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암(Miriam),멕시코시티 &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멕시코
멕시코 사람들이 약속 시간에 늦는 이유
미리암과는 스타벅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언어교환 앱에 올린 나의 게시글은 간단했다. “한국어에 관심있는 멕시코시티 사람있나요? 시간될 때 커피 한 잔하면서 이야기해요.” 예상보다 많은 반응이 왔다. 수십 개의 메시지를 받았는데, 대부분은 멕시코시티가 아닌, 다른 도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정중하게 답했다. “멕시코만 3~4개월 여행할 건데 방문하게 되면 연락하겠습니다.” 데이팅 목적으로 보내는 스팸과 수상한 메시지들을 걸러내고 나니, 실제로 만날 수 있는 멕시코 시티 사람은 고작 두 명뿐이었다.
라틴 문화권에서는 약속 시간은 “정확한 이 시간에 보자”가 아니라 “이 시간 언저리에 보자”는 뜻에 가깝다. 여유로운 생활 방식도 한몫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대중교통이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조차 버스를 제시간에 탄 기억이 없다. 구글맵이 알려주는 버스 번호와 시간은 허상에 가까웠고, 나는 항상 버스 정류장에서 지나가는 버스마다 기사에게 물어야 했다. “여기 지나가나요?” 같이 버스를 기다리는 멕시코 사람들도 자신이 자주 타는 버스 노선 외에는 잘 몰라서 그들 역시 내 질문 그대로 옆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어떤 아주머니는 자신의 친구에게 전화해서 버스 정보를 물어보기까지 했는데, 자칭 대중교통 전문가라던 그의 말을 믿고 버스를 2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결국 우버를 불러 돌아간 적도 있었다. 자동차를 몰면 멕시코의 악명높은 교통체증에 발목이 잡히고, 대중교통은 지하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언제 올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멕시코 사람들에게 약속시간에 늦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그 사정을 알기 때문에 늦어도 크게 화내지 않는다. 라틴 문화권에서 자주 쓰는 “아오리따 (ahorita)”라는 표현이 이런 습성을 잘 보여준다.
사전적으로는 “지금 거의 다 와가” “거의 왔어”란 뜻이지만, 실제론 1시간 전일지, 30분 전일지, 10분 전일지, 1분 전일지 아무도 모른다. 이 표현의 참뜻을 설명하는 틱톡 영상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문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가 거의 식어서 반쯤 남았을 때야 미리암이 도착했다. 그녀는 연신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한국 사람과 약속한 거라서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차가 너무 막혔어.” 반쯤 비운 내 컵을 슬쩍 본 그녀는 스낵이나 빵 같은 걸 먹겠냐고 물었지만, 아침 겸 점심을 배부르게 먹었던 탓에 그녀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상대방의 지각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약속에 늦어 가장 마음이 불편할 사람은 나보다는 상대방일 것이고, 기다리는 동안 신문 기사를 읽거나, 외국어 학습 앱에서 단어 하나 더 외우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휘핑 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 음료 그란데 사이즈를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느긋할 것 같았던 첫인상과 달리, 그녀는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중간에 끼어들 틈을 찾기조차 어려웠다. 결국 나는 절반 정도를 흘려듣는 수준으로 멍하니 “적절한” 반응을 눈치껏 보였고, 그제서야 그녀의 말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앞서 한 말을 반복하는 버릇이 있어서, 문맥상 추론으로 대략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파악할 수 있었다.
미리암은 40대 미혼모로 올해 19살이 되는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무역 관련 사무직에 종사하지만, 영어는 썩 잘하지 못한다. 해외 문화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우연히 드라마 <도깨비>를 보고 한국 드라마의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공유 사진을 검색해서 보여주며 “내 남편”이라고 서툰 한국어로 말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요즘 혼자 한국어를 공부한다며 가방에서 한글 연습장을 꺼냈다. 큼직한 네모칸에 자모음을 수십 번 겹쳐 쓴 흔적이 역력했다. 별도의 공책에는 새로 익힌 단어들이 빼곡했는데, 가령, “하늘” “드라마” “커피” 와 같은 단어들이었다.
아직 한글을 겨우 더듬더듬 읽을 수 있는 수준이지만, 한국어를 입으로 내뱉어본 적이 없어서 내 게시글을 보고 조금이라도 말해보고 싶어서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이제부터 한국어로 말해볼까?”라고 제안하자, 그녀는 “아니야, 부끄러워”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이후 한국어를 공부하는 다른 사람들을 여럿 만났는데, 모두 의외로 정말 부끄러워했다. 그 누구보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외국어 앞에선 갑자기 소심해지는 것이 신기했다. 보통 말 많고 외향적인 사람들이 언어도 빨리 익힌다고 하지 않나. 나는 미리암 역시 아는 표현을 무조건 뱉어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리암은 정작 한국어 연습보단 그냥 대화를 원하는 듯 했다. 얼떨결에 약 2시간동안 그녀의 인생살이와 절망, 꿈에 대한 상당히 깊은 이야기까지 나눴다. 고백하자면 그 중 30분은 듣고 있다는 추임새만 간간이 남겨주며 멍때리며 흘려들을 수 밖에 없었다.
저녁 약속이 있었던 탓에, 미리암이 한창 즐겁게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는 도중에 결국 미안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저녁 약속 역시 멕시코 친구라서 느긋하게 가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미리암과 달리 이 친구는 정시에 도착해서 “어디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낸 상황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미리암과 마지막 포옹을 나누고 인사를 하며 나올 때까지만 해도, 다시는 그녀와 볼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싫어서가 아니라, 이틀 후면 멕시코시티를 떠나 다른 도시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미리암은 그 이후로 이틀에서 사흘에 한 번씩 왓츠앱 메시지를 보냈다. 별다른 일이 없어도 항상 “안녕, 오늘 어때? Hola, ¿cómo estás?” 라고 안부를 물었고, 난 항상 비슷하게 답변을 보냈다. 특별한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가늘게라도 서로 연락을 이어온 덕분에 우리는 약 2개월 후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딸과 남동생, 부모님까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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