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동안 일본에서 폰을 사용하지 않고 아날로그 여행자가 된 이야기
내가 20kg가 넘는 배낭을 메고 여행을 시작한 것은 2010년도부터 였다. 캐리어 끌고다니는 여행 말고 정말 '배낭'이란 것을 메고 장기간 여행을 가는 것을 꿈꾸었고 여행용품 사이트에서 추천순위에 올라온 48L짜리 배낭을 사면서 내 여행 라이프가 시작됐다.
2010년도는 아직 스마트폰이 그리 많이 보급되지 않은 때였다. 나름 조금 얼리 어답터였던 내가 2010년 5월부터 아이폰 3gs 를 쓰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카카오톡보다는 네이트온, 문자로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때였다.
2010년에 한 2주간 필리핀 배낭여행을 다녀온 이후, 숨을 잠시 고르고 2011년부터 반년이 넘는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시작했다. 그 때는 러시아를 비롯해 여타 유럽에 지금만큼 WIFI가 많이 깔려있지 않아서 휴대폰으로 여행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스마트폰을 쓰는 외국인이 돌아다니면 표적이 될까봐 오히려 가방 한쪽에 숨겨놓고 론리플래닛과 종이지도로 여행을 다녔다. 당시 스마트폰은 숙소에 도착한 후에야 꺼낼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종이지도 하나에만 의존하면서 소도시 여행까지 참 알차게 잘했다. 론리플래닛 영문판 (한글판보다 업데이트가 빠르다) PDF 북을 아이패드에 넣어놓고, 열심히 정독하면서 가고 싶은 도시가 있음 무조건 거기로 간 후에 역근처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City map'부터 요청했다. 그래서 비록 내가 방향치이지만 지도 하나는 정말 잘본다. 지도만 있으면 어디든 다 다닐 수 있는데 지도만 없으면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반쪽짜리 길치인 셈이다.
그 때는 휴대폰을 거의 하지 않고 종이지도에만 의존하면서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나는 느릿느릿했다. 지도에 있는 거리가 감이 안잡혀서 무작정 걷다가 아직 한참 남은 것을 깨달았을 때 허탈해지기도 하고 걸으면서 뭔가 슈퍼마켓 (마트 구경을 참 좋아한다)이나 독특한 샵이 있으면 한번 들어가서 구경 쓱 하면서. 이런 아날로그식 여행을 2014년도까지 해왔다.
점점 외국 심카드 쓰는 것도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더이상 종이지도를 찾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구글맵만 있으면 뭐든지 다 됐다. 예전에는 와이파이 끊기기전에 구글지도를 다 다운로드 받아놔야 했고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봐 캡처까지 다 뜨고 수첩에 가는 길이나 타야하는 버스번호 등을 옮겨적어놔야 했다.
하지만 요즘은 정말 편리하게도 그냥 미리 정보를 찾을 필요도 없고 심카드 데이터를 열심히 써가면서 즉흥적인 여행도 가능하다.
지난주 8박9일간 가있었던 일본에서도 그랬다. 전날 새벽에 대강 짜놓은 루트 이름만 기억하고, 그 때 그 때 지도에 검색해서 가는 방법을 찾아가며 열심히 잘 다니던 와중에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 날은 교토 소도시 여행을 한 후 오사카 잠시 들러 오사카 숙소 체크인하고 고베로 당일치기 갔다오는 조금 빡센 일정이었다. 고베는 소고기 먹고 야경만 보면 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여유롭게 고베로 기차까지 도착했다. 그 때 기차에서 대강 고베에 대한 정보를 보면서 "음, 여기,여기,여기 가면 되겠군"하고 어느정도 머릿속에 그 위치들을 잠시 기억해두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고베에는 차이나타운 근처에 모토마치 상점가 시장이 있다. 어딜가나 시장구경을 좋아하기 때문에 역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을 향했다. 그러다가 세계과자점 같은 곳에 메이지 초콜릿이 69엔이라는 것에 홀려서 들어간 후 폭풍 과자, 음료수 쇼핑을 했다. 계산을 하려고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실수로 폰을 떨어뜨렸다. (폰을 원래 자주 잘 떨어뜨리는 편이다) 방탄유리를 해놓은 덕에 뭐 깨진 건 없어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폰을 다시 줍고 마저 계산을 끝내고 가게를 나왔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는 없었고 그냥 아이폰 하나에 의존해서 사진을 찍고 다녔다) 폰을 켜려는데 폰이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가 그새 닳았나 해서 보조배터리를 연결했는데 안에 알림울리는 소리, 캡쳐뜨는 소리 등은 다 들린다. 즉, 내부 작동은 정상적으로 지금 잘 되고 있는데 화면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예전에도 비슷하게 한 적이 있었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디스플레이 망가진 것인가. (살면서 폰 디스플레이를 안망가뜨려본적이 없는거 같다. 나를 스쳐간 아이폰 3,4,5, 갤럭시4 모두 액정이 아닌 디스플레이 박살을 모두 경험했었다)
난감했다. 고베에 처음 오자마자 폰을 깨다니.
아니 난감한 수준을 넘어서 살짝 멘붕이었다. 오마이갓. 어떻게 해야되지. 그동안 사진, 영상도 이걸로 다 찍었는데 앞으로 사진도 못찍네. 아니 그것보다 업무차 온라인 결제해야하고 입금해야할 거 있는데 당장 모바일 뱅킹을 쓸 수가 없는게 더 난감했다. 한국에 돌아가기까지 약 4일이 남았는데 4일동안 내가 입금을 제때 못해주면 자칫 큰 손해를 볼 수 있는 일들이 꽤 있었다. 이 모바일 뱅킹문제는 폰을 새로 사도 해결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머리가 아팠다.
