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O 국민 코스, ~가면 꼭 해야할 것들은 누가 먼저 만들었을까
여행 코스 추천해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나 OO가는데 여행 코스 추천 좀 해줘"
해외 어딘가로 여행가는데, 뜬금없이 코스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너가 무엇을 하고 싶으냐에 따라 다른데"라고 뜸을 들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질문을 하는 화자들 대부분이 특별한 취향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다. 그들은 비행기표를 이미 구매했지만, 해당 국가에 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다. 방문하는 곳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상황에선, 그 자신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취향이 확고하거나 그 나라를 가고 싶은 이유가 뚜렷한 사람이라면, 이미 그 나라에 대해 자신이 관심있는 장소나 활동에 대해 자발적으로 사전 조사를 마쳤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미 이런 질문을 애초에 하지 않는다. 즉, 아무 배경지식없이 코스를 추천해달라는 질문은 "다른 사람이 하는 보편적인 여행 코스"를 알려달라는 것과 같다.
가령, 대만을 처음 방문한다면 타이베이 도착 후, 시먼딩 호텔 체크인한 후 줄 서서 먹는 우유도넛과 곱창국수를 먹어줘야 한다. 저녁에는 유명한 딤섬 프랜차이즈나 쓰촨 요리 전문점에 가서 식사를 하고 타이베이 101 야경을 보러간다. 둘째날에는 예스진지 투어(혹은 이를 살짝 변형한 투어)로 종일 시간을 보낸다. 셋째날에는 대만 고궁 박물관에서 도슨트 투어, 단수이에서 "말할 수 없는 비밀" 촬영 배경이 된 곳을 방문해서 사진 찍고 노을까지 감상한다. 저녁 타이베이 도심으로 오는 길에 스린야시장 혹은 닝샤 야시장에 방문한다. 마지막 날은 용캉제로 가서 누가 크래커 오픈런을 하고, 유명한 우육면을 먹고 공항 갈 준비를 한다.
각자 비행기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변형해서 적용되지만, 대만 타이베이를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국민 코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여행코스를 보면, 취향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타이베이를 N회차 방문하면 자신의 취향에 따라 한국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장소 위주로 계획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지만, 어느 나라이건 그 나라에 첫 방문한다면, 자신의 취향보다는 일단 누군가가 만들어준 국민 코스를 자신의 비행기 일정과 숙소 동선에 맞게 변경해 사용한다. 일단 남들 하는 것은 다 하고 본다는 군중 심리는 인간의 본능이다. 심지어 많은 여행 블로거들은 자신들이 쓴 비용 내역까지 엑셀파일로 꼼꼼하게 정리해 공유한다. 개인 소비 내역을 공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국민 코스를 따라갔을 때 대략적으로 드는 비용"이란 것을 의미하고, 이런 게시물의 인기가 높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은 누군가의 여행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 하고 싶다는 욕구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국민 여행 코스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대만 사람들은 모르고, 한국 사람들에게만 유명한 누가 크래커집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제기된 의문이었다. 특정 장소와 맛집 등을 발굴한 사람, 누구나 다 따라가는 국민 여행 코스를 최초로 만들어 인터넷에 퍼뜨린 사람은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만약 여행에 저작권이 있다면?
만약 여행 코스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어떨까?
"예스진지(예류-스펀-진과스-지우펀)"란 단어를 최초로 고안한 사람이 저작권자라고 가정해보자. 이 코스를 활용한 버스 투어회사나 택시 투어 매출이 일어날 때 마다 사용료를 정산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 블로거들은 해당 일정에 대한 소개 및 후기 관련 글을 작성할 때마다 "본 일정은 예스진지 저작권자 OOO님의 허락을 받고 사용했습니다"라고 상단에 명시해야 할 것이다.
터무니없다고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저작권법 원리를 따져보자.
대한민국 「저작권법」 제2조 제1호에서는 저작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저작물”이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을 말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저작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1.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의 표현일 것
2.창작성이 있을 것
예스진지는 단순 데이터의 나열이 아니다. 대만 여행을 해본 사람이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여행지를 선정하고, 순서 배치 및 시간 배분 등을 판단해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예스진지'라는 네이밍은 한번만 들어도 단단히 각인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다채로운 감동을 즐기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의 취향을 반영하며 예스진지란 단어를 뽑아낸 능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여행 코스 전체를 저작권으로 등록하기엔 무리가 있더라도, 개인 경험과 현지 사정에 대한 이해, 큐레이션 등이 종합적으로 들어간 예스진지는 대만 여행 일정의 핵심 코스 모듈로, 충분히 저작권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움직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만든 춤 역시, 파트별로 저작권으로 등록하는 세상에서 이러한 여행 코스 모듈이 저작권으로 인정 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
만약 여행 코스에 저작권이 생긴다면, 우린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인 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여행이라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사용료 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코스 모듈을 수정하며 우회하는 사람들도 생겨날 것이고, 그것을 또 저작권으로 등록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국 "일정 금액을 내면 무제한으로 여행 코스를 이용할 수 있는 스트리밍형 플랫폼"까지 생기지 않을까.
