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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n 29. 2021

조커

호아킨 피닉스

일 년도 훌쩍 넘은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이제 해보려고 한다.


그러기 전에 먼저 다시 한번 비트겐슈타인을 소환해 볼까 한다. 그의 철학을 잘 아느냐고 하면 아니다. 전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의 철학을 들고 몇 날 며칠을 씨름해 본 적도 고뇌해 본적도 없는 사람이 그의 철학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머릿속에 담아야 할 내용이 많지만 그것은 내 지식 저장통에 담겨서 나와 융합되는 내용물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휘발되어 날아가 버린 내용을 감히 조금이라도 이해한다고 말을 꺼내고 싶지 않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그의 말처럼 난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싶다.


단지 그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남은 하나의 흔적은 그가 참 고달프게 살았다는 것이고 그런 것은 전형적으로 내면에 생각이 많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감각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진리와 그리고 모자란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사실 추리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이런저런 것을 단정 짓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일 테고 이것은 ‘너 자신을 알라.’ 고 하는 소크라테스부터 내려오는 ‘무지의 지’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가 열어준 숨구멍이 바로 난센스이다. ‘헛소리.’


그렇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지만 우리는 헛소리는 실컷 하면서 살아도 상관없다. 그것이 헛소리인 것을 인지하고 이야기하는 한 꽤 안전하고 유익한 오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이 영화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는 전부 헛소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밝혀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난 과거부터 조커라는 캐릭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배트맨 오리지널 시리즈는 잭 니콜슨이라는 배우 덕에 조커가 좋아졌고 다크 나이트에 출연하는 히스 레저의 조커는 악당 캐릭터 그 자체로 조커가 좋았다. 그래서 새롭게 조커라는 캐릭터가 분리되어 독자적인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고 했을 때 그에 대한 기대가 충만했고 그래서 직접 개봉 당일 거의 마지막 야간 상영을 기다려 이 작품을 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내 감상이나 기분이 어땠냐고? 엄청 좋지 않았다. 작품이 나쁘다거나 재미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그게 영화가 끝난 후 내가 느낀 감상의 큰 덩어리였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나는 꽤 오랜 시간을 홀로 사색해야 했었다. 물론 영화를 다시 보거나 리뷰를 찾아보고 해석을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활동하는 것도 이런 기분을 해소하는 좋은 방법일 테지만 이런 기분이 들면 나는 그것을 그냥 내 버려둔다. 두 번 감상하거나 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 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이런 기분의 정체를 꽤 깊이 있게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영화에 대한 정보는 많이 사라진다. 그것이 영화 연출자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는 데는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허구의 설정이라는 것은 때론 틀이 되어 생각이 확장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감독의 연출 의도는 나중에 인터뷰를 찾아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일도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받은 느낌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내 감정에 대한 해석이지 영화 그 자체의 연출 의도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 둔다.


이것은 나의 3번째 조커이고 당연히 조커라는 캐릭터에 대한 나만의 해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해석에 대한 다른 변주를 보기 위해 간 것이기 때문에 나는 꽤 조커라는 캐릭터에 몰입하여 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다. 그가 내면적으로 고통스러운 캐릭터라는 것은 분명했고 감독은 아서라는 인물의 내적 고통과 분노를 정말 손에 잡힐 듯 잘 묘사해 놓았다. 그래서 난 그 캐릭터에 의해 아주 크게 격앙되고 흔들리면서 상영시간 내내 어떤 아픔에 대한 공감을 느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을 보고 난 이후의 기분은 정말 우울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아서 플렉은 그냥 내적 고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병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큰 차이를 가지고 온다. 내적 고통은 극복할 수 있는 역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신착란은 캐릭터가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서 플렉이 내적 고통을 느끼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그 고통이 정말 외부조건에 의한 것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연출의 문제점이라고 느꼈다.


영화는 아서가 착시 현상과 몽환을 경험하는 연출을 통해서 현실을 인식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에게 인지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서 플렉의 발자국이 핏빛으로 여기저기 흔적을 내는 연출은 끝까지 이 카메라의 관점이 사실적 관점이 아니라 아서 플렉의 망상적 관점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아닌지를 판단하고 돌려봐야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이 아서 플렉이 정신병원 안에서 겪고 있는 망상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영화 자체가 너무 허무해진다. 그런 해석은 누군가에게 필요할지는 몰라도 나의 기분을 설명하는 해석은 될 수 없다. 결국 내 기분이 그렇게 망가진 이유는 정당성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서 플렉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를 격려하고 또한 일어서려는 그를 끝끝내 무너뜨린 세상을 비난하고 그가 죽인 많은 생명도 악에 대한 응징이라고 생각하고 정당화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럴까?


