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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Aug 23. 2023

'복잡한 연애 중'은 누가 선택하나 했더니

여행 중 만난 친구들의 흥미로운 관계관 


멕시코 산 크리스토발에서 코리빙 하우스 크루로 일하면서, 이 작은 커뮤니티에서도 정말 복잡한 관계들이 많구나란 것을 목도했다.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못 하거나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그런 은밀한 관계, 페이스북에 있는 "복잡한 연애" "자유로운 연애"는 대체 누가 쓰는 건가 했는데 이들이 그랬다. 이곳에서 한 달 머무르면서 이 작은 커뮤니티에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가 공존한다니. 

(총 세 종류의 관계를 다룰 예정이며, 뒤로 갈수록 복잡한 관계 성향이 나옵니다)



#1. 7개월 동안 함께 여행하지만 커플은 아닌 영국인 남녀 A와 J


내가 코리빙 하우스 크루로 일하는 첫날, 이 "커플"처럼 보이는 친구들이 체크인했다. 그런데 각각 방을 따로 잡아서 의아했던 참이었다. 보통 남녀가 함께 체크인하면 더블베드이건, 트윈베드이건 한 방을 쓰는 경우가 많다. 순수 이성친구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마주 보는 방에 각각 머물렀다. 


남자 A는 영국 멘체스터 출신이고, 여자 J는 남쪽 어느 작은 지방 출신인데 두 사람은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한다. 영국 회사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들은 시차 때문에 매번 오전 5시부터 일을 시작하곤 했다. 

이들은 같은 회사에서 재택근무하다가 우연히 '여행의 뜻'이 맞아서, 함께 동행을 시작했다. 동남아부터 멕시코까지. 약 8개월을 함께 여행했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방은 따로 잡되, 불가피할 경우엔 합방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종종 단체 커뮤니티 프로그램 참여보단 둘이서만 따로 어울렸다.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먹고 그냥 누가 봐도 커플이 하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종종 서로의 방에 들어가 있기도 했고 종종 늦은 새벽 1시에 거실에서 소파에 나란히 누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다정하게 보곤 했다. 


조금 친해지고 나서 물어봤는데 이들은 "친구"라고 선을 그었다. 혹시 "육체적 관계를 맺되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 친구 관계(Friends with benefits)"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후 다른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다가 이 두 사람 이야기가 나왔는데 남자는 여자를 꽤 좋아하는 눈치인데, 여자가 선을 제대로 긋는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침대를 공유해야 할 때도 절대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나란히 침대를 공유하는 메이트일 뿐. 


A는 이후 나와 함께 같이 무예타이짐을 등록하면서 더욱 친해졌는데 나에게 호감을 은밀하게 드러낸 적이 있다. 결국 이 둘은 함께 오랜 기간 여행하며 누가 봐도 커플처럼 행동하지만 커플은 아닌, 친구 관계였다. 


#2. 양성애자 남자와 연애하는 네덜란드 여자 V 


나와 함께 크루로 일하는 호주인 N가 주말에 3일 정도 여행을 갈 예정인데, 쉬프트(근무일정) 교환이 가능한지 나에게 물었다. (우린 매주 월요일마다 한 주의 쉬프트를 공유한다. 종종 개인 사정에 따라 크루끼리 쉬프트를 서로 맞바꾼다) 흔쾌히 수락하며 어디 갈 거냐, 누구랑 가냐고 물었는데 네덜란드 여자인 V와 함께 갈 예정이라고 했다. 이들은 멕시코-과테말라 국경 인근에 있는 호수 하이킹을 하고 그곳에서 3일 캠핑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V는 특히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소수의 인원들만 어울렸다. 특히 항상 N랑 붙어 다녀서 누가 봐도 이 둘은 평범한 커플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N나 V를 찾을 땐 우린 으레 "N에게 연락해 봐" 혹은 "B랑 같이 있을걸"하면서 모두가 공인한 공개연애 커플 같은 느낌이랄까. 


어느 날, 다른 여자 게스트들과 함께 가벼운 술을 마시며 "Girl's night"를 보내는 순간이었다. 우린 이 작은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사소로운 가십, 관계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N와 V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프랑스인 C : 너 그거 아니? 걔네 커플인데 절대 성관계를 가지지 않아. V가 자신은 절대 N과 관계를 가져본 적 없다고 어느 날 말하더라고. 

나 : 아 정말? 플라토닉, 뭐 그런 건가? 

프랑스인 C : 아니 그건 아니고. 일단 N이 바이야. (Bisexual: 양성애자)

나 : 왓? 정말? 와... 근데 생각해 보니 그런 느낌이 있는 거 같아 

프랑스인 C : 그렇다고 V가 굳이 플라토닉을 추구하는 거 같진 않은데. 걔네도 뭔가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관계야. V도 조금 마인드가 특이하잖아? 


대체 이들은 무슨 관계인 걸까. N과 V 둘 다 이 지역에서 3개월 이상 머무르며 거의 정착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 진지한 관계인 듯하다. N은 크루로 일하다가 밖에 방을 얻어 독립을 했는데, V는 여전히 우리 숙소 도미토리에 머무르면서 거의 N의 집에 살다시피 했다. 그 정도면 동거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법 한데 그녀는 절대 코리빙 하우스에서 방을 빼지 않았다. 


