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아띠뜰란
*이 글은 앞의 글과 일부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앞의 글을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그 남자는 폰이 없었다
S : 아, 난 폰이 없어서 여행할 때 모든 걸 다 계획 짜야하는 게 은근히 어려워
나 : 와, 정말 여행할 때만 폰을 안 들고 다니는 거야?
S : 아니, 고등학생 때 아이폰 초창기 모델 써보고. 이후로 쭉 폰을 아예 사지 않았어
나: 와, 넌 정말 진짜 삶을 살아가는구나
캐나다 퀘벡에서 온 한 커플을 만났다. 우린 같이 세묵 참페이(Semuc Champey)란 곳 전망대에서 만나 함께 물놀이하는 계곡까지 내려갔다. 그중 남자 S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는데, 신기하게도 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요즘 세상에 폰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왜 폰을 사용하지 않냐고 되묻진 않았다. 그저, "폰으로 연결되는 세계가 아닌, 진짜 세상을 살아간다"는 의미로 칭찬한 후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폰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계획 없이 즉흥 여행하는 나에겐 폰 없이는 도저히 힘들 거 같다. 숙소 예약도 당일에 이동하는 버스 내에서 하기 일쑤 였고, 구글맵 없으면 길 찾는 걸 힘들어하는 길치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전에 아이폰 3gs 쓰던 시절, 다른 나라에 와이파이가 그리 흔치 않을 땐 폰을 가방 안에 쑤셔놓고 종이 지도를 구해 도시를 활보했는데 요샌 여행지 종이 지도를 구하는 게 더 어렵다. 설사 구한다 하더라도, 다들 대략적인 위치만 파악하지 그것만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찌 됐건 이 대화를 나눌 때만 하더라도, 난 내가 폰 없이 여행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도도 나를 동정했다.
폰을 도난당한 채 목적지 숙소 체크인한 후 난 허기가 져서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아이폰을 못 찾을 거 안다.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뭔가 먹고 싶은데 당장 현금을 뽑을 방법이 막혀, 최대한 가진 현금을 아껴야 했다. 어디 레스토랑에 갈 처지는 안되고, 빵집에서 주로 샌드위치 등을 만들 때 쓰는 식사빵(Bollio) 3개를 샀다. 원래는 1개를 내일 아침에 남겨두고 오늘 2개 먹을 생각이었는데, 그냥 맨 빵만 씹자니 2개로 부족해 그냥 3개를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웠다. 그러다가 잠시 화가 났다. 내 폰을 훔친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비싼 밥 먹으며 자축하고 있진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날이 어둑해졌다. 머리 좀 식힐 겸, 조용히 호숫가 산책을 하고 싶었다. 집에서 걸어서 5~7분이면 작은 선착장을 낀 호수가 나온다. 걸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과테말라에서 새 폰을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등을 고민했다. 호수로 향하는 데크길이 있는데, 저녁이라 아무도 없어 그냥 그곳으로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호수를 둘러싼 화산과 산, 그리고 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들 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한 15분 정도 그 자리에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았는데 흠칫했다.
10대로 추정되는 껄렁해 보이는 양아치 3명이 나를 보며 히죽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빛이 없는 어두운 데크 끝에 서있는 나는 물에 뛰어드는 것 말고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촉이 좋지 않았다. 이들은 단순 호기심으로 날 쳐다보는 게 아니다란 그런 불길한 촉. 아니나 다를까, 그들 중 한 명이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슬며시 손을 들어 무언가를 보여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칼 같았다. 다행히 식칼은 아니군. 기껏해야 커터칼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커터칼도 상당히 위험했지만)
근데 그 순간이 무섭다기 보단, 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오히려 폭발 직전에 이들이 나를 약 올리기라도 한 듯 가진 거 다 내놔라는 하는 상황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달까. 그들은 나에게 가방을 내놓으라는 손짓을 했지만 난 조용히 목소리를 깔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스페인어로 싸늘하게 말했다.
"나 오늘 여기 오는 길에 강도당했어. 폰도 없고 돈도 없어. 대체 너넨 뭘 원하는데"
나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난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목소리에 약간 떨림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초점 잃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깔고 말하니 이들은 오히려 당황한 듯싶었다. 그냥 장난으로 떠본 걸까. 혹은 정말 마음 약해진 걸까. 이들은 한쪽으로 비켜서더니, 가라는 손짓을 했다. 난 서둘러 그곳을 걸어 나왔고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 만에 폰도 도둑 맞고, 언덕에서 구르고, 10대 양아치 강도도 만나다니. 악재는 한 번에 몰려온다고 할까. 문득, 차게 식은 설렁탕을 앞에 두고 울고 싶어졌다.
