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탄화
길들여진다는 것은 어떤 질서를 자신 안에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만약 당신의 속성과 맞고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길들여 짐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길들여 짐에는 부작용 역시 존재한다. 자신의 기질과 맞지 않는 것을 자신 안에 덮어 씌울 경우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다는 것이다. 시스템, 공동체라는 것은 하나의 질서이면서 또한 하나의 억압이다. 모두 같은 것을 내재화하면 혼란이라는 것이 사라진다. 그리고 서로 간에 같은 내용을 공유함으로써 공감과 소통에도 도움이 되는 반면 그 질서와 내면적으로 궁합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심리상태가 평평해질 수 있다. 즉 무기력해진다는 것이다. 아주 잘 길들여진 채 세상에 나온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난 곳이 없고 둥글둥글해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자기주장이 없고 의욕도, 욕심도 없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도 전혀 끈끈함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냥 순간순간의 자극을 쫓아 움직이며 사람들에 쓸려 함께 흘러가지만 어느새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자기만의 공간에 칩거하게 되는 것이 이런 길들여 짐의 폐해라고 할 수 있겠다.
생각해 보면 난 어느 순간 꽤 평평해져 있었던 것 같다. 특별하게 내세우는 내 생각도 취향도 없었고 그나마 ‘정의’라는 관념에는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 ‘정의’라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많은 부분 내면에서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꼼수를 부리면서 어른들의 눈을 속이고 딴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엉뚱한 방향에서 정의에 집착하게 만드는 그런 내적 성향을 만들어 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지금에 와서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난 잘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축이 우리에게 키워지듯이 나는 그렇게 길러지고 있었고 숨 막힘에 이런저런 잡다한 것에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결석 한번 하지 않고 그 숨 막히는 중학교, 고등학교 6년 과정을 이수한 이후에는 잘 길이 들어서 무기력해지고 만 것이었다. 원래 야생의 동물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자기 살 방법과 생각, 취향 등이 성립되는 법인데 나는 시스템에 걸맞은 성격도 아니면서 그 속에서 찌그러져 있었으니 이제 내면이 평평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에는 다른 아이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의식도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지 왜 모든 것에 이렇게 관심이 없고 쉽게 싫증을 내고 대면 대면해지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그냥 나 자신이 원래 이런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그냥 살아가게 되었다.
길들여 짐은 일종의 ‘마비’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주변을 둘러보아도 자신만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 방법이 없다. 다른 애들도 특별히 행복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처럼 심각한 것 같지는 않고 다들 그렇게 또 흘러가면서 산다. 그렇지만 그들 중의 일부도 살아가면서 이 ‘마비’가 풀리는 시기가 오면 세상이 이상하게 느껴지고 자기 자신도 뭔가 모르게 삐걱거리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아주 일부의 승자들 그러니까 이 시스템의 상층부에서 많은 것을 누리게 되어 그것을 즐기면서 감각하는 것이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 문제없을지 모르지만 아마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즈음에 아니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갑자기 자기 삶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감각이 찾아와 혼란스럽고 어지럽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길들여 짐이 풀려가는 현상이라는 것을 그들은 자각하게 될까? 잠시 자각하더라도 삶은 그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관성에 의해 한참을 흘러온 뒤라 어디로 방향을 바꾸기에는 너무 막막할 테니 말이다.
길들여진 존재들은 야생에서 살아갈 수 없다. 다시 야생으로 나가려면, 그래서 자기만의 삶을 알아서 개척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시행착오와 시련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 성공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물질적 성공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만족도 반드시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길들여지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기질의 사람들은 기어코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제 그 몸짓을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