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아날로그에 가까운 미디어 플랫폼에 대한 끌림
얼리어답터(Early Adopter)까진 아니지만 얼리메저리티(Earily Majority)의 초반에 위치하는 정도는 된다.
*일반적으로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크게 5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Innovator (상위 2.5%) - Early Adopter (상위 13.5%) - Early Majority (상위 34%) - Early (하위 34%) - Laggards (하위 16%)
고등학생 때부터 뭔가 새로운 기계 등을 남들보다 빠르게 들여와(?) 썼다. 그리고 최대한 잘 활용해서 별의별 꼼수에 활용했다.
가령, 내가 중학교 말에는 전자사전을 들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기본 전자사전 기능만 있는 카시오와 샤프 등은 언젠가부터 두꺼운 영어사전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근데 당시 보수적인 영어 선생님들은 이 기본 전자사전을 들고 다니는 것을 불허하기도 했다. 영어 공부는 사전을 찾아보면서 조금이라도 많은 단어를 훑어야 하는데 전자사전을 쓰면 한 번에 띡하고 찾아버리니 안 좋다며 말이다. 여하튼, 조금 비싼 전자사전이래봤자 사전 종류가 많은 정도? 일본어, 중국어 사전은 물론이고 영어 유의어 사전, 이보영의 영어회화사전 등 잘 들여다보지도 않을 사전들이 탑재되어 가격만 높이는 수준이었다.
그때 나도 부모님이 전자사전을 사주겠노라고 골라보라고 하는데 또 남들과 괜히 다른 전자사전을 사고 싶은 거다. 당시 나는 매일 아침 학교 가기 전에 종이신문을 읽었는데 종이 신문 하단 광고에 A-one 전자사전이 눈에 띄었다.
온갖 종류의 전자사전은 물론, mp3, 엠씨스퀘어 기능까지 있는 일종의 만능 사전이었다. 대신 가격은 보통 전자사전보다 약 2.5배 정도 비쌌던 걸로 기억한다. 약 40만 원에 가까웠던 가격이었다. 그 전자사전은 용량도 128mb 수준으로 음악 몇 개 들어가면 끝나는 수준이었는데 당시에는 mp3 128mb, 256mb가 일상이었으니 퍽 만족스러웠다. 사실 사전으로서는 기능이 그리 좋지 않았다. 없는 단어가 꽤 많았고 펌웨어를 꾸준히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mp3를 포함해 다른 기능을 참 유용하게 썼다. 그중 남들은 잘 안 쓰지만 (이후 나로 인해 폭풍으로 썼다) 내가 가장 많이 쓴 기능은 다름 아닌 텍스트 읽기 기능이다.
당시 인터넷 소설 및 팬픽 등이 유행했는데 이것들이 txt 파일로 돌아다니던 시절이었다. 옳다구나. 나는 txt 파일을 폭풍 다운로드하여서 전자사전으로 공부하는 척하면서 열심히 인터넷 소설과 팬픽을 읽어댔다. 내 친구들도 처음엔 내 전자사전을 돌려보다가 이후 내 전자사전과 비슷한 유사 전자사전 등을 사서 자기네들도 txt 파일을 넣어 읽기 시작했다. 적어도, 우리 학교에서 전자사전으로 팬픽, 인터넷 소설 읽기를 시작한 선두주자가 나였다.
(정말 쓸데없는 부심)
고등학생 1학년 때는 pmp라는 게 슬슬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후 1년 후에 메가스터디 pmp 강의를 기점으로 반의 절반 이상이 pmp를 끼고 인강을 보던 때였다. 그때도 나는 전교에서 pmp를 제일 먼저 사서 쓴 애였고 pmp 강의를 야자 때 듣기 시작했다. pmp는 앞의 전자사전보다 더 발전된 형태여서 용량이 10GB씩이나 됐고 음악이랑 영상(인코딩을 수없이 해야 했지만) 등도 넣을 수 있었다. 텍스트 기능은 말할 것도 없이 더 좋아졌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아이폰3g를 한국에서 조금 일찍 쓰기 시작했다. 당시엔 카카오톡에 접속해도 내 주변 사람들이 10%도 안되어서 그냥 삭제했었다. 그러다가 반년 정도 지났을까. 문자 무료! 카카오톡 때문에 스마트폰 산다는 사람들이 폭풍으로 늘어났고 그렇게 바야흐로 스마트폰의 시대로 도래했다.
새로운 기계, 제품에 대한 흥미는 딱 거기까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이 생기고 난 후, 더 이상 새로운 제품 등에 흥미가 가지 않았다. 아이폰 3gs를 거의 3년 넘게 썼고, 이후 아이폰 7이 나올 때 아이폰 5S를 쓰기 시작할 정도로.
기기에 대한 민감도가 점점 사라졌고, 스타트업 서비스에 대해 눈을 돌렸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스타트업에 몸을 담궈서 그런지 새로운 스타트업 서비스 뉴스나 소식을 빨리 듣는 편이었고 항상 앱스토어에 가서 새로운 앱들을 항상 다 다운받아서 써봤던 거 같다. 그러다가 아직까지 너무 베타여서 허접하거나 내 스타일이 아니다 싶으면 바로 삭제하곤 했는데 4년정도가 지난 지금 그 때 내가 삭제했던 앱들이 지금은 꽤 많이 알려진 스타트업들이 많다. 그만큼 스타트업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새삼 감회가 새롭다.
