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내가 18살 때, 당시 <프리즌 브레이크>로 인해 한국에서 미드붐이 일었다.
난 당시 고2였기 때문에 사실 이 미드라는 신생 문화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당시 내 또래 사이에선 미드란 것이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외국 영화' 보단 아직 '한국 영화'를 더 선호할 나이이고, 얼굴과 이름 외우기에도 벅찬 미국 배우들이 현실감있게 다가오지 않을 나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서 영화쪽에 조예가 깊은 친 언니가 오랜만에 집에 내려왔다.
언니는 집에 내려오면 항상 최근에 자기가 감명깊게 봤던 영화들을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여전히 난 <반지의 제왕> 본 썰을 거의 1시간에 걸쳐 나에게 설명해준게 생각난다. 당시 어찌나 이야기를 생생하게 하던지 이후 난 <반지의 제왕>을 보지 않았음에도 이미 본 것으로 착각하게 될 정도 였다. (난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상당히 늦게 봤다.)
그런 언니가 요새 '미드'란 것에 빠져 있다며 <프리즌 브레이크> 썰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한 남자가 감옥에 갇힌 자기 형을 탈출 시키기 위해 감옥 맵을 등에 문신으로 새겨 들어간다"
아니 설정 자체가 "이게 드라마라고?" 나는 조금 황당했는데,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꼭 보기로 다짐 했다.
당시, 고2이라 한창 공부해야할 때 여서 볼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마침 방학이 다가왔다. 물론 방학 때도 계속 학교를 가야했지만 상대적으로 빨리 마쳤기 때문에, 집에 오자마자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했다.
기존 클리셰로 가득한 한국 드라마에만 익숙해있던 나에게 <프리즌 브레이크>는 마치 영화 스케일로 저 세상 수준의 드라마여서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왔던게 아직도 생각난다. 당시엔 지금처럼 넷플릭스로 편히 볼 수 있는게 아니어서 판도라 TV 로 날밤새워가며 봤다. (추억의 판도라 TV. 당시 외국 드라마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시즌1을 거의 이틀만에 몰아보고 시즌2는 약간 늘어지면서 본 기억이 난다. 항상 서브병이 있어서 남주 스코필드 보단 조금 찌질(?)한 듯 하지만 시도때도 없이 "마리크루즈"를 외쳐대던 사랑꾼 수크레를 좋아했다. 지금도 스코필드같은 '프리티보이'보단 남자답게 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걸 보면 취향은 참 한결같다.
거의 본지 10년도 더 된 미드이고 짧은 기간 내에 몰아본 드라마였기 때문에 기억이 꽤 흐릿하지만 그래도 나름 첫 미드라고 다른 미드보다 꽤 디테일한 장면이 드문드문 생각난다. 죄질도 정말 나쁘고, 매번 훼방을 놓아 정말 때려주고 싶은 악역 '티백'이 손목 잘렸는데 그것을 또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막 달려가던 장면에 꽤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나는 약간 사지 절단하는 것에 대한 공포증이 조금 심해서 그러한 장면을 여전히 보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티백 죄질이 소아강간 및 살해 였다는 것 자체가 엄청 충격적이긴 한다. 최근 출소로 인해 논란이 된 조두순이 탈옥하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지 않는가. 물론, 드라마니까 티백의 딱한 가정환경과 약간 비굴한 그의 태도로 당시엔 '미운데 너무 미워할 순 없는 캐릭터'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소름돋는 일이다. 약점이 잡혀서 스코필드도 어쩔 수 없이 티백을 탈옥계획에 합류시키긴 하지만, 자신의 형을 구하기 위해 심각한 범죄자를 탈옥시키는 스코필드의 행위는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문득,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가족의 의무와 범죄 사이에 선 딜레마, 전차의 딜레마대목이 떠오른다.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사형을 앞둔 형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인가. 혹은 형을 구명해낼 방법이 없어 그저 절망한 채 그대로 내버려둘 것인가. 물론 스코필드의 애초의 목적은 형만 무사히 빼내는 거였지만, 결국엔 그는 꽤 많은 사람들의 죽음 및 희생을 수반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드라마를 볼 때 스코필드 탈출 성공을 응원한다. 