아서 플렉이 망상 환자가 되면서 우리는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많아졌다.


첫째. 정말로 아서 플렉은 아이들의 습격을 받아서 간판을 잃어버렸나? — 후에 사장은 아서 플렉이 일터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는 비난을 하면서 그 간판값을 월급에서 까겠다는 통보를 한다. 그냥 볼 때는 사장이 너무하네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다시 생각해보면 아서는 피아노 치는 사람의 반주에 맞추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습격받는 것을 그 현장의 모두가 보았는데 왜 그것에 대한 보고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둘째. 봉변을 당한 아서 플렉에게 뚱뚱한 동료가 권총을 건네면서 돈은 나중에 줘도 된다고 말을 한다. 아무리 추적이 안 되는 총이라지만 그런 총을 ‘나는 총을 가지면 안 돼.’라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아서 플렉에게 쥐어준다?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 돈은 나중에 줘도 상관없다고 말을 하면서? 왜 이런 호의를 갑자기 보이는 것일까? — 아이들 병원에 공연을 간 아서 플렉은  행사 도중 권총을 떨어뜨리고 해고를 당한다. 그때 사장은 아서가 먼저 동료에게 접근해서 권총을 사겠다고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화 너머로 한다. 아서의 정서가 불안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아서가 봉변을 당하고 들어오니 동료가 슬며시 다가와서 권총을 건넨다. 이 사고뭉치가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아서는 이미 여러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환자다. 스탠딩 코미디언이 되고 싶지만 남과 소통하는 것에 장애가 있는 아서에게 그것은 너무 힘든 도전이고 그는 코미디가 뭔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받고 싶은 것은 애정과 관심 그리고 환호다. 코미디라는 것은 그것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를 어떤 수단일 뿐 아서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코미디 노트에 적힌 ‘내 죽음이 삶보다 가치가 있기를..’이라는 문구가 보여주는 것은 아서가 자살을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도구로 총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서는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손에 넣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기 망상으로 아이들의 습격과 동료가 총을 건네는 상황을 만들어 내어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필요한 상황을 아서는 스스로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가는 중이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극 중의 대사로 영화는 우리에게 툭툭 암시를 건네는 것이다.


셋째. 은행원 살인 사건. 그럼 이 부분의 이상한 점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악당이 3명 다 은행원이며 그들이 지하철에서 여성을 추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여자가 아서를 바라보면서 도움을 청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광대 분장을 하고 있는 그에게 여자가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지하철에서 악당 짓을 하는 캐릭터들은 백인도 아니며 더욱이 은행원은 더욱 아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이들이 토마스 웨인과 관련이 되어 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너무 많이 겹쳐진 상황인 것이다. 권총 사고가 나는 날 아이들의 병원에 공연 스케줄이 있었던 아서 플렉, 그 장소에 가면서 권총을 챙겨갈 이유가 사실은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권총을 굳이 챙겨갔다가 공연 중에 떨어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럼 그날 권총이 아서 플렉에게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토마스 웨인과 관련되 분노를 이미 오래전부터 내재화하고 있었고 그와 관련된 누군가를 죽일 계획을 이미 다 만들어 놓은 상황이지만 아서의 다른 내면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차근차근 자신과 토마스 웨인과의 관계를 밝혀가는 중이라고 망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상황에서 아서 플렉이라는 캐릭터가 내적으로 의식과 무의식이 분리되어 작용하는 다중인격적 캐릭터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어머니는 망상증은 있지만 친절한 사람이었고 그녀는 과거 아동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는 아서 플렉을 입양했으며 아서는 학대의 영향으로 외부와 제대로 된 소통이 힘들었고 인격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하는 토마스 웨인의 이야기를 내면화하면서 자신이 그의 버려진 아들이라는 것을 거의 사실처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에게는 복수가 필요했다. 하지만 복수는 하면서 자신은 상처 받은 사람으로 남을 필요가 있었던 겁쟁이 아서는 내면을 분리하여 다중인격을 만들고 각 상황을 자기가 필요한 방향으로 인식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의 폭력성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밖에서 쓰레기를 걷어차는 모습. 그리고 도망가는 은행원을 끝까지 쫓아가서 사살하는 모습은 우발적인 상황에게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는 모습과는 뭔가 모를 괴리가 있다. 그리고 도망쳐서 보여주는 행동은 예술적인 춤이다. 평생을 존재감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느끼던 아서는 마침내 자신의 내면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광대 살인사건으로 떠들썩하고 그런 아서를 여자 친구인 소피가 당신은 영웅이라는 말로 부추긴다. 물론 망상 속에서 말이다. 만약 지하철에서 여성이 은행원에 의해 실제로 성추행을 당했다면 그런 은행원을 토마스 웨인이 티브이에서 두둔할 수 있었을까? 광대 살인마라는 것도 결국 목격자 진술이다. 그리고 광대 분장을 하고 한 번의 우발적 사건이 일어난 것 치고는 세상은 너무 뜨겁게 격앙되고 있다. 그렇다면 살인 사건은 단 한 건만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광대 킬러가 사방에서 증오범죄를 실제로 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넷째.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며 살인도 계속된다.


