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고 소리치기
우리는 괜찮지 않다.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괜찮지 않다. 우리 가족도 괜찮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런데 오랜 시간 그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제야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가족이 경상도에서 경기도 부천으로 올라온 그 순간부터 우리 가족은 괜찮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애써 인지하지 못했을 뿐.
아버지의 지친 어깨, 주름, 안 좋은 청력… 모두 그냥 삶에 지친 흔적이다. 일생을 저렇게 열심히 일했다면 당연히 지금 즈음에 걸맞은 보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 번도 다른 것에 한눈 판 적도 없이 이리도 고단한 삶을 살아오셨으면 이제는 마냥 행복해도 될 일이다. 그런데 삶의 낙이 없다. 어두운 귀로 매일 유튜브에서 영상들을 이리저리 찾아보는 것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붙이기도 힘들고 가족과의 대화도 항상 결과가 좋지 않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형제 많은 집에 거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열심히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 했고 배우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여러 형제들에 밀려 아버지의 차례에는 무엇을 배우러 다니는 것을 할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형제 하나라도 제대로 교육시키는 것이 모두 힘겨운 시기였었고 학교보다는 소먹일 꼴을 베다 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지금도 모든 아이들이 공평한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어릴 적에는 자신의 삶을 살 기회라는 것이 원체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아버지의 한이 되었다.
시골에서 농기계 수리를 하면서 4형제를 보게 된 아버지. 어느 날 아버지는 형제들을 경기도 부천으로 보내서 교육을 시킬 것을 결심하신다. 어찌 보면 지금의 해외유학과 똑같은 개념으로 우리들을 경기도에 올려 보냈다. 그러면서 가족들은 분리가 되었다. 가족들이 내내 함께 지내다가 갑자기 둘로 쪼개진 것이다. 우리들은 외할머니와 함께 부천에서 지내고 되었고 부모님은 한동안 시골에서 터전을 정리하셨다. 형제들에게 자신이 갖지 못한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 모두 지독하게 무지했고 무감각했던 것 같다.
그 이후 생각해보면 우리 형제들과 아버지는 접촉이 거의 사라졌다. 아버지와 만든 추억이라고 할 만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아버지는 용접일을 하시기 위해 전국으로 일을 다니셨고 어머니도 부천에 올라와서는 생전 해보지 않은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하셨다. 두 분 다 시골에 있을 때보다 배는 고단한 삶을 시작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면서 가족들이 함께 대화하고 이야기하는 시간들은 점점 줄어들어 갔는데 그 외로움과 단절감을 아버지는 어떻게 참아내신 것일까? 그 고단한 삶을 어머니는 어떻게 이겨내신 것일까?
환경이 바뀌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돌이켜 보면 내 삶도 크게 크게 흔들렸고 불안했다. 아주 꼬꼬마일 때부터 함께 놀던 친구들과 분리되어 부천으로 올라왔을 때 나의 억양에 사투리가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다른 아이들은 그것을 놀리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일어나 읽기를 할 때면 기존과는 다르게 아이들이 웅성 되고 놀려되는 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어’와 ‘의’를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특유의 억양이 아이들의 먹잇감이었다. 그렇게 억양에 신경 쓰다 반년만에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에 내려갔을 때 이번에는 서울말을 쓴다고 아이들이 핀잔을 주었다. 순간 난 정말 당혹스러웠다. 무언가 소속감 없이 떠도는 느낌, 5년을 고향에서 학업 하다 마지막 6학년을 다른 곳에서 보내고 졸업하는 난 그 순간 모두에게서 단절되어 고립되어 버렸다.
그 이후 시작된 중학생 시절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매일 만원 버스에 몸을 구겨 넣고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가서 지친 몸과 정신으로 그 딱딱한 분위기의 중학교 수업을 버텨내는 것은 나름 까불기 좋아하고 활달한 기질의 나를 숨 죽은 배추처럼 축 늘어지게 만들었고 그렇게 난 하나의 공부하는 기계들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난 정말 놀라울 정도로 얌전해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금의 내 성격은 어릴 적 까불이와 단 하나의 접점도 없다. 난 길들여지고 있었는데 그런 자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그 시절에는 버티고 적응하며 낙오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시골에서 4형제를 공부시키기 위해 부천으로 올라왔고 부모님은 이제 함께 있지도 못하고 계속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시고 어머니도 전혀 해보지 않은 일을 하시면서 피곤해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 형제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향에서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사도 여러 번 다녀야 했고 친구관계도 얕게 유지되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넘어가면서 모두 끊겨버렸다. 이상한 일이다. 왜 난 그렇게 친구들과 연락을 끊어버린 것일까?
그들과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친구들을 가리는 편도 아닌데 나의 교유관계는 모두 뚝뚝 단절되어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이사를 가면서 전학을 떠난 것이 큰 이유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분명 난 저때부터 괜찮지 않았다. 어린 난 저때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가족도 지금 보면 기러기 가족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식구들 간의 대화와 소통이 이때부터 문제가 있었고 서로 그냥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 외에 다른 어떤 대화도 없었던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문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린 서로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보듬어야 할 시기에 뿔뿔이 단절되어 고립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4형제 우리는 모두 그냥 참아내고 인내하면서 열심히 살기만 한 것이다. 그러면 그냥 뭔가 잘될 것 같았지만 우리 안에서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