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을 발견하는 일
내가 잘하는 것, 또 내가 좋아하는 것. 바로 사람들의 재능을 발견하는 일이다. 어렸을 땐 이것을 업으로 삼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의 어린 시절 꿈은 작가였다. 글은 언제나 나의 내면세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수단인 것 같았다. 각종 독후감 대회, 글짓기 대회, 논술대회, 백일장에서 늘 상을 받았고, 그다음으로 많이 받았던 상은 미술 대회상이었으니,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관심이 많은 아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어른들은 말했다. “작가가 되고 싶어도, 일단 대학부터 가야 한다. 대학에 가려면 잘하는 과목보다 못하는 과목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내가 잘하는 과목들은 그들의 눈엔 마치 점수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고, 못하는 과목만 집요하게 지적하며 “이렇게 공부 안 할 거냐”며 혼을 냈다.
나중에 미국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며 들은 이야기 중 공감했던 것은 이것이다. 미국은 학생이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집중해서 더욱 발전시키라고 하고, 한국은 학생이 못하는 것에 집중해 평균을 끌어올리려 한다는 것. 모두가 평균이 되려다 보니, 각자의 보석을 잃어버린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도 정확하다는 것을, 어린 시절의 내 경험을 떠올리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나는 어른들과 한국 입시제도에 대한 반발로 책 읽기와 글쓰기를 그만두었고 오랫동안 방황했다. 백일장에서 입상했던 내 시를 읽고, 국어선생님이 따로 불러 “네가 쓴 글 다 가져와봐. 그걸로 등단도 시켜줄게. 대학도 보내줄게.”라고 했을 때도 나는 단칼에 잘라버렸다. 한국 교육 시스템에 삐친 마음이 괜히 국어 선생님에게 향했던 것이다. “아니요, 저 글 안 써요.” 그리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미국으로 이민 온 뒤 학부 시절, 영문과 교수님이 내 글을 문학지에 출판해 보자고 해도 “괜찮아요, 관심 없어요.”라고 했다. 마음속으로는, '글은 무슨...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라며, 세상과 내 인생을 비웃으며 외면했다. 돌아보면, 참 오랫동안 삐쳐서 방황했던 것 같다.
지금은 돌고 돌아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어 행복하지만, 가끔은 생각한다. 그 시절, 나를 좀 더 빨리 알아보고 응원해 주는 사회와 문화, 그리고 어른들 사이에서 꿈을 키워왔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하고. 그래서 그 아쉬움과 한을 내 학생들에게는 절대 물려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너는 무엇을 이뤄내지 않아도 이미 존재 자체만으로 빛나고, 너의 내면 안에는 숨겨진 비밀 보석이 들어가 있어.'라고 항상 말한다. 그리고 '너는 언젠가 반드시 네 안에 있는 보물을 발견할 것이고, 그걸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바로 나야.'라는 말로 자신에 대한 확신과, 꿈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주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에게 ‘한이 있어서’라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하다. 학생들 안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뿐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서도 보물을 발견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재능이지? 그걸로 뭘 해 먹고살 수 있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아무나 가지기 어려운 재능이고, 나는 그 재능을 자부심으로 여긴다. 오늘도 학교 부교장과 단둘이 대화하면서, 내가 그녀에게서 발견한 선함과 예쁜 장점들, 그리고 그녀의 장점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야기했더니 부교장은 감격한 얼굴로 “나도 너에게서 많이 배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만약 당신이 나에게서 성장한 부분을 보고 있다면, 그건 전부 내가 당신에게서 훔쳐온 것이다”라고 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따뜻한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마쳤다.