아서는 병원을 찾아가고 병원에서 어머니의 기록을 찾아낸 이후 그 내용에 절망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정말일까? 아니면 아서가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망상으로 만들어 낸 조작일까?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정보는 사실과 거짓이 아주 교묘하게 섞여있는 느낌이다. 우리는 그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계속 의심하면서 조각 맞추기를 해야지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가 어머니를 죽이면서 뱉는 말은 ‘난 내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코미디야.’ 이 말이다. 그런데 이 인물은 비극이 무엇인지, 코미디가 무엇인지 구분이 불가능한 인물이다. 그냥 내면이 언제부터인가 분노로 가득 차서 분열하고 있었고 그 분노를 정당화할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스스로 믿고 실행하는 인물로 보인다.


다섯째. 머레이 쇼에 출연 제의가 온다. 영화에서는 머레이가 마치 악당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그는 아서가 내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을 모른다. 그런 그를 티브이쇼를 통해서 조롱했다고 하지만 원래 스탠딩 코미디가 남을 희화화하고 관객을 웃기는 장르이다. 그런 장르에서 일하는 사람이 자신을 희화화한 것에 분노한다? 이상한 일인 것이다. 그러면서 머레이 쇼에 출연은 승낙한다? 머레이 쇼의 출연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아서에게는 그 자체로 기회이고 이것을 악의라고 단정하고 단죄할 이유는 없다. 이 쇼에서도 토마스 웨인에 대한 그의 분노는 지나치게 강조되고 머레이도 그 부분을 지적한다.


여섯째. 그럼에도 우리가 아서를 선한 사람이고 느끼게 되는 이유는 소피에 대해 아서가 무엇을 했는지 결말을 알 수 없고, 자기 집을 찾아온 뚱뚱한 동료는 죽이면서도 난쟁이 동료에게는 오직 너만이 나에게 잘해줬다는 이유로 그를 살려보는 장면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아서에 공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트릭이라면 관객 전체는 교묘할 연출에 모두 속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곱 번째. 마지막 씬들에서 아서는 갑작스레 토마스 웨인 부부가 죽어있는 장면을 떠올린다. 이 장면은 결국 아서가 그들을 직접 죽였다는 이야기 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서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인물이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든 것이 그 이유일 수 있지만 아서의 고통은 어릴 때 받은 학대로 인한 정신질환이 가장 큰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로 인해 아서는 망상적 사고를 가진 어머니의 이야기를 내면화하여 자신을 비극적 인물로 묘사하면서 자살을 통한 탈출을 꿈꾸지만 겁쟁이인 그는 그럴 용기가 없다. 그러자 억눌린 자아는 울분을 만들어냈고 그 울분은 자아를 분열시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면서 그것을 폭주시킬 여러 시나리오를 만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아서의 자아는 완전히 분리된다. 모든 살인을 계획하는 아서, 그리고 그것과는 상반된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을 경험하는 아서가 분리되어 활동하면서 하나의 사이코 살인마가 완성되는 것이다.


