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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피터 Jul 02. 2021

개통령

강형욱

인생을 살면서 전혀 의외의 곳에서 무언가의 해답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난 개를 잘 모른다. 잘 모를 뿐 아니라 개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에 내가 살던 시골에서 키우는 개들은 다 집 지키는 개들이었고 그래서 개소리는 크고 날카로웠다. 골목을 지나다 보면 이미 개가 미리 알아채고 짖기 시작했고 그럴 때면 심부름을 가야 하는 나는 이 길을 돌아갈까? 아니면 그대로 개 앞을 가로질러 뛰어갈까 고민이 많았다. 목줄에 묶인 개가 나를 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달려지나 갈 때면 묶인 채로 앞발을 들고 짖어대는 그 개들이 너무 무섭고 그런 개를 무서워하는 내가 싫었다.


그래서 개는 내게 항상 무섭고 사나운 동물이었다. 이후 부천에 올라와서는 고향에서 처럼 묶어놓고 키우는 개들이 없었기에 그런 것을 잘 보지 못해 잊고 지내고 있었지만 결국 그런 감정이 개에 대한 나의 인식을 고정시켜 놓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개가 무섭다. 심지어 밖에 나가 작고 귀여운 개들이 내게 접근할 때도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 것은 어릴 적의 무의식이 많이 작용하는 탓이리라. 그래도 요즘 같이 주변에 개가 많은 시대에는 최선을 대해 개에 친숙하게 접근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개와 접촉한 후에 목 뒤 쪽이 뻣뻣해지는 것은 나의 긴장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그런 이유인 것이다.


사나운 개에 대한 기억이 있는 나는 유튜브를 통해서 강형욱 조련사의 영상을 처음 접했다. 대부분 문제견이라고 불리는 반려견의 문제점을 해결해주기 위해 영상에 등장하셨고 그런 문제적 행동을 하는 이유와 교정법을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것이 인상 적이었다. 그의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과 반려견 주인들의 무지에 의해 발생하는 개와 사람 간의 미스 커뮤니케이션이 핵심적인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많은 경우 지금의 애완견들은 인간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지만 덩치가 크고 사냥이나 다른 인간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육성된 종들은 그 개에 대한 사전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주인들을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주인들이 ‘선의’로 하는 행동들이 인지능력이 충분치 않은 개들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주어서 그것이 개의 인식체계를 혼란시킬 경우 개는 아주 사나워지고 심지어 주인을 공격하기까지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어 교정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개에게 안락사를 권장해야 하는 상황까지 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보면서 깨달았다.


그런 영상들을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개에 대한 강형욱 조련사의 애정이었다. 어떤 개가 어떤 사나운 모습을 보여도 그것을 ‘악’으로 보지 않는 것, 개 자체가 사납고 문제라고 보지 않고 종의 특성과 잘못된 사육 그리고 주인의 무지한 ‘선의’에서 비롯된 각종 오류들을 지적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모두에게 정확히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과연 ‘개통령’으로 불릴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가 어떤 ‘인성’과 삶 그리고 인생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개에 대한 애정이 진심이라는 것, 그래서 그 애정을 바탕으로 때론 개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인을 설득하는 그런 모습이 너무 인상 깊었다. 개와 우리는 공존해야 하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무엇을 주는 형태로 관계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주인과 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럴 때 모든 상황을 고려하고 그에 걸맞은 솔루션을 애정을 가지고 조언하는 모습에서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개가 저럴진대 인간은 어떻겠는가?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인간 자체의 특성을 이해하면서 양육을 하고 있을까? 개가 종마다 나름의 특색을 가지는 것 이상으로 인간의 내면은 천차만별로 분화한다. 그렇게 분화하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특성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들을 키우게 되면 그 관계에서는 무수히 많은 미스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의 성질과 기질이 그럼에도 별 탈없이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생활을 무리 없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 사회는 그 아이를 문제아로 때로는 그것을 넘어 ‘악마’로 점찍어버린다. ‘부모’도 ‘선생님’도 아무도 아이의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해내지 못하고 그냥 ‘악’이라고 낙인찍는 경우가 허다하다. 개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개 주인에게 설명할 수 없듯이 아이들도 자신의 잘못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스스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된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단순히 ‘자극’과 ‘불안’만을 인식할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 이외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다른 한 아이를 괴롭히는 것은 자신들의 불안을 집단 괴롭힘이라는 쾌락을 통해 상쇄하려는 본능적인 행위이다. 이런 반응은 각종 동물 사회에서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야생성을 기르고 사냥 본능을 개발하고 둘러싼 환경이 좋지 않을 때는 형제 살해까지 일어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 본능이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있다. 거기에 덜 발달한 인지능력은 거짓된 ‘정의’를 자신들의 논리로 내세우며 합리화의 과정을 배워가고 ‘피해자’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학대’ 받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내재화하면서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어른들이 이것을 인지하면 과연 개통령 강형욱 조련사만큼 냉정하게 인간 자체의 특성을 인지하고 문제의 해결점을 용감하게 조율할 수 있는 그런 참 어른인 ‘부모’와 ‘선생님’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을까?


인간에 의해 ‘폭력’을 학습한 개들은 아주 쉽게 난폭해진다.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네트워크라는 기술을 통해서 아주 쉽게 범죄를 학습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지금 펼쳐져 있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위해 아니면 아이들의 컨트롤을 위해 쉽게 쥐어주는 핸드폰 등의 기기가 어느 순간 덜 성숙한 인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기술과 힘을 아이가 갖도록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기술 자체는 오히려 아이들이 어른보다 습득하기 쉬울 수 있다. 바둑 등의 단순 계산의 능력은 어린 머리의 신속함을 어른들이 쫓아가지 못한다. 그만큼 범죄와 나쁜 짓도 창의적으로 빠르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이 왜 나쁜 자극에 쉽게 빠져들어가는지 그 원리를 이해하고 우리에게 설명해 줄 어른들이 우리 시대에는 많은가?


내적 고통을 깊이 경험하지 않은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아픔에 공감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남을 괴롭힐 때 자신이 느끼는 쾌감 정도의 고통을 상대가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 있는 것이다. 칼에 찔려 공포를 내재화 한 사람이 상대를 칼로 깊게 찌를 수 있을까?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사냥하는 아이들은 사냥의 쾌감은 알아도 사냥당하는 공포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어른이 아이에게 사냥당하는 공포를 학습할 것을 강요할 수도 없다. 그런 공포는 아이의 내면을 완전히 망가뜨릴 테니 말이다. ‘선악’의 이분법이 너무 분명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정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개통령을 보면서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정의’가 나를 질식시키고 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정말 감사하다.


인간을 비판할 때 그 비판에 인간 자체에 대한 ‘애정’이 들어있지 않은 모든 비판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악’을 판단하기에 앞서 무지한 인간 자체를 연민하면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개에게 물릴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처럼 아픈 사람들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내쪽도 다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되지 않는 경우에는 이 사회와 격리를 선언해야 하겠지만 그 경우에도 인간 자체에 대한 연민은 필요하다. 그게 판단하는 당신의 마음이 망가지지 않도록 해주는 마지막 안전벨트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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