서로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임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 남자친구가 양성애자이며 자신과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자. 이들은 플라토닉인 걸까. 


#3. 다자 연애를 즐기는 대만 여자 K 


아담한 키에, 쇼트커트를 한 K는 대만 출신이지만, 캐나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까지 마친 후 타이베이에 정착했다. 그녀는, 타이베이에 "Partner(흔히 남자친구, 여자친구 대신 더 많이 쓰는 단어)"가 있다고 나에게 말을 했고, 이번에 캐나다에 친구 결혼식 참석하는 김에 멕시코에 잠시 들렀다고 한다. 


그녀는 대학원 심리학 과정을 마친 후, 온라인/오프라인 집단 심리 코칭 프로그램 멘토링 등을 하며 디지털 노매드 생활을 한다. 몸은 타이베이에 있지만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이제 막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 날 그룹 위챗에 "관계 관련 무료 1:1 코칭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관심이 있다면 링크 속 사전 설문을 작성하고 개인 위챗을 보내면 예약 가능한 시간대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다들 흥미로워했고 칭찬 일색이길래, 나도 한 3일 지나고 그 링크를 열었는데 설문 항목이 낯설었다.


첫 문항부터 폴리아모리(Polyamory)란 단어가 보였다. 대체 이건 무슨 단어인가 싶어서 찾아보니, 다자연애라고 한다. 첫 문항부터 다자연애 관련해서 묻다니. 역시 미국과 캐나다인들의 관계에 대한 오픈마인드에 감탄하며, 계속 문항을 확인하고 답안에 체크하는데 폴리아모리(Polyamory)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 파트너는 몇 명인지, 만약 폴리아모리가 아니라면 흥미는 있는지 등 아예 주제 자체가 폴리아모리였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누군가와 이야기도 해보지 않은 주제에 조금 당황했는데, 훗날 알고 봤더니 그녀가 바로 이 폴리아모리였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이곳에서 약 1개월 머무르고 있는 미국인 J와 연인처럼 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절친 개념인가 (그녀는 타이베이에 이미 약혼한 파트너가 있으므로)했는데 나중엔 "아니, 저 정도면 그냥 선 넘었는데" 싶을 정도로 그들의 애정행각은 심해졌다. 두 사람은 4인 믹스돔에 머물렀는데 종종 믹스돔 내 화장실에서 함께 샤워를 하느라, 다른 게스트들이 화장실 사용을 못해 외부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쓰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이들은 약 1주일 차이를 두고 각각 체크아웃하며 J는 스페인으로, K는 캐나다 친구 결혼식 참석하며 헤어졌다. 훗날 다른 친구들과 가십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하면서 알게 된 것은 K의 폴리아모리 성향은 현재 약혼한 타이베이 파트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타이베이 파트너를 포함해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다른 파트너에게 이를 알렸고 그들이 모두 동의하면 그 새로운 관계 역시 이어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K는 바람피우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명을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의 성향을 파트너들에게 고백하고, 이들의 동의를 구해 새로운 관계로 확장한다는 거지?"

"응, 맞아. 그런 의미에서 K는 건강한 관계를 진행하고 있는 거지" 

"그럼 J와 지금 각자 갈 길을 가면서도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는 건가?"

"흠... 내 생각엔 이 둘은 진지한 관계라기 보단, 그냥 서로 가볍게 즐긴 사이인 거 같아(Fling: 짧게 가볍게 즐기는 사이를 뜻함)" 

"어떻게 확신해?"

"내가 K에게 물어봤거든. 결국 몸이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지기 마련이라. 이후 제 갈길 가면서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참고로 이 관계에 영감(?)을 받은 네덜란드 다른 게스트 C는 자신의 멕시코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만난 다른 멕시코 남자에게 끌려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혹시 나도 폴리아모리 해도 되냐"라고 물어봤다가 남자친구가 학을 뗐다고. 결국, 그녀는 입맛만 다시며 우리 여자들끼리 있을 때 조용히 말했다.

"솔직히 그는 진짜 큐트(Cute)해. 지금도 살짝 끌리는 걸"

우리나라에선 남자 보고 귀엽다고 말하는 게 조금 실례가 될 수 있다는 통념이 있지만, 해외에선 자신의 타입인지 아닌지 이야기할 때 Cute란 단어를 많이 쓴다

 선뜻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부러웠다. 

이성친구와 함께 성관계없이 방과 침대를 공유하는 것, 동거문화에 대해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한 한국에서 온 유교걸로서 이들의 관계는 정말 복잡했다. 


마치 미드나 영드에서 종종 나올 법한 그런 관계들이 15명 남짓되는 이 작은 커뮤니티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문득, 한국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회적 인식 때문에 그냥 표면상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의 성적/연애 취향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속한 사회가 그들을 다양성으로 존중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표면상, 사회 통념을 깨는 관계이지만, 어쩌면 이들이 자신의 취향을 뚜렷하게 알고 그에 맞는 관계를 조성하고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더 건강한 관계일 수도 있다. 


"남녀사이엔 친구가 없다"란 담론이 종종 안줏거리로 떠오르는 우리나라는, 어쩌면 이성 관계를 획일화하고 천편일률적으로만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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