아서 머레이  이후 체포되어 후송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너무나 작위적이며 이것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  망상이라고 봐야  것이다. 그리고 온통 광대로 뒤덮인 거리의 풍경은 그것이 지하철 사건  하나로 기인했다고 보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고 그동안에 아서는  많은 살인을 광대 분장 또는 가면을 쓰고 행했을  있고 토마스 웨인도  과정에서 죽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의 혼잡은  결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망상과 현실의 파편을 뒤죽박죽으로 섞어서 나열하여 어디로든 튈 수 있게 영화 자체가 그렇게 설계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영화를 다시 재관람하고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느낀 이 감상은 영화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며 디테일에서 곳곳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쓰는 모든 영화나 그 밖의 콘텐츠 관련 내용들은 기획자의 연출 의도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내용과 나의 내적 경험이 만나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해석에 관한 창작물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헛소리다. 다시 그것을 강조해 둔다.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은 충분한 것 같고 이제는 평가를 할 차례인 것 같다.


재밌는 영화이고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훌륭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자체의 구조가 아주 독창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부분은 메멘토나 셔터 아일랜드의 구조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특히 셔터 아일랜드에서 주인공이


‘괴물로 평생 살겠나? 선량한 사람으로 죽겠나?’라고 마지막에 하는 대사가 이 영화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셔터 아일랜드에서는 괴로운 기억을 가지고 평생을 사는 것보다 기억을 지우는 수술을 선택하는 것에 비해 조커의 아서는 자신이 계획했던 자살에서 비껴가 괴물로 평생을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다른 결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가 엄청 독창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만들어진 조커라는 캐릭터는 내게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와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그가 겪는 내면적 고통은 공감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해결법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그의 고통의 대부분은 그의 정신질환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로 인해서 그가 고담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내적 고통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즉 친절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어도 그의 망상은 그를 계속 괴롭혔을 가능성이 크다. 즉 고담이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대로 아서의 내면적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아서는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냥 대부분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이고, 무례하다고 느끼는 것도 그의 소통능력이 떨어지는 부분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즉 이 영화에서 사회문제와 개인의 내적 고통은 별개로 가는 사항이다. 사회문제가 해결된다고 아서의 내적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아서 자체도 더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고 사회 부조리에 대항하는 악당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발전시켜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은 그냥 대중의 환호와 관심이다. 요즘 말로 그냥 관종인 것이다.


무엇보다 히스 레저의 조커와 차별화되는 부분이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사회의 구조적 압력과 모순에 대항하는 악당이다. 그는 자신이 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악당이지만 세상은 온통 부조리하고 사람들도 그 자체로 모순 덩어리라는 것을 조롱하고 꼬집고 공격한다. 거기에 비해 아서의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그를 향한 대중의 환호는 그가 하는 행위에 대한 환호라기보다 그냥 쌓여있던 사회적 분노가 어떤 자극에 의해 터져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조차 아서의 망상일 가능성이 크다.


아서는 자신의 악을 자꾸 합리화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은 악당이 아닌 것처럼 자기 자신을 자꾸 포장한다. 이런 점은 조커라는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광기 중에서 가장 매력 없는 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다.


사회 문제가 있다.

개인의 문제도 있다.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조합하여 분노를 폭발시키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면 사회는 혼란해지고 더 망가질 위험이 크다. 역사가 그것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도 그런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면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전환하여 분노를 외부로 표출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은 엉뚱하게 진행되어 사회 자체도 더욱 갈등이 첨예해지고 개인도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다. 사회를 아무리 뜯어고치고 발전시켜도 내면이 불행한 인간의 삶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무질서한 고담과 개인의 불행이 이상하게 결합한 것 같은 이 영화는 내게는 크게 매력이 없다. 마음이 아프다고 모든 사람이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 상처 받았다고 모두 극단적인 복수를 감행하지도 않는다. 그가 내적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가 행하는 일이 악이 아닌 것은 아니다. 연출진이 조커가 원래 악을 상징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악의 색채는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희석시키고 왜 악이 되려고 마음먹고 움직이는지는 더욱 부각하면서 색깔이 좀 모호한 영화가 되고 만 것 같다.


악당으로서 매력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불쌍해서 동정하게 되는 악이 제대로 된 캐릭터 설정인지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다.


세상에는 내적 고통을 오히려 더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인물들도 많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그를 상기시키며 개인적은 헛소리를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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