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중국내 화제작 드라마, 넷플릭스 <겨우, 서른 三十而已>
올해만큼 허무했던 해는 없던 거 같다.
특히나 이제 곧 서른을 앞둔 사람들 혹은 나처럼 나름 뜻깊은 서른 초반을 보내고 싶었던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흔히들 서른을 인생의 전환점 중 하나로 손꼽는 만큼 사회에 발을 내딛고 난 후 처음으로 변하는 앞자리 수와 함께 '조바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무언가 내 인생의 큰 변화가 줘야할 거 같은 그러한 조바심.
나는 의외로 서른이 되는 마지막날을 재작년에 담담하게 보냈다. 부모님이 당신의 노후생활을 위해 마련한 바닷가 근처 작은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은 후 아버지가 매번 틀어놓는 외국 영화 (아버지는 인디애나 존스 영화 및 007 시리즈물을 좋아하며 한국 TV 쇼 프로그램을 거의 보지 않는다)를 흘깃흘깃 보면서 SNS으로 나와 같이 서른이 될 동기들은 지금 이시간 무엇을 하나 눈팅을 하고 있었던 거 같다.
보통은 밤 11시쯤되면 잠들 준비를 하시는 부모님이 그 때는 나름 12월 31일이라 그런지, 이불까실 준비를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는 오랫동안 봉해둔 약주를 꺼내시더니 "술 한잔하자"
이제 내년엔 꼭 결혼하자
사실 이 말은 매년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집이 지방이고 내가 늦둥이에 속하기 때문에 스무살 중반때부터 나는 부모님에게서 결혼을 재촉당했다. 그 때마다 나는 "서울에선 내 나이에 결혼하는 사람 거의 없어요"라는 미약한 방어를 하며 둘러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내 동기 중에 29살에 결혼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묘하게 상황이 바뀌었다. 코로나가 많은 결혼식의 발목을 잡았음에도 나와 동갑이었던 동기들의 과반수 이상이 올해 서른 혹은 서른하나가 되자마자 모두 결혼을 해버렸다. "내 또래에 벌써 결혼하는 사람은 없어요"라는 내 주장이 점점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누군가 결혼하면 진심으로 축하해주곤 했는데 올해는 마음이 무거웠다. 친구들이 은근슬쩍 에둘러서 "넌 결혼 할거야?" 라고 물어오면, "몰라, 그동안 돈 뿌린 거 생각하면 비혼식이라도 해서 차라리 회수하고 싶은 심정이야"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
시간과 나이에 대해서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였다.
학교 휴학도 거의 원하는 만큼 하면서 세계 여행을 했고, 사회가 요구하는 일종의 숙제들을 하나씩 하는 것보다
20대때 하고 싶은 것 다 해보자라는 마인드가 더 강했다.
나는 서른이 되어도 꿋꿋이 주변에 동요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갈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혼'이란 건 내 인생에서 흰 백지에 새겨진 희미한 목표였는데
어느덧 주변에 어두워지면서 그 희미한 목표가 상대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중순쯤 한 중국인 친구가 뜬금없이 위챗(중국의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연락안한지 한 1년정도 지났는데 "이 드라마 보다보니 갑자기 너가 생각났어" 라며 중국드라마 《겨우, 서른 三十而已》 관련 중문 기사를 보냈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핫한 드라마 중 하나며 많은 중국 여성들이 공감하면서 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친구는 "기존 중국 드라마와는 뭔가 달라, 보면 알게될거야"란 메시지를 덧붙였다.
이후 이 드라마를 언젠가 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가 미뤄두고 있었는데 연말이 다가오면서 넷플릭스가 계속해서 어떤 드라마를 꾸준히 추천하고 있었다. 난 넷플릭스 영어로 언어설정해놓은 상태였는데 넷플릭스 영문명으로 <nothing but thirty (겨우, 서른의 영문명)>로 나에게 계속 노출되었다.
올해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이해서 이 드라마를 몰아봐야겠다 (중국드라마는 우리나라 드라마보다 호흡이 길어서 최고 40회 이상이기 때문에 시작할 때 큰 맘 먹고 봐야한다) 고 다짐했다.
중국판 섹스앤더시티라고도 불리는 《환락송 欢乐颂》과 비슷한 드라마라고 기대했다. 조금은 비현실적이지만, 다양한 배경환경을 가진 도시여성들이 제각기 케미를 자랑하며, 이야기를 펼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무겁진 않으면서,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는 아니지만 잠시 현실 판타지를 그려볼 수 있는 그런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화를 보자마자 난 그것이 모두 나의 큰 오산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건 3-4일밤을 몰아서 볼 드라마가 아닌, 한편씩 한편씩 긴 호흡을 가지고 천천히 봐야하는 드라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다른 중국 드라마와 다르게 오버스러움, 가벼움이 없고 오히려 진지하고 담백하게 30대 여성들이 요즘 가질 법한 고민들을 그려냈다. 특히 현재 중국의 대도시 여성들과 한국 여성들의 사회상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동안 중국 드라마에 대한 편견이나 거부감이 있었던 분들이라도 이 드라마는 크게 이질감 없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든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서로 어느 분야에서 "더 보수적이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다" 란 차이가 조금씩 있을 뿐이지, 사회상으로 비슷한 면모가 많다. 특히 결혼에 관해선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서른이 되기전에 결혼하기를 장려하는 문화이고, 결혼하지 못하면 싱글개(单身狗), 안팔리고 남은 여자(剩女)라고 자조하는 단어가 있을 정도이다.
