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가 스페인어를 못한다고 생각하죠?
나에게 스페인어로 먼저 말 거는 사람들이 좋다.
멕시코에서 중미를 거쳐 남미로 건너오며 느낀 변화 중 하나는, 영어로 나에게 말 거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멕시코와 중미는 미국과 인접한 탓인지, 으레 현지인들 중에선 먼저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난 스페인어로 대답하며 최대한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만 쓰는 것을 고집했다. 여러 장사꾼들이 호객 행위를 할 때 당연하다는 듯이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과 스페인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 중 후자를 선택하는 편이다.
물론,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은 나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겠지만, 그 배려의 기저에는 "당연히 스페인어를 못하겠지"라는 것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시아인일 땐 스페인어 하는 것에 대한 기대를 특히 낮추는 것 같다. 나와 프랑스인 친구가 함께 있을 때 각자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상대방의 반응 온도차가 크다. 프랑스인 친구가 스페인어로 할 땐 "아 그러냐"하는 반응이고, 내가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고 하면 "오오 대단해"라고 칭찬부터 들어간다.
물론, 스페인어로만 말을 거는 사람들 중 영어를 아예 못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스페인어로만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꾼들은 대부분 물건을 판매하기 위한 최소한의 영어는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론, 내가 스페인어로 물으면 "스페인어 하냐?"라고 나에게 다시 물은 후 그렇다고 끄덕이면 "훌륭해요(Muy bien)"이라 말하며 스페인어로 설명해 주는 사람들이 좋다. 어떤 사람은 "나 근데 말 속도 엄청 빨라. 그래도 괜찮겠어?" 라고 미리 주의를 주기도 한다.
대부분 말 속도를 낮추지 않은 채 스페인어로 나를 응대한다. 그러다가 내가 모르는 단어를 다시 물어보면 그것에 대해 또 다른 스페인어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호객 행위가 귀찮을 때도 있지만, 종종 가장 좋은 스페인어 선생님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오히려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경우도 있다.
오늘 콜롬비아의 한 카페에 방문했는데, 모르는 디저트명이 있길래 주문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 질문했다.
"이게 뭐예요?"
"혹시 스페인어 잘하세요?"
"뭐, 스페인어 해요. 스페인어로 설명해 주세요"
"요건 alq@#$@#$ 로 해서 만든, 마카롱 비슷하게 생긴 샌드위치 같은 디저트예요"
"alq@#$@#$ 이 뭐예요?"
"음... 영어로 뭐라고 말하지?"
"그냥 스페인어로 설명해 주세요. 콜롬비아에서만 쓰는 재료예요?"
"아뇨 그건 아니고.. 약간 우유 부드럽게 만들어서 한 건데,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그러더니, 주방에 들어가 우유 크림 비슷하게 생긴 걸 나에게 보여준다. 딱히 당기진 않았던 디저트였지만, 이렇게 까지 해주는데 그걸 안 시키면 예의가 아닌 거 같아 아메리카노와 함께 주문했다. 나온 디저트는 아이스크램 샌드와 흡사했다. 부드럽게 녹는 샌드에 겉에 박힌 코코넛 가루가 식감을 더해주었다. 많이 달지 않아 아메리카노와 조화도 좋다. 커피로 유명한 콜롬비아라 그런지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아메리카노를 시켜도 보통 이상은 한다.
커피와 디저트를 모두 합쳐도 한화로 약 3천 원 내외. 여기에 카페 직원들의 특유의 흥은 덤이다. 무엇보다 내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알고, 카페에 머무르는 동안 종종 다가와 스몰토크를 걸어주는 직원들도 좋았다. 이들은 굳이 나를 위해 스페인어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내가 못 알아들어 다시 물을 때마다 친절하게 쉬운 스페인어로 다시 설명해 주었다.
한국에 사는 한 외국인의 한국어 실력이 안느는 이유
같은 날,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는데 알고리즘의 영향 때문일까? 한국에 사는 아프리카계 외국인이 찍은 릴스 영상이 피드에 떴다. "한국에 살아도 한국어 못하는 이유"란 릴스였는데, 외국인이 한국어로 최선을 다해 말해도 한국인이 계속해서 영어로만 대답한다는 내용으로 찍은 유머 영상이었다. 영상엔 서비스직 경험이 있었던 한국인과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 위주로 댓글이 많이 달렸다. 서비스직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의 반응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예전엔 무조건 영어로 말을 거는 게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요샌 외국인이 와도 첫마디는 한국어로 말을 하고 잘 못 알아들을 경우에만 영어로 대화를 한다
확실히 10~15년 전만 해도,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하는 게 정말 생소한 풍경이었기 때문에, 동방예의지국답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에 맞추어 영어로 응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거 같다. 그래서 외국인 손님을 볼 때 영어울렁증에 괜히 먼저 피해버렸다는 에피소드도 일상에서 심심찮게 듣곤 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이 존재감을 조금씩 키워나고 있고,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도 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과거엔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배려가 아닐 수도 있다. 이제 그들이 한국어로 말하려고 노력한다면, 이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것이 그들을 위한 존중이 아닐까. 그들의 한국어가 답답하게 들릴지라도, 섣불리 영어로 응대해 그들의 한국어로 구사하려는 의지를 꺾는 것보단 이들이 더 자신감 있게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친절의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