내가 타인의 보석을 찾아내는 것이 남에게는 결코 없는 재능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일을 하다 보면,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 늘 불평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어떤 경우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바뀌지 않는 큰 제도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많은 경우 습관적으로 나쁜 점만 찾고 그 불평 안에서 우월감이나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실 타인의 숨겨진 장점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외모, 학력, 직업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들이고,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누군가는 우러러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얕잡아볼 수도 있는 영역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볼 때,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장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내게는 강점으로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단점이라고 말하는 것도 내 눈에는 그 사람의 가능성과 연결된 ‘다른 형태의 자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흔들리고, 자신을 의심한다. 그때 어른이 아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너는 충분히 빛날 수 있어'라고 말해주고, 그 한 줄기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붙잡아 주는 일은 아이의 미래를 뒤바꾸기도 한다. 진짜 교육은 아이에게 ‘무엇이 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안에 이미 존재하는 가능성을 정확히 보고, 그 가능성이 움츠러들지 않도록 지켜주는 파수꾼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특히 발달차이를 가진 아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보석을 스스로 인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교육자의 눈은 더욱 섬세해야 한다. 어떤 아이는 언어로는 서툴지만 탁월한 시각적 사고를 갖고 있고, 어떤 아이는 사회성이 약한 대신 놀라운 인내력과 집중력을 가진다. 이처럼 발달 특성은 결핍이 아니라 다양성의 한 형태이며, 그 다양성 속에서 보석을 찾는 것이 바로 특수교사의 역할이다.
아이의 능력은 한 번 발견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강화와 보호가 필요하다. 아이가 포기하고 싶을 때, 교육자가 먼저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이 필요하며, 아이가 스스로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믿기까지 곁에서 기다려주는 인내가 필요하다. 결국 교육은 부모나 교사가 이미 가공하여 완성된 보석을 주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삶에서 스스로 원석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공하는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과정이다.
교육자는 아이의 잠재력을 ‘믿어주는 사람’, 그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 믿음이 언젠가는 아이의 자존감이 되어 세상 앞에 단단히 서도록 돕는 사람이다. 이것이 교육자의 철학이며, 내가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잘 찾아냈다. 그것은 나의 멈출 수 없는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데, 사람을 볼 때나 사물을 볼 때 또는 어떠한 현상이나 사건을 마주할 때, 반드시 그 안의 숨은 본질이나 이치를 알아내고 싶어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마치 엔지니어 뇌를 가진 아이들이,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을 분해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의 근본적인 가치와 동기를 분해해 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나의 이 괴상한 사고방식은 주변 사람들 특히, 어른들을 많이 괴롭혔다. 나에게 "왜"귀신이 붙은 것이다.
"왜요?"라는 말을 하도 달고 살아서, 입 좀 다물라며 집안 어른들께 혼난 적도 많았고, "왜요는 일본배가 왜요고! 그냥 하라면 해!"라는 선생님들의 농담 섞인 꾸지람도 자주 들었다. 그러다 보니 책을 통해 나의 "왜요?"의 답을 찾기 시작했고, 어른들이 나의 질문에 답하지 못할 땐, 내가 대신 자문자답하며 나만의 논리를 당당하고 명랑하게 설파했다. 4지선다식 시험문제의 답을 납득할 수가 없으면, 나는 바로 학교 교무실도 찾아갔고, 학원 교무실도 찾아갔다. "이게 왜 답이에요? 3번도 답일 수 있잖아요. 문학에 정답이 어딨 어요? 저는 이 책을 읽고 이렇게 생각했는데요?" "김소월은 그런 뜻으로 이 시를 쓴 게 아니에요. 이 사람의 다른 작품들을 보세요. 이 사람의 일대기를 읽어보세요. 이런 뜻으로 쓴 게 아니거든요!" 처음엔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다가 나의 적극적인 항의에 긴 설전이 오고 가게 되자 결국 말문이 막힌 선생님들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항상, "그냥 외워 이 자식아!"였다.