한 30분동안 그 상점가에 비치된 벤치에 앉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는데 앞에 세워진 전단지 거치대에 꽂혀진 '고베 관광시티맵'이 눈에 들어왔다. 오사카에서는 좀처럼 안보였는데 고베에서 종이지도라니! 순간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폰 망가진거. 그냥 오사카 돌아가봤자 해결할 수 있는게 아무도 없고. 일단 고베 여행은 하고 숙소에 들어가서 고민하자" 라는 급 긍정적으로 태세 전환을 했다.
그냥 왜그런지 모르겠는데 폰 고장났다고 그냥 오사카 숙소로 돌아가버리면 뭔가 지는 느낌 (대체 누구에게...)이 들었다.
고베 시티맵에는 다행히 고베 대표적인 관광스팟들이 표시되어있었다. 내 위치를 대략적으로 확인하고 스트리트명과 현지인들에게 방향을 물어 감을 잡기 시작했다. 야경을 보기엔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고베 시청전망대에서 무료 시티뷰를 보고 역 근처에서 밥을 먹고 하버랜드쪽까지 걸어가서 야경 보고 마무리하면 되겠군! 하고 간략하게 플랜을 짜고 무작정 고베 시청쪽으로 걸었다. 지도가 약간 간략해서 작은 골목까지 표시가 되어있지 않아 조금 헤맸지만 다행히 길거리 곳곳에 배치된 이정표따라 길을 꽤 잘 찾아갔다. 걷다보면 감이 온다. 아 저 멀리 보이는 저 건물이 아마 시청건물이겠거니 하는 그런 직감. 이번에도 그게 잘 맞아떨어졌고 너무나 친절한 경비원에게 안내를 받아 아무도 없는 전망대에서 고베 시티를 감상했다.
밥은 어디서 먹지하다가 그냥 역근처에 스테이크고 뭐고 다 팔거 같아서 돌아다니는데 레드락하우스가 보였다. 어, 이거 옛날에 친구한테 들은거 같은데 레드락 소고기 덮밥이 맛있었다고. 당시 하드락카페랑 이름이 비슷해서 쉽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들어가서 식사도 나름 잘 해결했다. (사실 스테이크를 먹어야 했는데 비싼 고급 스테이크는 뭔가 혼자 먹고 싶단 생각이 안들었다)
밥까지 넉넉히 먹고 오사카로 가는 기차 시간을 역사에 확인했다. 약 2시간정도 여유시간은 되겠다 싶었다. 하버랜드까지는 약 2km. 걸어서 약 30분 걸리는 곳이었다. 지금 해는 졌고. 배 꺼뜨리는 겸, 이정표대로 따라 걸었다. 만약 휴대폰이 있었다면 휴대폰만 열심히 쳐다보면서 걸었을 텐데 오히려 휴대폰이 없으니 여행이 더 여행스러워졌다. 주변 경관들을 바라보게 되고 길이 헷갈리면 종이지도와 다시 한번 대조해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조금 더 바라보게 되는 등 말이다.
고베가 그나마 도시 규모가 작았고 모두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였으니 다행이었다. 만약 대중교통을 타고 다녀야 했다면 솔직히 좀 많이 당황스러웠으리라. (옛날 아날로그 시절엔 대중교통을 타야하는 동선은 숙소에서 출발하기 전에 항상 미리 검색해보고 나갔었다)
비가 와서 거리엔 사람들이 많이 없었고 하버랜드로 가면 갈수록 뭔가 썰렁한 부둣가로 혼자 걸어가는 느낌이라 살짝 무섭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고베에서 휴대폰까지 망가뜨렸는데 야경까지 안보고 가면 억울하잖아!"라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예상보다 많이 멀었고 야경은 생각보단 그저 그랬다.
야경은 별로 였지만, 고베에서 휴대폰이 망가져서 오히려 내 여행을 오히려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것에서 아이러니한 만족감이 나왔다. 휴대폰이 있었다면 이것저것 더 많이 가고 싶고 대략적으로 가는데 소요시간 등이 나오기 때문에 본의아니게 서두르게 된다. 하지만 휴대폰 대신 종이지도를 들고 거리의 이정표에 의존해 감으로 길을 찾기 시작할 때 언제쯤 도착하지 하는 그러한 설렘과 주변을 조금 더 바라보게 된다는 점은 비록 느린 여행이었지만 기억에는 더 남는 여행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하기까지 남은 4일을, 그렇게 휴대폰없이 종이지도를 들고 오사카를 누볐다. 블로그에 나오는 맛집보다는 걷다가 보이는 사람들이 꽤 들어가있는 식당을 들어갔고 목적지 없이 한없이 걷다보니 어느덧 유명한 랜드마크에 도달하는 등 말이다. 쇼핑을 할 때도 되려 쿨해졌다. 이게 한국에서 얼마정도 가격이지? 손해보는 거 아닐까 하고 휴대폰 검색하는 대신 그냥 내가 원하는 가치에 합리적인 가격이다 판단되면 그냥 샀다. 사진찍을게 없으니 오히려 눈에 더 열심히 풍경을 담았다.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하다보니 분명 서두르지 않았는데도, 여유롭게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나갈 때 이제 심카드를 안사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