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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n 28. 2021

선함에 대한 강요…

슬기로운 의사생활 2 EP. 2

‘아아아 아아아~!’, ‘ㅋㅋㅋㅋㅋㅋ’


글쓰기 중에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 뭔 소리인가 하면 ‘개소리’라는 말이다. 그냥 읽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써 갈기고 내 내면이 이렇다고… 논리나 맞춤법 같은 것 따지지 마…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 나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쓰이는 게 내 내면인 것은 확실하니까 거기서 너도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면 함께 즐겨주길 바라. 정도가 되는 기법이라고 나는 혼자 해석한다.


나 같은 겁쟁이는 완벽주의자가 되기 쉽고 그런 사람들은 형식의 틀에 갇혀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보다 제대로 된 구성, 표현법, 맞춤법을 신경 쓰기 시작하고 그럼 결국에는 글은 산으로 간다. 과거의 내 글 중에서 예쁜 글이 가끔 눈에 띄는데 그런 글은 어김없이 내 생각이 아니라는 자각이 든다. 자기 검열에 걸려서 갈리고 갈려 동글동글 해졌고 예뻐졌지만 그런 글은 내 글이 아니다.  나의 의식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그냥 그래야만 남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글을 내가 써내려 갔다는 것을 즉시 알아챌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의 내면은 나의 위선을 미친 듯이 물어뜯어서 너덜너덜 해진 나는 또 얼마간 전혀 글을 쓸 수 없게 되어버린다.


남의 눈에 완벽한 글. 그것은 공격받지 않기 위한 나의 완벽한 위장술.


‘이구이구이구이구….’, ‘ㅋㅋㅋㅋㅋㅋ’


뭐하냐고? 지랄을 좀 하는 중이다.

사람에게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이 나이가 되도록 방출되지 않은 지랄이 아직 한 가뜩이나 내 안에 남아있다. 그래서 가끔씩 이런 식으로 지랄을 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지 못한 지랄이 내일이면 또 미친개가 되어 나를 사정없이 물어뜯어버릴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면서 또 저 글 지워. 없애버려…라고 머릿속에서 아침나절 내내 지랄을 하겠지.


난 틀에 들어가는 것을 미친 듯이 싫어한다. 그 속에 있으면 숨 막힘을 느끼고 죽어버릴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그럼에도 남들도 다 이렇게 참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도 참아내야 한다고,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큰일 난다고 나를 스스로 못살게 굴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아니 종종 사람들이 나와 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내가 너무 ‘역지사지’를 글자 그대로 내면화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면 감각하지 못한다.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의 감각을 당연히 공감하지 못하고 공유하지 못한다. 만약 한다고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미스 커뮤니케이션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마비된 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 것을 최근 드라마를 보면서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이 작품도 미리 이야기하여 둘 것은 나는 디테일에 약하다는 것이다. 전편을 다 본 것도 아니고 띄엄띄엄 시청한 드라마이고 특히나 시즌2를 1화는 보지도 않고 2화부터 본 것이라서 내가 이해하고 해석하는 바는 그냥 뇌피셜이라는 것을 말해 둔다.


드라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2이다. 따뜻한 인간미의 의사 5명을 쫓아가면서 병원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이야기들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해주는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어느 장면이 마음속으로 훅하고 들어왔는데 그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에게 갑자기 들어온 그 장면은 소아과 진료 장면이었다. 아이는 큰 병의 치료를 마치고 이제 실밥을 뽑기 위해 내원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밥을 뽑는 것이 무서운지 자지러지게 놀라고 소리치고 난동을 피운다. 의사는 몇 번의 시도를 더 해보고 다른 환자를 진료하고 다시 몇 번의 시도를 더해보지만 결국 실밥 뽑기는 실패로 돌아간다.


아이가 왜 저렇게 예민하지? 버릇이 없는 아이인가? 부모가 참 고생이 많다 등의 감정이 지나가면서 많은 시청자들이 부모와 의사의 난처함에 공감하고 아이가 너무 민감하게 굴고 있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연출이었다.


