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오랜만에 만난 대만, 대만 서점 투어 & 재활용 맥주
빵 부스러기로 만든 지속가능한 맥주
수제맥주를 사랑해서, 어느 도시와 나라를 가건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브루펍이나 양조장에 갈 수 있다면 꼭 들르는 편이다. 대만 가오슝에서 이틀을 보내면서, 오늘 저녁은 어느 바에 가서 맥주를 먹지? 란 생각으로 구글맵을 맥주(啤酒),수제맥주(精酿啤酒)란 키워드로 검색을 했다. 일반 호프집부터 칵테일바, 브루어리 등 다양하게 나오는데 좀처럼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한 가게명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Baked Tipsy"였다. 직역하자면 구워낸 취기, 알딸딸함이었는데 맥덕이자 빵순이이기도 한 나에게 꽤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위치를 보니 가오슝 유명 여행지 보얼예술특구 인근에 있다. 그런데 영업시간이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라니. 술을 파는 곳 치고 좀 짧단 생각이 들어서 리뷰를 보니, 일반 술을 마시는 바가 아니었다. Baked Tipsy는 버려지는 빵 부스러기를 재활용해서 만드는 맥주를 만드는 스타트업이었다.
빵 공장이나 베이커리 등에서 버려지는 자투리 빵 등이 멀쩡하게 버려지는 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맥주' 만드는 것을 택했다. 꽤 그럴듯한 생각의 전개였던 것이 맥주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력한 가설 중 하나가 뜨거운 물에 빵을 넣었더니 맥주가 됐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지역에서 실제로 이와 관련된 양조장 시설 흔적이 있다고 하니 빵과 맥주는 마치 형제사촌과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맥주는 흔히 '액체 빵'이라고 불리지 않는가.
빵 조각을 잘게 부수면 맥주의 주 재료인 맥아로 활용할 수 있는데, 실제로 유럽 일부 지역에선 식빵 자투리 등을 활용해 만든 빵 맥주를 파는 곳이 있다고 한다. 어찌 됐건 이 Baked Tipsy 역시,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해 나름의 대만 빵 맥주를 만들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맥주 1배치 만들 때마다 약 50kg 상당의 빵 조각들이 버려지지 않고 재활용된다고 한다. 맥주 이외에도 그레놀라, 과자 칩 형태로도 만들어 판다.
소셜 임팩트 기업과 스타트업, 맥주란 키워드는 모두 내가 관심 있어하는 분야인 만큼, 이곳은 꼭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양조장이나 펍은 아니고 보얼예술특구에 Baked Tipsy 제품을 살 수 있도록 작게 상점을 낸 것처럼 보였다. 오늘 밤엔 이 맥주를 꼭 먹어봐야겠단 생각으로 보얼예술특구에 도착했으나. 맙소사. 하필 화요일은 휴무였다. 내일 이곳에 오기 위해 다시 보얼예술특구에 올 시간은 없을 거 같은데. 혹시 이 맥주를 구매할 수 있는 다른 판매처가 있을까 해서 문의하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찾았다. 그런데 들어온 최근 게시물이 '대만 츠타야 서점에서 Baked Tipsy를 구매할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일본의 츠타야 서점이 대만에도 있는지 몰랐는데. 위치를 확인해 보니 타이베이에 몇몇 지점이 있었다. 어차피 타이베이에 곧 돌아갈 예정이므로, 그때 들러서 사면되겠다고 결심했다.
츠타야 서점과 대만의 성품서점(誠品書店)
일본 여행을 가 본 사람들이라면, 혹은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츠타야 서점에 대해서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라이프스타일과 서점을 결합한 비즈니스 모델로, 관련 서적과 글 등이 한 때 유행처럼 소개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스타벅스 등 카페와 경계가 없는 것도 신기했는데, 책과 그와 어울릴 만한 책 이외의 상품 등을 함께 비치하거나 곳곳에 편안하게 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판매하는 공간 비즈니스"는 곧 츠타야 서점을 가리키는 일종의 대명사 같은 수식어였다. 지금은 츠타야 서점을 영향을 받아 비슷한 공간이 한국을 포함해서 많은 국가에 생겼지만, 확실히 츠타야 특유의 일본 감성과 디테일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그런 츠타야 서점이 대만에 지점이 있는지 조차 몰랐던 이유는 성품서점(誠品書店, eslite bookstore) 이 있기 때문이다. 대만 성품서점은 대만에서 가장 큰 서점 브랜드이며, 일본 츠타야 서점과 상당히 유사한 편이다. 일본 츠타야 서점이 1980년대 초반, 성품서점은 1989년대쯤 최초 설립되었다고 하니 아마 성품 서점이 츠타야 서점에 영향을 좀 받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성품서점 역시 서점과 책 읽는 공간, 책 이외의 제품 등을 경계 없이 배치해 서점을 구경하는 재미를 더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대만은 특히 일러스트로 된 소설책 표지가 감각적이어서 종종 책은 사지 않더라도 책 디스플레이 구경하는 맛이 있어 성품 서점이 보이면 습관처럼 들어가게 된다. (매번 책 구매 욕구가 뿜뿜 올라오지만, 대만 번체를 보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자제한다)
이번 대만 여행에도 각각 다른 성품 서점을 한 6~7군데 들렀던 거 같은데 츠타야 서점이 대만에도 있다는 소식은 꽤 흥미로웠다. 그래서 타이베이에 도착해 숙소에 체크인하자마자, Baked Tipsy 맥주도 살 겸, 가장 가까운 츠타야 서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츠타야 서점 옆 코워킹 스페이스, 쉐어라운지
대만 송산 공항 근처인 송산 인근에 숙소를 잡았는데 마침 송산역에 츠타야 서점 송산지점이 있었다. 쇼핑몰 입점 형태라 츠타야 서점은 규모가 꽤 작은 편이었다. 츠타야에서 만든 코워킹 스페이스 공간인 '쉐어 라운지 Share Lounge'와 함께 있다. 쉐어 라운지는 시간제 이용권을 구매하고 이용하는 방식인데, 공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코워킹 스페이스와 달리, 편안한 카페 분위기였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카페 같은 공간'이라며 홍보하는 코워킹 스페이스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정말 카페 같은 분위기) 모르고 보면 츠타야 서점에서 하는 카페인가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각각 분리된 목재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이나 책을 읽는 등 저마다 업무를 하고 있었고 그 위엔 커피잔과 간식 그릇 등이 있었다. 탕비실로 보이는 공간엔 약 12개~15개 정도 남짓되는 간식 디스펜서와 음료 기계, 캔 음료 보관고 등이 높여 있다.