《겨우, 서른 三十而已》은 여성에게 일생의 숙제처럼 내려지는 결혼-임신-육아 이 3단계에 각각 놓여진 30대 여성 3명의 이야기이다.
능력 좋은 여성이지만, 30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해 부모님에게 매번 재촉당하는 '왕만니'
평범하게 결혼했지만 남편과 계획하지 않은 아이를 가지자 어찌할 줄 모르는 '쫑샤오친'
남편과 자주성가해 넉넉한 환경에서 남편 내조와 아이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꾸지아'
이 3명의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가지게 되는 고민과 시련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오늘날의 30대 여성들의 공감을 받고 있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를 보는 30대 여성들이라면 본인의 상황과 가장 비슷한 현실을 보여주는 캐릭터를 제각기 응원하면서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될 것이다. 혹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너무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 정 반대의 캐릭터를 응원할 수도 있다. 중국 포털에서 잠시 검색해본 결과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기많은 캐릭터가 상류사회에 갓 진입해 가장 이상적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꾸지아' 였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물론 '꾸지아' 역시 아이 교육과 남편 내조를 하면서 겪게 되는 갈등으로 고민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외유내강형, 목표지향적 캐릭터는 많은 중국인 30대 여성들이 원하는 워너비에 가깝기 때문에 지지를 받는 게 아닐까. 정작 지극한 현실적인 '왕만니'나 '쫑샤오친'은 본인과 상황이 비슷해 애써 외면하고 싶을 수 있다. 마치 옛날 드라마 <미생>이 너무 현실적이여서 드라마보면서 스트레스 받는다고 했던 것처럼.
문득 나에게 이 중국 드라마를 추천한 친구는 왜 이걸 보고 날 떠올렸다는 걸까 궁금해졌다. 아직 5화까지 본 상태에서 각각의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겪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상황상 가장 나와 비슷하며, 내가 공감하는 캐릭터인 '왕만니'때문인걸까.
'왕만니'가 고향을 떠나 대도시 상해로 떠날 때 부모님에게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라고 큰 소리친다. 이후 서른이 되자 부모님은 그 약속을 이행하라며 '왕만니'를 재촉하고 '왕만니'는 마지못해 부모님이 주선해주는 선자리에 나가지만 상대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명품 브랜드에서 일하며 수많은 상류사회층을 만나오며 막연히 "조건 좋은 상류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여느 드라마에서 나오는 신데렐라 근성을 가진 평범한 여성 캐릭터와는 다르다. 오히려 왕만니는 현실적이고, 아무리 좋은 조건의 남자라도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만나지 않는다는 주관을 가지고 있다. 일 만큼이나 사랑, 결혼에 대해 똑부러지는 면모를 보여주는 듯한 '왕만니' 역시 서른이 되면서 주변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더이상 예전처럼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한다"란 큰 소리 치기엔 조금씩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숫자 나이 30은 그 아무리 뚜렷한 인생의 주관을 가진 사람들 역시 잠시 흔들리게 만든다. 아니, 잔잔한 바람으로만 여겨졌던 주변이 점점 거센 바람으로 바뀌어가면서 주관의 나뭇가지도 그에 휘어지는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이 때 그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혹은 끝까지 버텨내거나 그것은 결국 본인이 얼마나 그 바람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에 달린 게 아닐까.
나는 비혼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결혼 후 건강하게 출산하려면 결혼해야 하는 나이 마지노선" 이라는 이유로 인생의 숙제처럼 결혼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다. "결혼 후 출산" 해야 한다는 것 역시 지금은 예전만큼 의무사항은 아니다. (물론 우리 부모님이 들으시면 벼락맞을 소리하면서 노발대발하실 것이다) 나이라는 조건과 상관없이 살면서 누군가와 평생 같이 살고 싶다는 확신이 든다면 그 때쯤 여유롭게 주체적으로 결혼을 하고 싶다.
드라마 《겨우, 서른 三十而已》를 1편씩 천천히 아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아직 5화까지 본 상황이기 때문에 향후 이야기가 어찌 진행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난 극 중 왕만니가 결혼에 대한 조바심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인생을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만약, 그 여느 드라마처럼 한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는 결말이라면, 내가 이기적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실망스러운 결말이 아닐까.
'서른'은 완성형 어른이 되는 시점이 아닌, 미완성형 어른이 겪는 사춘기에 불과한 나이이다.
우린 겨우, 서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