다시 장면이 바뀌고 병원 일과가 끝나고 소아과 의사가 밖으로 나와서 홀로 남겨져 있는 아이의 엄마를 발견하고 다가선다. 아이는 아버지와 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갔고 엄마는 치료를 마치지 못한 아이의 태도에 실망해서 맘이 무척 상해있다. 그래서 아이들 따라가지 못하고 병원에 홀로 남아 있는 엄마에게 의사가 다가가며 대화는 시작된다. 아이가 너무 예민해서 미안해하는 엄마… 그러나 의사는 그 엄마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아이가 예민한 게 아니라 암 치료를 다 참아낸 아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순간 가슴이 꽉 조여왔다. 그 긴 치료기간 동안 아이가 받은 고통,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아이의 마음에 공포와 불안이라는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커져 간 공포는 치료가 다 끝난 지금의 시점에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안하게 꿈틀 되고 있는 것이고 그 기분 나쁜 느낌이 아이는 너무 싫은 것이다. 상처가 아픈 것이 아니라 그 공포와 압도되는 기분이 너무 싫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의 모습은 누구도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심지어 아이 자신조차 아픔이 아니라 감정의 왜곡인 것을 아픈 통각으로 착각하여 자지르지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우면서도 자신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스스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고 설명하기에는 아이는 너무 어리니까.


의사 자신도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이의 그런 반응을 바로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내적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고통이 치유되지 않았다면 그 반응에 회피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고, 극복하고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에 공명하여 위로를 건넬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의 그런 반응은 그의 내면을 다른 각도에서 비추어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이제 엄마는 의사에게 병원을 떠나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냐고 질문을 한다. 의사는 그런 일 없다고 대답을 하고 엄마는 의사의 별명이 자기들 사이에서 ‘생불’이라면서 그런 의사 선생님이 떠나지 않아서 정말 안심하고 있다고 감사와 격려의 말을 전한다.


참 훈훈한 장면이다. 그런데 내게는 조금 다른 해석이 뒤따라 온다.

의사의 내면은 말랑말랑하다. 소아과 일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지만 이런 기질의 사람들은 아주 쉽게 심적 상처를 받게 된다. 상대의 잘못된 행동도 쉽게 나무라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또 정의감도 넘쳐서 모든 것을 바로 잡고 싶은 욕구 역시 강하게 발동하는 타입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내면의 상처들이 쌓여가는 것이다. 이런 예민한 사람들은 오히려 외면이 쌀쌀맞고 차가울수록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효과가 있지만 생불 정도까지 가버리면 타인의 기대에서 쉽게 도망칠 수 없다.


너무 갈려나가는 내면을 보호하기 위해 도망치려 했지만 사랑을 위해 병원에 남았고 무언가를 선택했으니 대가를 치루어야 하겠지만 이 선생이 너무 많은 헌신으로 자신을 혹사하고 갈아 넣지 않기를 바라본다. 이미 내면에 아픔이 가득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자신의 아픔이 쉽게 연동되어 상처 받는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면 서서히 거리두기가 가능하지만 아니라면 자신이 추구하는 ‘선’이라는 방향성에 의해 너무 많은 외압을 그대로 내면화하게 되고 어느 순간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까지 함께 밀려오면 이런 사람은 그 압력에 눌려 침몰하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나 의사로서 생명을 다루는 사람은 죄책감이라는 올가미에서 쉽게 벗어나기가 힘들 것이며 아이들의 순수함을 좋아하는 의사라면 그 아픔과 고통 역시 상대적으로 엄청날 것이다.


우리는 아주 쉽게 남을 격려하고 칭찬한다. 그리고 그런 말속에는 아무 악의가 없다. 좋은 의사를 좋은 의사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미스 커뮤니케이션은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다. 그러니 상대의 선의도 악의도 함부로 재단하고 결론 내는 것을 삼가야 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여러 각도의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주지만 뉴스나 나의 눈은 그냥 내 앞의 일방의 정보만 내게 쥐어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쉽게 남에게 선함을 강요하게 되는 것 같다. 진짜 선이 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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