넷플릭스도 한국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가 한국 런칭일 바로 그 날 결제를 해서 감상하고 온갖 구독 서비스를 포함한 새로운 서비스들은 거의 다 체험을 해보고 "아 여긴 대박이다" 싶으면 이제 그 때부터 주변사람들에게 이 앱, 서비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폭풍 홍보를 했다. 누군가는 "거기 직원이냐"라고 물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네, 직원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토스, 왓챠, 마이리얼트립 등 대부분 지금은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서비스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항상 일반 대중보단 조금 빨랐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요즘은 그런 것들이 다 귀찮아졌다.
완전한 100% 아날로그로의 회귀는 아니지만,
디지털 시대에서 그나마 아날로그에 가까운 쪽에 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바로,
팟캐스트와 브런치이다.
(제목은 이렇게 해놓고 여기까지 오는데 이렇게 사담이 길었다니)
언젠가부터 유튜브나 각종 영상 매체들이 내 생활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영상매체로 인한 피로도가 급 상승했다. 오랫동안 구독했던 넷플릭스도 끊고 왓챠 플레이도 끊었다. 유튜브도 멤버십을 더이상 갱신하지 않았고 아침에 식사할 때만 그날 외국어 공부 영상만 보게 됐다. 이제는 유튜브로 모든 정보를 다 찾아본다고 하지만 나에겐 새로운 바보상자가 하나 더 생긴 느낌이랄까. 하루종일 유튜브만 본적이 있다. 근데 유튜브도 가짜정보가 원가 많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사실인양 당당하게 올리는 경우도 많고 혹은 의도적으로 낚싯성 자극적 썸네일을 활용하는 경우도 많고. 그러한 것들이 일종의 내 생활 속의 공해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라디오가 듣고 싶어졌다.
근데 라디오는 시간 맞춰 듣는 것은 힘들다. 그리고 요즘 라디오는 광고가 너무 많아서 흐름이 너무 자주 끊긴다. 그리고 잡담만 하다가 끝나는 라디오도 많다.
팟캐스트를 찾아서 듣기 시작했다. 예전엔 팟캐스트가 참 귀찮다고 생각했다. 누구 채널이 좋더라 해서 궁금해서 한번 들어가보면 이미 녹음된 재생목록들이 너무 많아서 "아니 이걸 언제 다들어" 이러면서 항상 시작도 안한거다. (나는 뭐든지 목록이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들어야 하는 일종의 정주행병이 있다)
근데 요즘엔 그런 팟캐스트에 알찬 음성 콘텐츠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꽤 보석같지만, 듣는 사람들이 몇없어 댓글이나 조회수가 별로 없을 때 괜히 내가 댓글 하나 달아주고 싶다. 혹시나 없어지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팟캐스트는 상대적으로 정제되었고 뎁스(Depth)가 있는 경우가 많다. 내용도 대본으로 잘 준비되어 있어서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때 그 때 필요한 파일만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다.
무엇보다 청각에만 의존해서 콘텐츠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영상 매체는 애초에 상상의 여지 조차 차단하지 않는가. 그래서 영상 매체는 보면 볼수록 뭔가 배운거 같긴 한데 머리가 멍하고 남는게 별로 없다. 애초에 두뇌 사고 활동을 둔하게 만드는 그러한 느낌이다.
팟캐스트는 다양한 카테고리로 정리되어 있어서 내가 원하는 분야의 음성 강의를 듣는 느낌이어서 좋다. 책으로 읽기 귀찮았던 것들을 누군가가 말로 쉽게 풀어주는데 이러한 인문학, 철학 팟캐스트 덕분에 멍청해진 머리를 다시 치유하는 느낌이다.
브런치도 비슷한 맥락에서 참 좋다.
기존 네이버 블로그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좋은 글들이 많다.
요즘엔 네이버 블로그는 절반정도는 광고나 낚싯성 혹은 단순 정보성 포스팅으로 뒤덮여 있지 않나. 순수하게 생각을 쓴 글들은 진짜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발견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뭔가 글다운 글을 읽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단순 팩트만 열거한 그러한 정보말고. 누군가의 생각과 주관이 담긴 글. 그러한 글들이 모인 곳이 브런치였다.
브런치는 온라인 플랫폼의 형태이지만 아날로그에 가까운 느낌이다.
애초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쓰기'라는 행위가 아날로그적 행위가 되어서 그런걸까.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글쟁이들이 모여서 그런지 끌리는 제목도 많고 다른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꿀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다.
특히 요샌 스타트업 쪽에서도 홍보차원에서 브런치를 연재하기도 하는데 난 이 방식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 기업 회사문화나 일하는 방식 등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알려주고, 가장 Fit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일종의 장과 같다.
옛날엔 스타트업 관련 브런치를 많이 읽었지만 요샌 그냥 여러 사람들의 일상, 보편적인 생각이 담긴 글을 읽게 된다. 가볍게 한편의 책을 읽는다는 마음으로. 무엇보다 그냥 일상 에세이나 끄적끄적이는 사람들은 원래 순수하게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해서 괜히 자극도 된다. 내 생각을 담은 글을 안쓴지 꽤 오래되어 브런치를 통해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자해서 시작했는데 그러한 자극들 덕분에 브런치 쓰는 습관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요약하자면,
항상 디지털이나 새로운 서비스를 먼저 써보기 좋아했던 나는
이제 다시 아날로그에 가깝게 가는 서비스에 정이 가기 시작했다.
비록 디지털의 형태를 빌리고 있지만 아날로그의 따뜻함이 묻어나오는게 바로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