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gining of slow life -
“ 천천히 ”
나는 살아오면서 이 단어와는 반대되는 삶만 살아왔다. 항상 '빠릇빠릇' 이란 이 형용사가 나를 표현하는 단어였다. 운동을 할때도 일을 할때도 민첩하게 행동하는 나 였다. 하지만 작년에 얻은 부상 이후로는 내 삶의 모든 기준을 -천천히- 에 맞춰 살아야 하는 인생을 가지게 되었다.
마음껏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없었고, 가까운 도서관에 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극심한 통증에 깊은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며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 활동하는 것을 자제하고 한동안을 집에서만 지내야 하는 생활을 했다.
한순간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집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의 시간과 마음은 공허했고, 아무 열망과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 초라한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꾀죄죄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언제부터인지 날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외부에서 내부로 공격하였다. 화장실에 갈 때면 마주치는 거울 속 낯선 사내가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뭘 봐? 네 꼴을 보니 아주 꼴좋다~”
“넌 지금 아직도 인정 못하겠지?”
“암~ 그럴 거야 못하고 말고.. ”
라고 말하는 듯 내게는 들렸다. 그렇다 나는 내 부상을 부정하고 있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듣는 이와 말하는 사내의 얼굴은 서로 곱지 못했다. 물론 나의 마음도 그의 말도 이쁘지 아니하였다. 누구를 위한 말인지 잘 알고 있어 나는 그 사내가 못내 측은 해졌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내 재활이 그간의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통증이 서서히 줄어드는 기미가 보였다. 의식적으로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의식하지 못하고 한 어느 동작에서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걸 무심결에 알게 되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두려워 부상을 당한 사람은 어느 동작은 잘 취하지 않는데 어쩌다가 무의식적으로 한 동작에서 통증이 감소한 걸 확인한 순간 나의 눈에는 빛이 났다. 그 신호는 내 몸이 준비가 되었다는 걸 말해준 것이다. 하루에 한 번뿐이던 밖에 나가는 횟수를 점점 늘렸다. 하루에 두 번에서 세번으로 의식적으로, 의무적으로 나가 걷는 연습을 했다.
걷다가 힘들어 눈물을 훔친 날도 수두룩 했다. 걷으며 매번 느껴지는 심한 통증에 참을 수 없어 흘린 날도 있었지만, 걷다가 오늘은 조금 더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른 이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싶을 만큼 울며 걸었다. (누군가 그런 모습을 봤다면 크라잉 워커 = 미친놈 라고 말했을 것이다.)
매일 꾸준히 걷는 연습을 해오니, 어느덧 제법 짧은 거리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걷는 걸 연습하듯 나 또한 한발 한발 제대로 걷는 연습을 해야 했고, 걸으며 발바닥으로 전해져오는 길 표면의 모든 감촉과 감각들을 고스란히 느끼며 걸었다. 마치 다른 기관의 감각은 마비된 채 내 모든 신경은 발에만 분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마웠고, 내 옆을 멋진 속도로 앞지르는 러너들을 보며 그들과 같을 내 미래를 꿈꿀수 있어 고마웠다. 비록 천천히 였지만 다시 걷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제2막인 - 슬로우 라이프- 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