아이디어와 표현의 경계
저작권법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다. 아이디어 자체는 보호하지 않고, 그 아이디어의 구체적인 표현(유형성)만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려 왔다가 뜻밖에 정착한다는 설정은 아이디어이다. 이와 비슷한 얼개를 가진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은 이 아이디어를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해냈기 때문에 아이디어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개별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이 논리를 여행 코스 모듈에 적용시켜보자. "진과스와 지우펀을 묶어서 간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오전 10시 타이베이역에서 출발해 지우펀에 도착해 유명한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주변 찻집에서 여유를 즐긴다, 오후 3시에 스펀으로 이동해 천등을 날리고 닭날개 볶음밥을 먹는다"는 구체적인 일정은 창작자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런 구분이 모호하다. 여행 일정의 어느 부분까지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이고, 어느 부분부터가 보호받을 만한 표현인가. 진과스와 지우펀은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필연적인 아이디어라고 치자. 하지만, 스펀에 가면 꼭 먹는다는 닭날개 볶음밥은 누군가가 그 곳에서 우연히 이를 먹은 경험을 콘텐츠를 통해 공유했기 때문에, 스펀의 향토 음식이 아님에도, 모든 한국 사람들은 스펀에 가면 줄을 서서 닭날개 볶음밥을 사먹고 그 맛에 감동한다. 이건 창작자의 독창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표현이라고 볼 수 없을까?
복사-붙여넣기가 불가능한 여행
여행 코스의 표현은 결국 해당 여행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누군가가 스펀에 가면 닭날개 볶음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기록한다 한들, 결국 그를 따라 여행하는 행위가 '표현'이다. 즉, 누군가의 경험과 판단으로 만든 여행 코스 모듈은 그 자체로는 표현으로 성립하기 어려우며 개개인이 그를 따라 경험한 후에야 의미가 생긴다.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은 여행 코스가 여행을 한 이후에야 비로소 꽃이 되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코스로 여행을 하더라도, 여행할 때 당시의 날씨와 현지 사정, 함께 여행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한 변수에 따라 고유의 여행 경험이 탄생한다. 아무리 완벽한 여행 일정이 있어도, 실제 여행에서 벌어지는 변수로 변경되는 일이 잦다. 우연히 만난 현지인의 추천으로, 계획에 없던 맛집에서 나만 알기 아까운 식사를 하게 된다. 따라서 누군가의 여행을 완벽하게 복사할 수 없다. 표면적으론 비슷해보일지라도, 그 경험 속에서 느끼는 개개인의 생각과 의견은 다르며 각자 다른 서사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즉, 여행 코스는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 복제, 수정, 배포할 수 있는 퍼블릭 도메인* 혹은 익명의 저자들이 작성하는 집단 저작물에 가깝다. 특히 여행 코스는 특성상 고정불변의 재화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현지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가능하기 때문에 새롭게 여행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해야만, 그 가치를 유지한다.
퍼블릭 도메인: 저작권, 특허권, 상표권 등의 지식재산권 보호가 더 이상 적용되지 않거나 처음부터 적용되지 않은 창작물.
맛집을 발견하면 아무런 대가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있다. 장엄한 풍경을 보면, 나만 보기 아깝다는 생각에 이를 찍어 소셜미디어에 공유하고 누군가가 동일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 결국, 개개인의 경험과 자발적인 공유가 쌓여 지금의 국민 코스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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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저작권이 있었다면 어떨까? 라는 허구적 상상에서 시작했지만, 따지고 보니 여행에는 이미 가장 강력한 저작권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법적 보호가 아닌, 물리적으로 복사가 불가능한 저작권이다.
같은 예스진지 코스를 따라가도 어떤 이는 흐린 날의 지우펀의 운치에 감동하고, 누군가는 붐비는 관광객에 지옥펀이라 부르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1시간 넘게 웨이팅해서 맛 본 유명한 우육면은 어떤 사람에겐 인생 맛집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누군가에겐 익숙치 않은 향신료 맛에 먹는 것을 결국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도, 자주 가던 식당에 처음 방문했을 때와 이후 재방문했을 때 감정이 다르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여행의 경험과 감상. 여행의 진짜 저작권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불가능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