문학은 수학이나 과학처럼 하나의 ‘옳은’ 결론을 찾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 감정, 사고를 언어로 탐구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독자는 자신의 배경, 감정,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제시할 수 있고, 그 해석이 논리적 근거를 가진다면 모두 타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두고 '이별의 슬픔'으로 읽을 수도 있고, '여성의 주체적 결단'으로 읽을 수도 있으며,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정신'으로 읽을 수도 있다. 셋 다 ‘정답’이라기보다는 문학을 읽을 때, 독자마다 느끼는 의미 있는 해석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학의 매력이고, 우리는 이 매력을 통해 문학의 예술적 가치를 보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입시제도 특성상, 수능, 혹은 교과 과정에서는 부득이하게도 문학을 평가 가능한 형태로 다루어야 한다. 그래서 시험 평가자는 작품의 기본적 맥락, 작가 의도, 문학사적 배경을 기준으로 정답을 정해 둔다. 예를 들어, 수능 문제에서 “이 시의 화자의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은?”이라는 질문은 그 시대적 배경과 시어의 문맥상 공통적으로 수용된 해석을 묻는 것이다. 이건 문학의 ‘유일한 진리’를 묻는 게 아니라, '표준 해석의 정확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문학 자체에는 정답이 없지만, '정답처럼 보이는 해석'은 시대와 교육제도가 임시로 만든 사회적 약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진짜 문학 공부는 시험을 넘어서, “왜 그렇게 읽을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묻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어린 나에겐, 문학을 두고 사회적 약속 같은 이러한 평가가 그렇게 바보 같아 보였다. 진짜 보석을 눈앞에 두고도, 모래밭을 손으로 하염없이 휘저으며 서로 이것이 더 반짝이는 모래라고 우기는 것처럼 말이다. “야 이 바보들아! 이게 보석이라고! 이게 문학이라고! 문학은 이렇게 느끼면 되는 거라고!” 세상을 향해 아무리 외쳐도 다들 귀를 닫고 눈을 가리고 고집스럽게도 모래밭을 휘젓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다 크고 나서 돌아보니, 사실 진짜 바보는 나였지만 말이다. “알아. 근데 그냥 이게 세상사는 방식이야, 꼬맹아. (그러니까 그냥 외워.)“ 어른들이, 선생님들이, 문학을 대하는 방식을 몰라서 그랬겠는가. 사회에 충성하는 젊은 인재를 줄 세워 뽑으려면 문학에도 답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대학에 가려면 그 정해진 답을 시키는 대로 외워서 맞춰야지만 들어가는 것이다. ‘그냥 외워 이 자식아!’에는 그런 철학이 들어있는 말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문학을 있는 그대로 즐기고 느끼고 표현해도, 나를 줄 세우지 않는 교육을 꿈꿨던 것 말이다. 시험 평가자가 정해놓은 정답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고, 나의 예술적 감성과 언어적 논리의 깊이를 가지고 평가할 줄 아는 교육자가 가르치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미국에서 정말 내가 상상만 하던 그런 선생님들과 교수님들을 만났다.
아동발달학을 공부하면서도 방황하던 나에게, 너는 정의롭고 참을성이 있으니 특수교육을 전공해야 한다고 나의 특성을 집어내어 진로를 가이드해주셨던 지도 교수님. 글을 읽는 중간에 숫자가 나오면, 앞에 읽었던 내용까지도 잊어먹게 될 정도로 Math phobia(수학포비아)가 있던 나를 따로 불러서, 숫자도 언어이고, 수식도 문학이라는 말로 나를 수학의 세계로 인도해 주신 수학과 교수님. 영어시간에 발표가 두려워 항상 글로 대신했던 나에게, 문학적 재능을 발견해 주시고, 책을 내보자고 응원해 주셨던 영문과 교수님. 그런 비판적인 사고는 모든 사람들과 나눠서 알게 해야 한다며 매 수업시간마다 발표를 시켰던 철학과 교수님. 네가 나 대신 수업을 진행해도 되겠다며 통찰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해주시던 심리학과 교수님. 어른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는 진심으로 매 순간 참여하는 것이 보기 좋다며 응원해 주신 하이스쿨 과학 선생님. 너의 예술성이 마음에 든다며 부족한 영어실력의 작품 설명도 항상 귀담아 들어주시던 하이스쿨 미술 선생님. 나는 그렇게 많은 훌륭하고 따듯한 선생님들에게서 길러졌다.
물론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이분들 외에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지만, 내가 특별히 이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열심히 가공하는 법을 전수해 주시고, 결국 세상밖에 드러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는 점이다. 정의로움, 참을성, 문학적 재능, 비판적 사고, 통찰력, 진심, 예술성은 표준화된 시험(standardized test)으로는 발견하거나 평가하기가 어려운 영역이다. 특히, 수학과 교수님께서 나의 특성을 발견하고, 수학을 그것에 대입하여, 수식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학인지 내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준 것은 엄청난 감동이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학자이고 참된 스승 아닐까.