소매치기 보란 듯이 여행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일찍 자버렸다. 혹시 모르니 신용카드 일시 정지도 해야 하는데 (아이폰 내 카드 정보를 저장해 둔 메모가 있었다. 혹시나 이들이 이를 해킹하고 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아이패드로 은행 앱 사용이 불가하다. 맥북으로 접속했는데 다들 경험하는 것처럼, 은행 카드사 홈페이지 접속부터 만만치 않다. 심지어 해외 IP라 그런지 차단된 건지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자야겠다. 큰일이 발생하면 일단 잠으로 회피하는 게 내 성향이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흥분한 상태에서 이것저것 하는 것보단 잠을 잔 뒤 다소 침착해진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선호한다.
저녁 9시에 잠들었는데 중간중간 계속 잠에서 깼다. 오전 1시에 깬 이후엔 잠이 오지 않았다. 오전 2시까지 억지로 자려고 뒤척이다가 어렵사리 잠에 들었다. 오전 6시. 난 일단 아이클라우드에 업데이트된 최종 사진과 영상 파일이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내가 잃어버린 파일과 메모가 뭐가 있나 정리했다. 약 3일 치 여행 분량의 사진과 영상은 사라졌다. 속은 쓰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여행 중 가계부도 사라졌다. 계정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로그인하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다시 깔고 보니 내가 미리 가계부 백업을 하지 않는 이상 그 기록을 되찾을 수 없었다.
신용카드를 어렵게 정리한 이후, 난 문을 열고 바깥을 쳐다보았다. 날씨가 약 오를 만큼 좋다. 어차피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없다. 그냥 원래 하기로 했던 거. 폰 없이 해보자란 생각을 했다. 그깟 소매치기 때문에 나의 하루를 망칠 수 없다. 폰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거고, 일단 여기에 왔으니 원래 하려던 걸 하자. 괜히 안 좋은 기억에 대한 짜증을 이 작은 마을에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숙소 근처 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이곳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배 타고 근교 마을까지 돌아봐야겠다 막연히 생각했다. 마을이 그리 크지 않지만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수준으로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은근 체력이 소진되었다. 이 마을은 유독 전통 복장을 입은 여인들이 많다. 관광객들을 위한 그런 게 아니라, 이들에겐 이것이 일상 복장이다. 해발 고도 높은 호수 마을에 자리 잡은 이들은 마야 언어를 사용하고, 그들만의 전통 의식 등을 그대로 치른다.
폰이 있었더라면 걸으면서 사진을 열심히 찍었을 텐데, 폰이 없으니 오히려 매 장면 하나하나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종종 아름다운 경관을 봤을 때 눈에 잠깐 담고 나서 바쁘게 사진을 영혼 없이 찍곤 했다. 그때마다 스스로도 내가 이 모든 사진을 다 보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뭔가 내가 여기에 들렀다는 것을 표시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지금은 오히려, 사진을 열심히 찍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사라졌다. 선착장에 가서, 옆 마을로 가는 보트를 물어서 탔다. 뭐가 있는지 몰랐지만, 보트에 내려서 역시 길 가는 데로 걸었다. 우산 골목부터 모자 골목 등 알록달록하게 조성된 골목부터 다양한 벽화들, 볼거리가 풍부하다. 지나가다가 그릴에서 고기를 열심히 굽는 여성들과 그 옆에서 잔뜩 식사를 현지인들을 보았다.
이런 건 그냥 못 지나가지. 내가 고기 굽는 것을 빤히 쳐다보니 "추하스코(Chujasco)?"하고 나에게 물었다. 브라질 슈하스코 같은 스테이크 고기를 말하는 거라 지레 짐작했다. 한 접시 달라고 요청했다. 커다란 두 고깃 덩어리와 구운 야채, 밥 등으로 채운 한 접시는 35께짤(약 5~6천 원 선).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에 비해 고기는 너무 질겼다. 딱히 나이프도 없이 플라스틱 포크로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난 그들에게 혹시 칼이 없냐라고 물었고, 그들은 집게와 식칼을 들고 와서 내 접시 위에서 고기를 잘라주었다. (우리나라였다면 가위를 썼을 텐데) 나름 한 입 크기로 잘라주었지만 여전히 고무를 씹는 수준이었다. 멕시코에서 과테말라로 온 이후, 정말 맛있다고 생각한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 다들 과테말라는 먹을 음식이 없고 전통 음식이랄 게 없다더니. 매번 나갈 때마다 뭐 먹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던 멕시코와는 사뭇 달랐다.
이 날 난 점심을 먹고, 전망대도 가고 알찬 하루를 보냈다. 정말 사진을 찍고 싶은 곳에선 아이패드로 찍었다. 오히려 몸을 바쁘게 움직이고 여행하며 풍경 감상하니 내 폰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다. 폰 없이 이렇게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당장 폰을 새로 사야겠단 생각이 사라졌다. 물론 남은 수개월간 여정을 폰 없이 하기엔 다소 무리겠지만, 당분간은 아날로그 여행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