그가 탈출 계획이 들키거나 위험에 처해있으면 마음 졸이기도 하고, 그를 방해하는 사람들 혹은 그를 저지하기 위해 정당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한다. (특히 FBI나 교도소관 등, 따지고보면 그들은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매력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애초에 주인공이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걸까. 이는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선 나를 제외하고 '주인공'이 없다. '나'의 입장에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무슨 일이라도 해서 그것을 해결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우린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의 입장에 나를 대입시킨다. 그래서 애초에 선한 의도를 가진 '나'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미울 수 밖에 없고 그 입장에서 상대적인 악역이 설정된다. (절대악은 없다. 내 입장에서의 악역일뿐 타자의 시선에선 악역이 아닐 수 있다)
이런 주제에 관해 물음을 노골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데스노트>이다. 한 때 인터넷 짤로도 많이 인용되었을 정도로 인기였던 <데스노트>는 내가 고 3 때 만화책 10권을 다 사서 소장할만큼 사랑했는데 <데스노트>가 딱 저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이 2명인데 라이토와 L 이다. 여기서 독자는 누구에게 나를 대입시키냐에 따라 악역을 다르게 정의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천재' 캐릭터에 흥미를 느끼게 되는 거 같다. 특히 난 어렸을 때부터 어떠한 분야이건 천재가 나오는 영화만 따로 검색해서 볼 정도로 좋아한다. 셜록홈즈 전집과 명탐정 코난 시리즈를 초딩때부터 끼고 살아서 그런가. 그런 천재 캐릭터에 매력을 느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데스노트>에선 일단 이 천재가 두 명이다. 라이토와 L. 여기서 라이토는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고 "죄질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형벌만 받는, 혹은 합당한 처벌을 받지 못하는 범죄자"들에 분노를 느낀다. 법이 해결하지 못한다면 본인이 단죄를 해야한다란 사명감을 가지고 '키라'가 된다. 라이토가 분노를 느끼는 포인트는 우리가 요새 뉴스를 보면서 느끼는 분노와 비슷하기 때문에 라이토의 행위가 비록 불법적인 행위이지만 사람들은 그의 목적과 의도에 열광한다.
반면 L은 냉정하게 목적이 무엇이었던 간에 사회의 울타리 속 범죄를 저지르는 키라와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두뇌를 가진 은둔형 천재이다. 전형적인 오타쿠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한다. 독자들은 라이토와 L 중 누구에게 자신을 대입하느냐에 따라 악역을 다르게 설정한다. 만약 라이토에 이입한다면 L이 정말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고, 밉겠지만 L에 이입한다면 라이토가 얼른 잡혀서 단죄 받길 원할 것이다. 물론 현실 속에서 라이토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가 매력적인 것도 꽤 크게 작용한다.
나 역시 그 땐 그랬는데, 지금은 또 다르다. 지금 다시 데스노트를 보면 L을 응원하게 될 거 같다. 만약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갑자기 스코필드나 라이토 같은 사람이 범죄자 탈옥 시키거나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목적과 사정이 무엇이었던간에 소름부터 탁 돋지 않겠는가.
<프리즌 브레이크>가 시즌 5 까지 나왔다는 사실을 최근 넷플릭스에서 확인하고 알게됐다. 내 기억으론 시즌 3 까지만 봤었다. 그 마저 시즌 3는 시즌1,2 에 비해 조금 늘어져서 시즌 4가 나오니 마니 말이 나왔던 거 같은데 시즌 5가 나왔다니. 혹시나 해서 검색했는데 데스노트 영화 3편 시리즈도 모두 나와있다. 아니 심지어 넷플리스오리지널로 데스노트 미국판도 있다. 아시아 영화를 서양으로 리메이크한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데 이건 뭔가 호기심을 엄청 자극한다. 그런데 오늘 꼭 봐야할 거 같단 생각이 든다.
흔히 좋아하는 책은 여러번 본다고 하지만 드라마는 좀처럼 다시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리즌 브레이크>를 다시 보기로 최근 결심한 이유는, 14년전의 내가 그 드라마를 봤을 때와 지금의 내가 그 드라마를 다시 봤을 때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란 확신이 들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