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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n 28. 2021

공감

따뜻함과 난폭함의 양면성

이 시대에 가장 폭력적인 말이 되어버린 단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만 자각할 수 있다. 우리는 상대의 감정을 절대로 공감할 수 없다. 그런데 할 수 없는 것을 사회는 자꾸 하라고 강요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공감능력이라는 것은 결국 상상력의 다른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적으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절대로 들여다볼 수 없다. 그냥 그 사람이 어떠할 것이라고 내가 가진 경험 안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각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공감이라는 단어의 본의미이다. 그런데 그걸 엄청나게 숭고한 가치인 것처럼 이 시대는 포장하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대중이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같이 공유하는 경험이 없다면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 여기 성폭행 피해자가 있다. 당신은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녀가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내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경험 중에서 그나마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내적 고통의 경험을 떠올려 그녀의 감정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것이다. 인생을 밝게만 살아와서 내적 고통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이 쉽고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 사람도 물론 내적 고통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그냥저냥 잘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일이지 극복 못할 두려움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만약 그런 당신이 그녀의 고통에 대해 공감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냥 낭망적인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


모든 성폭력의 고통도 경험자에 의해 똑같이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상황 그리고 기질에 따라 겪게 되는 내적 고통은 모두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개에 물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따위 것 별것 아니라고 되뇌며 내적 상처를 서둘러 봉합해 버린 어떤 피해자는 그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다른 피해자를 오히려 경멸하고 비난하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녀 안에 서둘러 봉합한 그 상처는 무의식에서 아물지 않고 있는데 자꾸 그 상처를 자극하는 그 상황이 너무나 짜증스럽게 느껴져서 그 감정에 대한 배출로 오히려 같은 피해자를 더 사납게 공격할 수도 있는 것이 공감의 다른 모습이다.


피해자를 보고 떠올린 자신의 내적 경험이 그럭저럭 극복할만한 것이고 그런 긍정적인 극복의 경험을 내재하고 있다면 당신은 피해자를 보면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피해자를 격려해서 일으켜 세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자신 안에 있는 긍정의 경험이 쾌감으로 당신에게 작용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것을 피해자를 통해서 다시 경험해 보고 싶은 욕구를 당신은 내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지만 그런 작용을 당신은 전혀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극복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내적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는 인물에게 피해자의 고통을 공감할 것을 호소하면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 그것도 그 사람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이 나타날 것이다. 자신의 내적 고통을 떠올리기 싫은 방어기제로 인해서 상대의 고통을 아주 얕잡아 보고 평가절하하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상대의 고통을 아주 높게 평가해서 자신이 겪고 있는 그 고통 자체와 똑같이 치환하여 생각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 내적 고통은 어마어마할 것이고 그 감각은 그 사람의 감정을 크게 격앙시켜서 매우 공격적인 반응이 밖으로 도출될 수도 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왜 피해자의 감정에 공감하면서 저런 공격적인 반응을 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할 것이며 아마 그 사람을 미쳤다고 판단하게 될 수도 있다.


이제는 내경험과 내 판단을 한번 이야기해보겠다.


나는 어떤 피해자의 감정을 공감하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겪고 있는 이 더럽고 짜증 나는 감정을 나 아닌 누군가에게 경험시킨다는 것이 내게는 그 자체로 너무 기분 나쁜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을 공감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그 안에 나의 더럽고 추악하며 파괴적인 이 감정을 그대로 주입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용납할 수 없는 폭력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나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은 가끔씩 나의 고통을 상대에게 전이하고 싶은 욕망이 되어 상대를 괴롭히고 싶다는 삐뚤어진 공격성이 되어버린다.


공감하라고 하는데 나의 고통을 만약 당신에게 주면 당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수십 년 동안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갉아먹고 있는 이 고통을 당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겠는가? 공감할 수 없고, 이해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당신은 같은 인간으로서 안쓰럽게 여기며 자비롭게 바라볼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인 내적 고통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마비를 선택한다. 일정한 틀 안에 갇혀서 그 질서를 인정하고 따라가면서 안정감을 찾게 되고 끝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그 질서에서 빠져나가는 다른 타인을 감시하고 마비가 풀린 개인의 정신을 공감이라는 폭압적 언어를 사용하여 다시 마비시켜서 특정 질서를 철저하게 쫓아가게 만든다.


공감은 한없이 따뜻한 말일 수도 있지만 한없이 폭압적인 말일 수도 있다. 그런 특성을 당신은 이해하고 상대에게 공감을 강요하는가? 공감은 위로일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폭력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정도는 알고 상대에게 공감을 요구했으면 좋겠다. 공감을 이야기하는 당신의 태도에 상대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스며있지 않다면 상대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리고 그 말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러니 공감을 이야기할 때 상대가 움츠려 든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내적 고통으로 아픈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한 번쯤은 상기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당신에게 있기를 희망해 본다. 아니 우리 사회에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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