하지만 좋은 결과가 아니라 그것이 내내 가슴에 남아 무거운 짐이 되어 무겁게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여니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진희의 안부를 먼저 묻는다.
“아니.. 아무리 맘에 안 드는 자식이 처음 사귄 여자친구라고 하지만 자식보다 여자친구를 안부를 먼저 물어보다니 내 엄마 맞아?”
라고 농담으로 말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헤어졌다는 말을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엄마가 갑자기 웬 편지를 하나를 보여주었다. 진희가 엄마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성일아 이 애는 어쩜 그리 마음 깊으니”
라고 칭찬이 입이 마르도록 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진희는 나 모르게 집으로 엄마와 나에게 각각 한 통씩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아직 짐도 풀지 못한 나에게 엄마는 자랑하듯 진희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전 성일 오빠 여자친구 진희라고 합니다.
오빠랑은 3월에 만나 사귀게 되었어요.
학교에서만 지내는 오빠는 제가 잘 보살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오빠랑 이쁘게 잘 사귈게요.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먼저 편지로 인사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좋은 오빠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엄마는 “애가 참 바르구나”라며 이런 좋은 여자를 어떻게 만났냐며 잘해주라 말하였다. 나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싶지 않아 헤어졌다는 말을 아꼈다. 그리고 내방으로 가 짐을 풀고 있을 때 엄마는 내게도 진희가 보낸 편지가 있다며 전해 주었다. 편지를 받은 나는 짐을 풀다 만 채로 보랏빛 편지지의 내용을 읽었다.
To. 내게 사랑받을 당신
당신 은 언제나 날 웃게 만드네요.
이제는 내게 당신의 웃음이 되어 줄게요
당신이 내게 준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나오는 비목이란 물고기와 같이 우리 평생을 함께 해요.
From. 당신의 웃음이 되어줄 진희가
대략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편지를 읽자마자 눈물이 났다. 그녀는 우리가 사귄 지 100일째 되는 날 진희는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을 담아 몰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진희의 마음조차 모른 채 그녀에게 못되게 한 것도 모자라 시간을 갖자는 애매한 말로 이별을 통보했던 것이다.
보랏빛 편지지에 뚝뚝 하고 몇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을 머금은 보랏빛 편지지에는 보랏빛 향기가 났다. 이때부터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리듯 핸드폰으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마치 우리는 헤어져서는 안되는 사이인 것처럼 말이다.
이제야 당신의 마음을 알았어요.
못다 한 당신의 마음이
내게 와닿았고
아직 못다 한 나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게
이대로는 당신을
떠나보내지 못합니다.
만약 당신의 마음이
나와 같다면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에서 만나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풀던 짐을 다시 가방 안에 담고 곧장 다시 학교로 출발했다. 서둘러 가면 제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빛과 같은 속도로(마음만은) 엄마에게 간다는 말도 없이 서둘러 집에서 뛰쳐나갔지만 지하철은 내 마음과 달리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1시간 반이 지나 그곳에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이 내 숨소리로만 가득 채워졌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드라마를 너무 봤던 탓일까 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때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였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했다. 바로 진희였다. 그날 진희는 우리가 처음 데이트를 했을 때 입었던 보라색 유니폼을 입고 왔다. 다시 한번 보랏빛 향기가 나와 그 안을 감쌌다. 그녀를 보자마자 허락도 없이 와락 껴안았다. 말로는 다하지 못할 진희를 향한 나의 마음에 그동안의 미안함을 모두 포함해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했다.
“사랑해”
“네! 뭐라고요?"
“두 번은 말 못 해.. 사랑한다고”
“치! 다시는 내게 아픔을 주지 마요."
"응"
"나도 오빠 사랑해요”
이날 우린 처음으로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사실 엄마에게도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보다 눈물이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나도 모르게 사랑한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하지만 그때는 저절로 나왔다. <어린 왕자>에서 나온 익숙함을 넘어선 책임감이 가득 담긴 서로에게 필요했던 말이었다. 서로 울었지만 그녀가 다시 내 곁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했다.
나중에 그녀가 내가 말해 주길 내가 시간을 갖자고 말하면서 울고 있는 모습이 못났지만 약간은 귀여웠다고 한다. 분명 이것은 진짜 헤어짐 아니라 연애를 하다 보면 한 번씩은 다 겪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내게 메시지가 왔을 때 자신이 보낸 편지를 이제야 봤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었을 때 한동안 내게 품었던 미움이 가시고 미소를 지었다고 했다.
그날 보라색 유니폼을 입고 나와 함께 다시 한번 배드민턴을 치던 보랏빛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다. 바로 내 아내가 된 것이다. 그날 이후로 본의 아니게 나는 그녀에게 꽉 잡혀 살고 있다는 비밀과 함께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나오는 비목이란 물고기처럼 우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곁에서 함께 하고 있다.
사랑, 기억하고 있나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