1시간 기준 180위안(7700원 선), 이후 30분 초과 시 90위안씩을 내는데 이 이용권 가격은 평일과 주말, 피크타임 등 시간에 따라 할인되기도 한다. 하루종일 이용하고 싶다면 약 640위안 (28000원~30000원) 정도 지불하면 된다. 내부에선 수백여 권의 비즈니스 관련 서적을 자유롭게 읽고 배고프면 간식이나 음료, 커피 등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 1~2시간 정도 일할 공간이 필요한 디지털 노마드나 프리랜서들에게 좋겠는데? 란 생각이 들었다. 츠타야 서점은 코워킹 공간을 만들어도, 위워크 같지 않게 만드는구나. 서점은 서점 같지 않게, 코워킹 공간은 업무 공간 같지 않게.
빵 부스러기로 만든 맥주를 마신 제 소감은요?
츠타야 서점에서 Baked Tipsy 맥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환경, 지속가능성이란 테마 하에 여러 브랜드 상품 등을 디스플레이하고 있었는데 그중 누가 봐도 '맥주'가 가운데 놓여 있어 대번 집어 들었다. 프레즐 빵 부스러기로 만든 'Recyled Beer'라고 표기되어 있다. 제일 좋아하는 빵 중 하나가 독일 프레즐인데 이걸로 만들었다니. 오히려 좋아. 기대감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도수는 약 8도인데 심지어 맥주 스타일도 내가 사랑하는 세종(Saison)*이었다.
세종(Saison): 벨기에 농부들이 만들어 마셨던 농주로, 흔히 탄산감과 과일향이 풍부한 여름 에일로 묘사된다. 국내 유명 브루어리에서도 종종 세종을 만드는 곳이 있지만 대중적이진 않아, 있으면 무조건 시키고 보는 최애 맥주 스타일 중 하나.
이 맥주를 맛본 것은 한국으로 귀국 후 3일째 되는 날이었다. 항상 해외에서 수제 맥주병을 사서 한국에 귀국하고 3일 이내 그 맥주를 마시며 여행 정리하는 것이 나만의 리추얼이었다.
대만 여행 다녀온 후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체육관 가서 운동을 막 마치고 온 참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맥주를 열어 잔에 가득 따랐다. 색깔은 프레즐을 연상시키는 짙은 색상이었다. 그동안 내가 마셔온 세종들은 대부분 연하고 밝은 노란색이 많았는데. 다소 의아했지만, 일단 한 모금 마셨다.
세종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했고, 무난한 에일 마시는 느낌이었다. 다소 단 맛이 강하고 묵직해서 내 취향엔 조금 안 맞았던 것이 아쉬웠다고 할까. 그래도, 빵 부스러기 재활용 맥주인 것을 모르고 마셔도, 대부분 조금 단 맛이 있는 에일 맥주라고 여길 거 같다. 생각해 보면 이 맥주를 만든 스타트업은 '맛있는 맥주'를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닌 '지속가능성을 위한 제로 웨이스트 맥주'를 만드는 것이니, 보통의 맥주 맛만 내더라도, 성공한 게 아닐까.
당장 이 맥주가 내 입맛에 맞는 건 아니지만, 버려지는 자원을 재활용해 이러한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에 큰 응원을 보내고 싶다. 일단 '지속가능한 맥주' '제로웨이스트 맥주' 생산이 가능하다면, 누군가는 또 그 맛의 레벨을 올리며 '진짜 맛있는 지속가능한 맥주'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다. 혹시 알까. 먼 훗날, 식량 자원이 부족해질 때 빵 부스러기로 맥주 만들어 마실 날이 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