나는 쉬는 날이면 우리 아이들에게 집 안에서 ‘보물찾기’를 시킨다. 보물을 찾는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 협동심을 기르고, 문제해결 능력과 논리력을 키우며, 동시에 설렘과 탐색의 재미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그 짜릿한 기쁨과 기분 좋은 놀라움, 그리고 스스로 해냈다는 성취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보물을 숨기는 사람은 영영 찾지 못할 만한 곳에 숨기지 않는다. 구석 깊은 어둠 속에 묻어두고 싶은 것이 아니라, 결국 상대가 찾아주길 바라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다. 그래서 보물은 늘 ‘조금만 노력하면 찾을 수 있는 곳’에 있다. 시선을 아주 조금만 바꾸고, 내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그곳에서 기분 좋은 놀라움이 나를 맞이할 것이고, 예상하지 못한 선물과 보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보물을 찾는 일도 이와 똑같다. 아이들은 때때로 자신의 장점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어떤 재능은 너무 익숙해서 스스로는 보물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른의 안목과 시선이 필요하다. 아이의 적은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을 알아보고 “이거야, 이게 바로 너의 원석이야” 하고 알려주는 것. 그리고 아이가 그 보물을 스스로 붙잡아 빛낼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옆에서 기다려주는 것. 이것이 교육자가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른이 먼저 아이의 보물을 발견해 주어야, 아이도 자기 안의 빛을 믿기 시작한다. 그 믿음이 결국 아이를 세상에서 꺾이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아이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른 자신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꿔야 한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기준, 남들이 만들어놓은 잣대로 아이를 평가하고 키우려 한다면, 아이 안의 보석은 영원히 발견되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잣대를 들고 서 있는 사회에서는, 결국 모두가 비슷한 돌멩이가 되기를 강요받을 뿐이다. 아이 안에 숨어 있는 ‘진짜 보물’을 발견하고 싶다면, 먼저 어른인 당신의 가치관이 달라져야 한다. 가치관이 바뀌어야 눈이 바뀌고, 눈이 바뀌어야 비로소 보석이 보인다. 어른이 가진 시선이 바뀌지 않는 한, 아이의 가능성은 그저 평범한 모래처럼 발밑에 묻혀 버리고 만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 안의 보물을 찾는 동시에 어른 스스로의 시선과 철학을 다시 빚어내는 과정이다. 어른이 바뀌어야 아이도 바뀐다. 그리고 그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교육이다.
내 아이가 운 좋게, 언젠가 현명한 눈을 가진 어른을 만나 그 안에 숨겨진 보석을 발견해주길 바라며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먼저 내가 그런 어른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남들이 이미 다 가진, 물질적 가치관으로 흐려져버린 그런 '뻔하디 뻔-한 동태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지 말고, 빛나는 가능성을 캐내는 '설렘으로 살짝 돌아있는 광부의 눈’을 가져보는 것이다. 보석은 평범한 돌 사이에 숨어있다. 그걸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아이 안에 숨어 있는 반짝임을 가장 먼저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이를 이끌어줄 좋은 어른을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그 ‘좋은 어른’이 되라고. 그 순간 당신의 아이는 또는 학생은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이 스스로 빛을 낼 때까지 곁에서 지켜주는 과정이다. 아이를 ‘평균’이라는 선 위에 맞춰 올려놓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아이 고유의 결을 읽고, 그 결이 부서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를 사회가 원하는 모양으로 깎아내는 조각가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보석을 흙에서 꺼내어 빛이 닿는 자리까지 조심스레 이끌어주는 큐레이터에 가깝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지만 먼저 어른의 시선이 변해야 한다. 어떤 가치관을 가진 어른이 아이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어른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바꾸고,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과 언어를 바꿀 때, 비로소 아이의 가능성은 온전히 보호받는다. 교육은 아이를 변화시키는 작업이기 전에, 어른 자신을 변화시키는 철학적 실천이다. 어른의 시선이 바뀌어야 교육이 바뀌고, 교육이 바뀌어야 아이가 바뀌며, 아이가 바뀌어야 결국 사회가 바뀐다.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을 호밀밭의 파수꾼 속 홀든과 겹쳐서 본다. 어른이 된 뒤에도 마음 어딘가에는 아이들이 세상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다는 홀든의 바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계에 발을 들이며,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저 낭떠러지 끝에 서있는 누군가의 마지막 울타리가 되어주는 어른이 되겠다고. 우리 모두가 같이 협력하여 손을 잡으면, 아이들에게 더 크고 튼튼하고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